윤대성의 <출발>

by 이순직

등장인물은 두 명이다. 사내(도마)와 역원이다. 사내는 소문을 통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간이역에 누워 기차를 기다렸고 역원에게 시간을 물었던 거다. 그러나 역원은 사내가 자신이 기다리던 사내인지 모른다. 극이 진행되어 가면서 알게 된다. 사내(이름은 도마, 전직 전도사)는 이상주의자이다. 다음 대사에서 알 수 있다.


사내 : 아닙니다. 버린 게 아닙니다. 다시 돌아오려던 것이…… 저 너머에…… 저 산 너머에 그것을 찾아서…… 그것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손을 벌려 찾아 떠났던 거예요. 여자를 버린 게 아니랍니다.

역원 : 그래서 그것을 찾았소?

사내 : 황무지와 폐허를 발견했을 뿐이오.


산 너머 저쪽에 있는 것은 ‘곧 손에 잡힐 것 같은 무지개처럼 찬란한 외양’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이상(理想)이며 유토피아(Utopia)이다. 사내가 전도사란 점에서 그것은 기독적인 이상(理想)이다. 반면 역원은 현실주의자이다. 의심 많고 한 여자를 송두리째 소유하고자 한다. 마리아를 겁탈해서 아내로 만들었고 아내의 마음까지 소유하지 못하자 자식을 호수에 버린다. 이 때문에 아내는 미친다. 미쳐서도 사내를 기다린다. 그러다 철로에 누워 압사(壓死) 당한다. 모두 질투 때문이다, 아내가 기다리는 사내에 대한 질투!


역원 : 3년 동안이나 참아왔지만 더 기다릴 수가 없었소! 그래서 난 어느 날 밤 기차가 막 지나가 버렸을 때 바로 여기서 그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강제로.

역원의 의심은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럽다.

역원 : 그렇소. 그건 비극이오. 갖지 않은 것보다 더한 비극인 거요. 그래서 난 그 여자에게 난폭하게 굴었소. 그 여자의 침묵과 복종이 불안했단 말이오. 이 여잔 지금 내 품에서 누구를 그리고 있는가? 이 여잔 지금……

역원 : 아이가 생기자 내 존재는 그 여자의 안중에 없었소. 난 이제 그 여자의 마음뿐 아니라 몸마저 아이에게 뺏기게 되었던 거요. 난 고민하기 시작했소. 질투. 그건 틀림없는 질투였소. 도마란 그 사나이에 대한 것과 비슷한 질투. 그것을 아이에게 느꼈던 거요. 난 부쩍 의심이 나기 시작했소.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다.


역원 : 오, 당신이야말로 잔인한 사람이오. 죽음 속에서도 그 여자와 같이 있기를 원하는 거요? 이 남편을 비켜놓고 말이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무엇이오? 무엇을 가졌소? 당신의 무엇이 그 여자로 하여금 당신을 기다리게 했느냔 말이오?

사내 : 꿈! 꿈을 가졌습니다.

역원 : 꿈?

사내 : 그렇습니다. 난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 너머, 저 산 너머에 황무지와 폐허만이 가득 차 있는 그곳에 말입니다.

역원 : 그랬었군! 당신은 꿈을 갖고 있었군. 그 여자도 꿈을 갖고 있었지. 당신의 꿈을. 꿈을 갖는다는 건 끔찍한 일인 줄도 모르고.


결국 마리아가 선택했던 방식 그대로 기차에 스스로 압사(壓死)하는 이가 역원이라는 점에서 역원은 이상주의자가 되었으며 사내는 뼛가루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가 된다. 말하자면 서로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사건을 통해 인물의 성격이 바뀐다는 점에서 둘 다 입체적 인물이다.

간이역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원형 철로라는 점에서 그리고 출발하는 곳이 곧 종점이라는 점에서 철로는 인생을 가리킨다.


역원 : 그렇지만 어디 목적지가 있을 게 아니오?

사내 : 네. 종점까지 갑니다.

역원 : 하하. 종점은 여기랍니다.

사내 : 네?

역원 : 이 기찬 순환열차요. 뱅뱅 돌죠. 그러니까 당신이 출발한 곳이 곧 종점이 되는 거요.


태어남의 끝은 죽음이지만 윤회설(輪廻說)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이 세상의 끝이지만 저 세상으로 가는 태어남이다. 몸은 죽지만 영혼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영혼을 믿기 시작한 신석기시대부터① 인생은 원형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파에돈·Paedon>을 읽어 보아도 영혼은 하데스(Hades)로 간다는 믿음을 만날 수 있다. 하데스에 대한 믿음은 이상주의자가 가진다. 그런 측면에서 다음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역원 : 난 당신이 그 여자와 같이 있는 걸 원하지 않소. 그 여자는 내 거요. 알겠소? 내 거란 말이오. 자…… 그럼…… 잘 있으…… 오.


역원이 죽는다. 마리아가 선택했던 방식 그대로. 사내는 마리아의 뼛가루를 들고 있다. 이 얘긴 결국 역원이 이상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사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극의 초반과 뒤바뀌어진 입장이다. 원점이다. 원형 철로가 그렇듯 0시에 기차가 지나가듯 원형의 암시가 곳곳에 베여 있는 것이다. 원형 구조를 가진 극의 속성은 부조리극이다. 따라서 <출발>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그 ‘출발’은 ‘끝’이기도 하다.

또 다른 곳에서 원형(圓形)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사내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전도사다. 기독교의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창세기가 세계의 시작이고 요한계시록이 세계의 종말이다. 종말 뒤엔 오직 신의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내는 직선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역원은 어떨까? 역원은 교회를 불태웠다. 즉 그는 윤회하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 이 얘긴, 마지막 장면과 매우 밀접하다. 역원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이다. ‘출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꼼꼼하게 짜여지긴 했지만 허점도 있다. 물론 그것은 사소한 허점이다.


역원 : 아…… 기차 말이오? 그렇군…… 당신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군…….

사내 : 승무원이십니까?


분명히 지문에 ‘역원 차림의 텁수룩한 남자’라고 했으니 사내의 물음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미 ‘역원의 옷’을 입고 있는 역원에게 승무원이냐고 묻는 대사는 불필요하다. 또 하나 사소한 실수가 있다.


역원 : 나도 모르겠소. 시계가 있어야 말이지. 여기선 시계가 소용이 없어요. 시간을 알 필요가 없으니까……. 도대체 시간을 알아서 무얼 하시려오?


굳이 ‘시간을 알 필요가 없으니까…….’라는 대사가 필요할까? 필요 없다고 본다. 사내는 간이역에서 자정에 지나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사내는 자살하려는 것이다.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두 사람의 대사는 관객을 위한 것이지 두 사람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확실히 불필요하다.




① Arnold Hauser 지음, 백낙청 옮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고대. 106쪽. 중세편, 창비신서 12. 20쪽을 보면 “애니미즘(animism)의 입장에서 본 세계는 현실세계와 초현실세계,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와 눈으로 볼 수 없는 정령계(精靈界), 한정된 수명을 지닌 육체와 영원불멸의 영혼으로 갈라져 있다. 당시의 매장 의식(埋葬儀式)과 습관에 비추어 볼 때, 신석기시대의 인간이 이미 영혼과 육체를 분리 가능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되어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카타르시스와 소외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