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돈(Phaedon)의① 파이돈(Phaedon)을 요약하자면, 죽음을 앞둔 플라톤(Plato, 427?∼347? B.C.)의②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 B.C)가③ 그를 따르는 者들과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영혼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 나아가 철학자가 삶을 사는 자세에 대한 문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철학자들은 육체적인 삶보다는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기에 육체는 한낱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하며,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장애물로 취급한다. 육체라는 거추장스러운 짐을 벗어버리고 하데스(Hades)로 가는 것은 정신적인 삶을 위해 한층 바람직한 것이며, 이러한 점 때문에 철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지 영혼의 죽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육체라는 거추장스럽고 다루기가 힘든 짐을 던져 버리고 하데스로 가서 보다 완벽하고 철저한 정신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천천히 죽어 갔다, 육체라는 짐을 벗어버리겠다는 신념과 믿음 하나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言行一致다. 만일 플라톤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가 끝내 독약을 거부하고 사형 집행관에게 抗命 하였더라면 소크라테스가 설령 죽음을 면하더라도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抗命으로 읽을 수 있다. 영혼불멸의 신념이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했다. 온갖 비유와 논리로 영혼의 不死와 하데스의 實在를 설명하고, 그것이 플라톤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의 지식이라고 할 때에 그것의 증명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이며 태도이다. 자세와 태도가 플라톤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의 지식에 대한 마지막 증명이 되는 셈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합리성과 논리성, 검증 작업을 통해 이룩되었다. 관찰에 의한 가설(假說)을 세우고, 假說을 객관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보편타당한 사실이 되었다. 달에 옥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찧고 있다는 것은 관찰에 의한 假說이다. 달에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관찰도 가설이다.
가설은 아폴로 11호의 선원이었던 닐 암스트롱(Niel Armstrong, 1930∼)에④ 의해 검증되지 못했다. 달에는 대기권이 없으며, 생물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가설은 설득력을 잃고 전설이나 野史로 전락한다. 반면에 동맥과 정맥을 이어주는 실핏줄이 있다는 하아비(William Harvey, 1578∼1657)의⑤ 가설은 그가 죽고 난 훨씬 뒤에 모세혈관이라는 이름으로 검증되었다.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 1876∼1955)의⑥ 많은 이론들도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그중에는 검증된 것도 있으며, 검증되지 못한 것도 있다. 통일장 이론(unified theory of field)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연구 대상에 있다.
인간이거나 인간과 관계된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라면, 자연과학은 글자 그대로 자연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서 중요시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감성이다. 감성은 인간에게만 있으며, 자연에게는 감성이 없다. 감성은 저마다 손금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똑같은 상황을 접해도 반응이 다른 것은 감성 때문이다. 내성적이니 외향적이니 양향성이니 하는 말들도 이성에 대한 말이라기보다는 감성에 국한되는 말이다.
프로이트에서 비롯된 감성 연구는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으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모든 학문의 속성이 체계화와 도식화에 있는데, 그물이 너무나 성겨서 빠져나가는 감성이 너무나 많다. 정신분석학이 연구한 감성은 아주 典型的인 Model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감성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자세가 더욱 성긴 그물코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인문학에서 감성 연구는 전래 민요를 채집하듯이 수많은 事例硏究 목록 작성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事例가 하나의 정답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지식 또는 순수한 앎이 이성과 손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성과 손잡은 횟수만큼 감성과도 손잡고 있다. 순수한 앎은 인간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루에 세 끼의 식사를 해야 건강하다’라는 지식은 반드시 실천되지 않는다. 식욕이 형편없어 한 끼를 건너뛸 수도 있으며, 식욕부진은 이성적인 면에서 고려될 수도 있지만 감성의 측면에서도 고려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신은 이성과 감성을 구성 요소로 하는데 이성은 논리성·합리성·이상성(理想性)을 토대로 하며, 감성은 본능·육감·감정·충동·욕구 따위를 토대로 한다. 중요한 것은 대립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이며,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는가 하면 어느 사이 감성이 이성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숱한 사례 연구에도 불구하고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典型만이 있다. 조급하게 결론을 내린다면 자연과학에서 순수한 앎은 검증된 사실이다. 인문학에서 순수한 앎은 실행 가능한 行路다.
지식이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아래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다.
푸코의 계보학적 시선으로 볼 때 지식은 인식하는 주체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다. 권력이 인간 속에 침투해 들어가고 인간관계 속에서 행사되는 것이라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지식은 그러한 권력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그런 점에서 중성적이거나 순수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은 권력의 전략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나 생성되고 발전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의 영역 속에 권력의 결과가 그대로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을 형성하는 가능성의 조건들이 권력관계 속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⑦
論議의 폭을 한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순수한 지식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6)의 견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앎에서 ‘순수한’이라는 형용사를 ‘개인적인’이라는 말로 代置한다면 논의는 가능하다. 여기에서 개인적이란 말은 지식의 영향 관계를 단절하자는 의미이다. 지식의 영향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존속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논의 자체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대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견해를 고스란히 외우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에 의하면 지식 또는 앎은 권력을 지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재생산하여 존속하게 한다. 따라서 예의 영향 관계를 최대한으로 억제하는 방향으로는 논의가 가능하다.
순수한 앎은 무엇인가? 혹은 개인적인 앎은 무엇인가?
지식의 첫걸음은 言行一致이다. 그것은 일회용의 검증이 아니라 생활화되어야만 지식으로 존속할 수 있다. 플라톤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의 자연스러운 죽음 행위는 평소의 지식에 대한, 영혼 불사와 하데스의 실존에 대한 신념이 생활화되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어럽다. 하다못해 전쟁터에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이 없이는 용감하게 散華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예의 일념이, 죽음이 임박한 시간에 느닷없이 솟을 리는 없다. 평소에 그러한 일념을 생활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다른 각도에서 논의를 개진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생활화’라는 말이 막연하고 추상적일 수도 있다는 餘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이 되었지만 감성이란 매우 미묘한 것이기에 다루기가 상당히 어렵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는 경우가 바람직하고, 반대로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경우가 바람직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경우의 판별은 순전히 개인적인 경향을 띄기가 십상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체의 타락 아래에서 개인의 타락은 보장된다는 점이다. 반대로 전체의 善 아래에서 개인의 善 역시 보장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 아래에서 순수한 앎이란 비로소 순수해질 수 있으며, 비로소 신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신념에 관한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신념은 지식에서 나오며, 지식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지식과 더불어 제시되는 Vision과 실천력이다.
이야기를 끝맺음할 때인 것 같다. <파이돈(Phaedon)>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것이지만 플라톤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의 하데스에 대한 믿음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영혼 불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가설을 검증하는 것은 신념이다. 신념이란 개인의 신념이며, 검증되기를 영원히 거부한 것들은 가설일 뿐이다, 적어도 플라톤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경우에는.
① 파이돈 (Phaedon, 417∼? BC). 펠로폰네소스 엘리스 출생. 그리스의 철학자. 펠레폰네소스의 엘리스에서 소크라테스 학파를 창시했다. 변증론과 윤리학에 관한 저작들을 남겼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스파르타와의 전쟁(BC 400~399)에서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렸으나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한 아테네인에게 팔려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집 <파이돈>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엘리스로 돌아가 소크라테스 학파를 만들었다. 많은 대화집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에는〈조피로스 Zopyrus〉·〈시몬 Simon〉만이 남아 있다.
②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의 명문 출신으로 젊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연장이며 발전인데,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이어서,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 동료들과 가라에 도피하여 있다가 이탈리아를 여행,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고 피타고라스 학파와 접하여,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독자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Apologia>, <Kriton>, <Laches>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골기아스>, <대 힙피아스>, <소 힙피아스> 등을 썼다. 그는 이상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칠리아의 참주(僭主) 디오니소스의 초청에 응해, 시칠리아로 갔으나 과두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했다. 그의 저작을 본 키레네 사람에 의해 해방되어 귀국, 아카데미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는데, <향연, Symposion>, <Phaedon>, <Republic>, <Phaidros> 등 주요 저술을 여기서 썼다. 이 학원은 A.D. 529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대학(University)의 처음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357년 디오니소스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칠리아에 가서 이상정치를 펴보려 했으나, 명성과 탁월함을 구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평범한 인물로서 그 실현이 어려울 듯 싶은 데다, 정변(政變)이 일어나 1년 만에 귀국, <법률, Nomoi>와 몇 권 더 저서를 쓴 뒤 81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情慾, Epithymetikon)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Logistikon)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으로서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선(至善)의 실체적인 이데아(Ides)를 직관할 수 없으나,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고 믿었다.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Eros)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想起說),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Sophrosyne),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氣槪, Thymoeides)의 덕을 용기(Andreia)라고 했다. 정의(Dikaiosyne)란 제덕(諸德)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고,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말했다. 그것이 <국가론>이다.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사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는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해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 유명한 철인정치론을 전개한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이어 통치자의 사유재산의 금지, 처자(妻子)의 공유 등을 주장하고, 전제정치‧과두정치‧민주정치 등의 정체(政體)의 성립과 발전, 결함 등이 날카롭게 지적하였는데, 여기에는 오늘날까지도 주목할 만한 탁견이 담겨 있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일련의 각주(脚註)다. (화이트헤드)”라는 평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철학은 서양 관념론적 이상론의 비조(鼻朝)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와 함께 철학사에 쌍벽을 이루고, 아카데미아 학파‧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철학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③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 출생.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Sophroniskos)와 조산원(助産員)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inarete) 사이에서 태어나, 처음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철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重裝步兵)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했다. B.C. 406년에 5백 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엔 교육자로 변신, 청년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자연철학을 습득했으나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고, 그도 이러한 상반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sophist)들처럼 궤변(詭辯)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단연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했다. 아무 저서도 남긴 바 없어,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포이(Delphi)의 신탁을 믿어,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고 주장하였다. 그 방법으로 여러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옳은 판단으로 유도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産婆術)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디몬(Demon‧精靈)의 소리를 경청하고, 이른 아침에 시작해서 일주야(一週夜)를 요지부동하면서 내심에 침잠하는 선정(禪定)의 경지에 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지혜(Sophia)를 사랑(Philos)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청년들에게 가르침으로써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시대의 참주(僭主)였던 크리티아스(Kritias)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神)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경과 40표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도주할 수 있었지만 투철한 준법정신에 따라 독배(毒杯)를 마시면서 제자들에게, ‘빌린 닭 한 마리를 갚아달라’고 유언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메가라(Megara)학파‧키니코스(Kynikos)학파‧키레네(Kyrene)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 피어나 서양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은 그에 대하여 “우리들이 만나 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④ 닐 암스트롱(Niel Armstrong, 1930∼2012). <글을 쓰던 당시에는 생존했으나 지금은 사후(死後)>.
⑤ 영국의 의학자‧생리학자. 커트 주(州) 포크스톤 태생. 1597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이탈리아 파도아 대학에 유학하여 A. 파브리키우스 교수 밑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609년 런던의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에 근무, 1623년 제임스 1세, 1627년 찰스 1세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한편, 인체의 구조‧기능, 특히 심장‧혈관의 생리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1615년 칼리지 오브 피지션스의 강사로 해부학과 외과학 강의를 하였다. 이 강의에서 혈액순환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하고, 1628년에는 불후의 저서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 Exercit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실험에 입각하여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생리학설을 밝히고, 고래(古來)의 갈레노스 학설에 결연히 반대한 것이다. 심장의 박동을 원동력으로 하여 혈액이 순환된다고 하는 새 학설은 반론도 적지 않았으나, 얼마 후부터 일반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동물의 발생에 관해서도 실험연구를 하여, 1651년 <동물발생론(動物發生論), Exercitationesde Generatione Animalium>을 저술하여, “모든 생물은 알에서 생겨난다”라고 주장하여 중세 이래의 고전의학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이루었다. 칼리지 오브 피지션스의 학감(學監)으로 몇 번 선출되고, 1654년에는 총장에 추대되었다.
⑥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의 울름(Ulm)에서 출생. 루이트포르트 김지나움에 입학하고, 여가를 이용하여 공장 기사(工場技師)인 백부로부터 대수(代數)와 기하학을 배워 수학적 재능의 우수함을 과시했다. 아버지가 공장의 사업에 실패하여,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이사하게 되자 아라루의 중학을 거쳐 취리히 공과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의 성적은 우수하지 못했으나, 수학·물리학에 특수한 재능을 나타내어, 16세에 이미 <운동체의 광학>에 착안하고 있었다. 21세에 대학을 졸업하여 가정교사를 지내고, 빈곤과 투쟁하면서 이론 물리학을 연구하였으며, 1901년 취리히의 공민권을 획득하여 특허국의 기사(技師)가 되었다. 1905년 <물리학 연보>에, 광전 효과에 플랑크(M. K. E. L. Planck)의 양자가설(量子假說)을 응용한 <광양자가설>과 분자물리학에 신생면을 개척한 <브라운 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 및 <특수 상대성 이론> 등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독일의 물리학 대가인 플랑크에게 인정받아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1911년 보헤미아의 프라하 대학, 1912년 취리히 공과 대학 교수가 되었고, 1914년 베를린 대학에 초빙되고, 또 카이저 빌헬름 협회 물리학 연구소 물리학 부장, 베를린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나, 스위스 국적이었기 때문에, 부자유스러우나마 연구를 계속할 수 있어,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으며, 1917년 상대론적 우주론을 발표하였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예견한 광선굴곡(光線屈曲)의 사실은 1919년 영국의 일식관측대(日蝕觀測隊)에 의하여 실증되었다. 1921년 노벨 문리학상을 받았고, 1929년에는 상대성 이론을 더욱 확장하여 만유인력 및 전자기력(電子氣力)의 일체를 포함한 <장(場)의 통일이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연구는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되어 오던 뉴턴의 물리학에 근본적 변혁을 가져옴으로써,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었고, 또한 양자역할(量子役割)에 미친 영향도 크다. 바이올린의 명수이고, 요트의 애호자로서 알려지고 있다. 1933년 나치즈에게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빠르게 했으며 평화주의자로서 세계연방운동을 주창하였다.
⑦ 오생근, 미셸 푸코와 언술‧권력‧주체, 외국 문학, 1987. 가을호. page 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