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세계는 오늘날의 세계와 무척이나 다른 세계였을 것이다. 과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과거는 항상 현재보다 편리하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예의 편리함이 인간을 보다 더 잘 설명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편리해도 그것이 인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데 도움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제도를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이다.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의 군주론도,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 자본론도 사실은 세상을, 세상에 내챙겨쳐진 인간을 설명하려 안간힘 쓴 결과이며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는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을 초래하였다.
따지고 보면 20세기 말기에 흡사 군사 문화의 전형(典型)에서나 볼 수 있는 일사불란한 공산국가의 몰락을 목도하다 보면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 등 위대한 철학자들의 헛수고를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결과를 방사능 폐기물처럼 지하 수천 미터에 암매장하자는 것은 아니다. 역사란 항상 진보나 발전의 개념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의 편에 서서 말하면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무게나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무게는 같다.
세계사(人類史)는 민족 단위의 선입관이나 가치관에 종속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작업은 모든 학문의 주춧돌이며,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문화일 것이 분명하고 포식의 포만감에 만족해하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정신의 만족까지 느껴 보려는 우스꽝스러운 작태를 우리들은 계속해 왔다. 그것은 말이 생겨나던 때부터일 것이고 그렇다고 하는 것은 말의 속성 때문이다. 말이나 글은 솔직히 말하건대 진실이나 진리, 혹은 참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고, 말이나 글로 진리나 진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화자(話者)의 욕망에 의해 조립되거나 해체될 수밖에 없는 말이나 글이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예는 마르크스나 마키아벨리에게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그 외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슬프게도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① 혹은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나 플라톤도 세상과 세상의 인간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작업을 전 생애에 걸쳐서 해 왔지만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똑바로 그 작업을 해 온 사람은 없다. 차라리 의자를 만드는데 몇 개의 나무가 필요하며 어떠한 연장이 필요하며 어느 정도의 숙련된 손재주가 필요한가를 설명하는데 시간을 보냈더라면 끊임없이 이름이 거론되는 불행을 피해 무덤에서 행복한 죽음을 살 것이다.
21세기의 희망은 20세기 말의 세기말적인 상황과 변화를 설정하고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플라톤 시대의 이분법을 흉내 낸 것이라 비난해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플라톤 시대의 이분법과 이 시대의 이분법은 무척이나 다르다. 절대적 방법으로써 이분법이 플라톤 시대의 이분법이었다면 이 시대의 이분법은 상대적 방법으로써 이분법이다. 세상을 설명하는 여러 방법 중에서 아주 작은, 쉽게 다른 방법들로부터 상처 받는 연약하고 취약한 이분법이다. 플라톤 시대의 이분법은 모든 방법 위에 군림하는 권자(權者)로써 이분법이다. 다른 방법은 없었거나 그 싹이 채 나기도 전이었으니까.
플라톤의 이데아는 철학자들을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데아를 이야기할 수 있다. 도시국가인 아테네에 살고 있던 일반인 ― 정치적 참정권이 없는 노예와 여자를 제외한 ― 들이 철학에 대해 상당히 왜곡된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인용문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철학은 그런 악평의 유가 아니라 더 심한 비난을 받고 있네. 그 이유는 철학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야말로 고약한 자들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철학자는 쓸모없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네. <“철인정치”에서>
그리하여 그가 다시 그 동굴 속에서 그림자를 식별하는 경쟁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런 환경 속에서 눈이 어둠에 익숙하게 되려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네. 이때 그는 지상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데 대하여 죄수인 친구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나? 결국 그가 지상에 다녀왔기 때문에 눈을 버리게 되었다는 소문이 날 것이며 지상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못할 짓인 것처럼 여기게 될 걸세. 뿐더러 그들은 동굴의 생활에서 지상으로 데려가는 자가 있다면 완력을 써서라도 붙잡아 죽이려고 할 것이 아닌가? <“이상 국가”에서>
전자(前者)의 인용문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얄팍한 언변으로 철학을 더럽히는 얼치기 철학자들에 대한 비난으로 읽을 수 있으며 후자(後者)는 일반인의 그릇된 인식에 대한 질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동굴의 우상이다.
플라톤의 Idea論이 유치스러울 정도로 도식적이고 간단∙명료한 것은 소피스트(Sophist)의 궤변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보다 명징하게 말한다면 지선(至善)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은 “철학을 論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철학을 行함”에 있다. 행동의 좌우명이나 자족적인 경구(警句)를 제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체에의 통찰로서 철학이다.
철학자가 위정자가 되어야 한다는 철인정치가 이상 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국가>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이때의 철학은 확실히 “行함으로써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이 전체에의 통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국가> 전편(全篇)에서도 알 수 있지만 특히 6장과 7장에서와 같이 제도에 대한 운용(運用)과 더불어 제도를 운용할 수 있는 재목(材木)에 대한 언급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지선(至善)의 파악 수단도 Idea論이 담당하고 있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국가> 10편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흔히 플라톤의 예술론이라고 불리는 <국가> 10편은 모방의 위계질서를 구축함으로써 가장 하위 개념에 속하는 모방을 예술로 보고 있어 시인 추방론을 뒷받침하게 한다. 물론 상위 개념을 차지하는 것은 Idea이다. 하나의 원칙이 모든 것에 대한 적용 기준으로 말미암은 오식(誤識)과 오판(誤判)을 충분히 감안하고서 Idea를 논(論)해야 함은 물론이고 더불어 오늘날의 세계가 기원전 지중해의 작은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세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덧붙여 고려해야 한다.
즉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아직은 하나의 몸뚱이인 철학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기하학이나 수학도 철학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흔히들 오늘날의 우리들이 학문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대다수의 것들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무엇 때문에 Idea론(論)을 정초(定礎)할 수밖에 없었는가? 좀 더 설득력이 풍부한 의문이라면 그는 왜 Idea論을 생각해 냈을까? 앞에서도 간단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Idea論은 쉽다. 쉽다는 것은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원효대사(617∼686)의 정토 사상의 근간(根幹)이 ‘나무아비타불’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소승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이며 자신의 해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해탈을 위한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플라톤의 Idea論의 뿌리는 論하는 철학이 아니라 行하는 철학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Idea論이란 과연 무엇인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저마다의 원형(原型)이 있다. 예의 원형이 최고선(最高善)이며 지선(至善)인 것이다.
가령 국가제도를 생각해 보면 이렇다.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Idea로서의 국가제도가 있고 다음으로 인간이 Idea를 모방한 인간 세계의 국가제도 있다. 가장 하위를 차지하는 것은 예술가가 인간 세계의 국가제도를 모방한 작품이다.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서 철인정치에 의한 국가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철학자들만이 Idea로서 국가제도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믿음은 <국가> 6편과 7편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철학자란 언제나 불변의 것을 파악할 줄 아는 자이며 그렇지 못하고 변천하는 잡다한 사물 속을 헤매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했었네. <“철인정치”에서>
철학자가 국가를 지배하기 전까지는 국가나 국민들에게 여러 가지 우환이 그치지 않고 우리가 말한 그런 이상적인 국가 제도도 실현될 수 없다고 말한 데 대하여 그들 일반 대중은 아직도 화를 내고 있을까? <“철인정치”에서>
지배자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권력을 탐내는 일이 적을수록 그 나라는 잘 통치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정치적인 야심을 경멸하는 것은 참된 철학자 이외에도 있을 수 있겠는가? <“이상 국가”에서>
우리의 통치자는 군인인 동시에 철학자여야 했지? <“이상 국가”에서>
플라톤의 믿음이 실현되어 이상 국가로서 존재한 국가는 없었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의 열정(熱情)이다. 어떤 논리를 사용하든 세상을 설명하고 인간을 설명하여 Vision을 제시하고자 하는 열정은 철학자면 당연한 열정인지는 모르나 플라톤의 원론(原論)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여타의 철학자들 가령,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와② 같은 철학자들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실재의 학문이란 인식을 위한 것이라네. <“이상 국가”에서>
인식되지 않는 사물(事物)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명되지 못하고 증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Idea도 하나의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증명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설득력 있게 설명된다. 아무리 무신론자(無神論者)라도 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者가 많듯이 신은 증명되지 않으나 충분히 설명된다.
물론 그것이 비유법이 동원된 설명일지라도.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설정하고 살아가는 것과 부정하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며 둘 중에 어느 쪽의 삶이 더 인간적일 수가 있느냐에 있다.
이처럼 플라톤의 Idea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Idea論을 통하여 보다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게 하였다는 것에 있다. 이분법이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방법론이어서 플라톤 시대에도 고스란히 나타나는데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양분이 그것이다. 재론(再論)의 여지도 없이 플라톤은 정신적인 삶을 육체적 삶 위에 올려놓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정신적인 삶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에게는 Idea가 필요했고 그것이 상당히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그의 Idea論이 오늘날에도, 비록 유치스럽기는 하지만, 전혀 도외시하거나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세상과 세상의 인간을 설명하려는 그의 열정(熱情)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산재(散在)된 결론을 묶을 시간이 되었다.
플라톤은 왜 Idea論을 정초(定礎)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우선 그에게 세상과 인간을 설명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고 예의 열정은 육체적인 삶보다도 정신적인 삶 쪽으로 사람들을 인도(引導)하고자 하는 목표 아래 있었으며 21세기를 바라보는 세기말인 이즈음 엄청난 과학의 발전으로 육체의 편리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思考方式)에 조용한 자성(自省)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① 독일의 철학자. 뤼첸 부근 레켄에서 출생.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할머니의 가정에서 어머니에 의해 자랐다. 1856∼1864년에 포르타 중‧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1864∼1865년 본 대학에서 처음에는 신학·철학을 배우고 후에 리츨의 지도로 문헌학을 연구했다. 1865년 스승을 따라 라이프치히에 전학한 후 스리스 문헌학을 주로 연구하고 몇몇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읽고 바그너의 음악에도 심취했다. 1869년 리츨의 소개로 바젤대학 교수가 되었다. 고전문헌학을 강의하다가 1870년 보불전쟁 때 종군하고 병으로 바젤에 귀환하였다. 이후는 계속하여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했다. 1872년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후 <반시대적 고찰, Unzeltgemässe Betrach tungen, 1873∼1876>에서 유럽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理想)으로 보았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78∼1880>에서 한층 분명해졌는데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여 새로운 이상의 가치 전환을 제시했다. 이상의 저서들에 의해 쇼펜하우어 및 바그너와 헤어지고 1881년 두통과 위병 등의 중병으로 인해 대학 교수를 사면한 후 주로 북이탈리아‧남프랑스에 머무르면서 저술에 전념, 사색의 심화와 함께 가장 독창적인 저서를 집필했다. <여명(黎明) Maorgenröte, 1881>, <환희의 지식, 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3∼189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and Böse, 1886>,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 1887> 등에서 기독교와 이상주의의 도덕을 ‘약자의 도덕’‧‘노예도덕’‧‘데카당스(De'cadance)’라고 배격하고 ‘초인(超人‧Über Mensch)’‧‘영원회귀(永遠回歸‧Die ewige wiederkunft)’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일종의 형이상학을 수립, 뒤에 생의 철학이나 실존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8년 징후를 보이던 마비광증(痲痺狂症)이 심해져 1889년 발광, 1890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퇴폐문화를 통렬하게 비판한 점에서 진보적인 의의는 있으나 방법이 관념적이고 비과학적이어서 파시즘에 이용되고 또다시 이용될 위험이 있다.
② 독일의 사회주의자.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아버지 하이리히는 유대인 변호사로 프로테스탄트에 개종하였고 가정은 비교적 유복했다. 프로이센의 라인주 트리르에서 출생. 고향의 김나지움(Gymnasium)을 마친 후, 본‧베를린의 각 대학에서 법학‧역사‧철학을 배우고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와의 자연철학의 차이,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 1841>로 예나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때까지 헤겔주의적이었으나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 좌파의 사람들과 사귀고 차츰 무신론적 혁명적인 경향을 굳게 했다. 대학 교수를 희망하여 본에 갔으나 정부의 문교 정책과 의견을 달리하여 단념한 후 라인주의 급진적 부르주아의 반(反) 정부적 기관지 <라인 신문, Die Rheinsche Zetung, 1842∼1843>의 발행에 협력하여 주필이 되고 쾰른으로 갔다. 이 신문은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으나 그는 이 활동을 통하여 경제학 연구의 필요를 인정했다. 1843년 프로이센의 귀족의 딸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 phalen)과 결혼하고 파리에 이주, 루게와 함께 <독일 프랑스 연지(年誌), 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를 발행하여 이 지상에 <유대인 문제, Zur Juden Frage>, <헤겔 법철학 비판,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1843>을 발표하여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혁명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잡지는 여러 가지 곤란으로 1호만으로 폐간되어나 이어 <전진, Vorwärts>을 발행했다. 쾰른 시대에 알던 엥겔스와 친교를 맺고 이후 소(小) 부르주아적 사회주의의 비난을 통하여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을 위한, 생애에 걸치는 두 사람의 협력이 시작됐다. 헤겔 좌파의 지도자 바워 등을 비판한 <성가족(聖家族), Die Heilige Familie oder Kritik der Kritischen Kritik, 1845>은 이때의 두 사람의 공저이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고 이 그룹의 사이에서 차츰 중시되었으나 1845년 프로이센 정부의 요구로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부뤼셀에 이주 후 다시 엥겔스와 협력, 사적(史的) 유물론의 원칙을 분명히 한 미완의 원고,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 1845∼1846>를 쓰고 이어 <철학의 빈곤, Misére de la philosophie, Réponse á la philosophie de la Misére de M Proudhon, 1847>을 썼다. 1847년 1월 독일로부터 망명, 혁명가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 <의인 동맹(義人同盟), Der Bund der Gerechten - 동년 6월부터 공산주의자 동맹 Der Bund der Kommunisten 으로 개칭 - 에 가입, 런던에서 개최된 제2회 대회에 출석하고 엥겔스와 공동으로 <공산당 선언, Das Kommunistisch Maanifest, 1848>을 집필, 공산주의의 이론과 전술을 압축한 형식을 체계적으로 보였다. 2월 혁명 후 파리에, 3월 혁명 후 쾰른으로 옮기고 <신(新) 라인 신문, Die Neue Rheinische Zeitung, 1849>의 주필이 되었다. 이 신문에 발표한 <임노동(賃勞動)과 자본, Lohnarbeit und Kapital, 1849>은 뒤에 런던에서의 강연을 모은 <가치‧가격 및 이윤, Value, Price and profit, 1897>과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의 고전적 해설이다. 1849년 혁명 패배 후 고소되고 무죄가 되었으나 독일에서는 추방되었다. 파리를 거쳐 런던에 이주, 사망하기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1850년대‧1860년대에는 <국제 노동자 협회, The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의 창설 등을 지도한 외에 <경제학 비판,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859>를 저술하고, 주요 저서 <자본론>은 미완인 채 엥겔스에게 위탁되었다. 마르크스의 학설은 독일의 고전 철학·영국의 고전 경제 철학·프랑스의 혁명 학설을 3 원천(源泉)으로 하고 철학으로서는 변증법적 유물론 및 이것을 역사와 사회에 적용한 사적(史的) 유물론을 확립, 이 방법을 사용하여 자본주의 사회적 운동법칙을 분명히 하는 경제학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의 이론 및 전술을 수립했다. 뒤에 레닌‧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발전시켰다. 그는 문학을 애호하여 셰익스피어 등을 애독한 외에도 청년시대는 3권의 시집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