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치 현
나고야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을 따라 아름다운 마을이 펼쳐진 이누야마가 있다. 번잡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영화의 장면 전환처럼 갑자기 작은 시골마을이 나타난다. 나고야 같은 큰 도시의 한 켠만 가도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일본에서 소도시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이유일 테다.
이누야마 시는 아이치현 북서부 노우비 평야 동쪽에 있다. 평야를 지나면 산에 닿는다. 산기슭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국보 이누야마 성을 중심으로 17세기 성곽도시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성 아래 마을의 오쿠무라 저택에서 당시의 상인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우라쿠엔 같은 정원에서는 차(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누야마 시에 흐르는 기소가와는 일본의 명수 100선에 꼽힐 만큼 맑고 깊다. 거친 물살에 물보라를 일으키는 기소가와는 휘모리장단에 리듬을 맞추듯 세차게 흐른다. 여름이 오면 기소가와에서는 34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누야마 우카이’가 열린다. 어부가 잘 길들인 가마우지를 강에 띄우고 작은 뱃머리에 횃불을 밝히면 은어가 몰려온다. 몰려온 은어를 가마우지가 잡으면 어부는 그것을 낚아채서 낚시를 하는 것이다.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첫 번째 주말에는 1635년부터 시작된 하리쓰나 신사의 제례가 열린다. ‘야마’라고 하는 마쓰리(축제)인데, 밤하늘 아래 3층으로 된 거대한 수레 13대가 365개의 초롱을 켜고 벚꽃 길을 누비는 화려한 장면이 연출된다. 이 마쓰리는 국가 중요무형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4월에는 축제가 열리는 이누야마 벚꽃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오랜 세월을 지켜온 이누야마 성
굽이굽이 언덕을 오르면 산 끝자락에 그림 같은 성이 나타난다. 아이치 현 이누야마 시에 있는 작은 성, 이누야마 성(犬山城)이다. 절벽에 걸친 듯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하지만 일본어로 이누는 ‘개(犬)’를 뜻하고 야마는 ‘산(山)’을 뜻하니, 이누야마 성은 충직한 개의 모습으로 산 아래 마을을 굽어보는 듯하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마을 어디서나 성이 보인다.
이누야마 성의 또 다른 이름은 하쿠테이 성(白帝城)인데, 이는 삼국지연의 유비가 죽음을 맞이한 백제성(白帝城)에서 유래한 것이다. 백제성이 양쯔강을 마주한 것처럼 이누야마 성도 기소강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 언덕에 홀로 서 있는 성의 모습도 닮았다.
1440년 세워진 이누야마 성은 2008년까지 유일하게 개인이 소유했던 성이다.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12개 성 중 하나로 천수각이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12개의 성들 중 가장 작지만 가장 오래된 성이다. 어쩌면 산속 가파른 절벽에 자리 잡고 있어 가장 오래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누야마 성은 특별한 사연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특별해 보인다. 이야기 대신 오랜 역사의 향기를 품고 있다. 성 자체가 온몸으로 세월을 말해준다. 기어 올라가야 할 듯한 사다리 같이 가파른 계단을 타고 천수각 꼭대기에 올랐다. 천수각 마룻바닥은 세월만큼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삐걱삐걱 정겨운 소리를 낸다. 강이 내다보이는 난간은 낡아서 쉽사리 발을 내딛지도 못하겠다. 아찔함을 무릅쓰고 한 발 내딛어 풍경을 바라보니 해자처럼 오랜 세월 성을 지켜주었을 기소가와가 아름답게 흐른다. 기소가와를 건너면 마을이 펼쳐지고 그 뒤를 병풍 같은 산맥들이 감싼다.
성의 규모만큼 작은 천수각을 내려와 성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듯한 돌로 쌓은 석벽이 아니라 제멋대로 생긴 돌을 촘촘히 끼워 맞춘 성벽에서 옛정취가 묻어난다. 일본 여행 중에 많은 성을 보았지만 이누야마 성은 다른 어느 성보다도 고적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기운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성에 불빛이 비춘다. 이누야마 성은 하늘 아래에서 별처럼 빛난다.
핑크빛 사랑이 물든 산코이나리 신사
이누야마 성에 오르는 길에는 신사가 세 개가 있다. 성 가까이에 신사가 이렇게 많기도 드문 일이다. 그 중에서 빨간 도리이가 눈에 띄는 산코이나리 신사에 들렀다. 이나리, 여우가 문 앞을 지키는 신사는 이누야마 성주 오다 노부야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에도시대 이후 이누야마 성주 나루세의 수호신을 모신다. 토착 신앙과 불교신앙이 결속하여 하나의 신앙이 되는 신불습합(神仏習合)으로 삼광사(三光寺)라고 불렀으나, 1868년 메이지유신의 신불분리 정책으로 산코이나리 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사의 빨간 도리이는 교토의 후시미이나리 신사의 축소판 같다. 빨간 도리이가 터널처럼 이어지지만 규모는 앙증맞다. 작고 아담한 신사 안에는 소원을 비는 장소가 곳곳에 있다. 특히 애정운과 연애운에 효험이 있다는 신사는 이누야마 성을 오르는 길 쪽에서 바라보면 빨간 도리이가 연결된 터널 사이로 하트 모양 에마가 보인다. 이런 의도적인 장면은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신사의 포토존이기도 하다. 인류의 화두는 사랑인 것을 증명하듯 하트 오미쿠지, 하트 에마에 사랑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간절히 적혀있다.
신사 안에는 또 다른 재미있는 풍경이 있다. 신사의 물로 돈을 씻으면 재물이 불어난다는 재니아라이가 그것인데, 대나무가 촘촘하게 연결된 판 아래로 물이 흐른다. 그 앞에서 바구니에 동전을 넣고 물을 떠서 돈 위에 부으면 재물이 불어난다고 한다.
애정운보다는 금전운을 바랐기에 대나무 판 위에 동전 대신 천 엔짜리 지폐를 펴 놓고 물을 부었다. 지폐는 금세 물에 젖어 흐물흐물해졌지만 찢어지지 않게 곱게 접어 지갑 속에 넣었다. 로또 당첨 같은 허망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마음대로 여행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로움만 생기기를 빌었다.
옛 정취가 가득한 이누야마 조카마치
신사를 나와 길을 따라가면 성하마을로 이어진다. 이누야마 성 아래로 곧게 뻗은 길가에는 상점들이 모여 있다. 성하마을, 이누야마 조카마치는 원래 주택가였으나 마을의 발전을 위해 상인과 장인들을 살게 했다. 옛스러움이 묻어나는 건물은 대부분 1800~1900년대의 건축물이다.
돗토리의 구라요시 거리처럼 아련한 느낌은 아니지만 교토의 기온 거리처럼 깨끗하게 정비된 모습이다. 옛 풍경 속에서 현대적인 사진관이 눈에 띄고, 길을 걷다 넓은 창 너머로 지역 라디오방송을 하는 DJ들이 모습이 이색적이다. 창 안을 들여다보니 DJ로 보이는 듯한 청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엄지척을 해 보인다.
기분 좋게 거리를 걷다 일본의 쇼와시대(1926~1989)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이누야마 조카마치 쇼와 요코초로 들어섰다. 골목이라는 뜻의 요코초에는 다양한 주전부리를 할 수 있는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좁은 통로에는 쇼와시대, 1960년대를 테마로 한 상점가와 골동품으로 옛스러운 장식을 하고 있다. 거리의 끝에는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작은 콘서트가 종종 열리기도 한다.
차(茶)의 향기 가득한 우라쿠엔
이누야먀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메이테츠 이누야마 호텔 안에는 아담한 정원, 우라쿠엔이 있다. 호텔에 이웃해 있는 정원이지만 이곳에 묵었다고 해서 1000엔이나 되는 입장료가 할인되지는 않는다. 정원을 바로 앞에서 만날 수 있다는 이점만 있을 뿐. 입장료가 비싼 이유는 우라쿠엔(有樂苑)에 일본 중요문화재이자 국보로 지정된 다실(茶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정원이지만 그 안에는 귀중한 유물이 있다. 1618년 지어진 정원 내의 조안(如庵)에서 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의 차(茶) 문화를 볼 수 있다. 다실을 국보로 삼을 정도로 차를 가치 있게 대하는 일본인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다. 일본의 차는 불교와 함께 중국에서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차를 약으로 사용했다. 차는 신경을 안정시키고, 눈을 맑게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오랜 시간 수행하는 수도승들이 지쳐서 실신하지 않기 위해 차를 마셨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일본‧중국 기행>에 일본의 다도(茶道)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사람들은 차를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마시는 신성한 음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들끼리 모여 꽃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서 조금씩 차를 마시면 심신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외딴 정원 뒤에 있는 작은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신과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이렇게 다도에 신성한 정취를 만들었다.
그 뒤로 위대한 스승들이 나타나 다도의 규칙을 세웠다. 일본 다도를 완성한 리큐는 “다도의 비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겨울에는 방을 따뜻하게 준비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마련합니다. 차의 맛을 잘 내기 위해 물을 적당히 끓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그의 대답을 비웃자 “이 원칙을 알 뿐 아니라 적용할 줄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의 발밑에 앉아 스승으로 삼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대답처럼 뻔히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라쿠엔의 다실, 조안은 카잔차키스가 이야기한 다도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조안의 주인은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우라쿠다. 우라쿠는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무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리큐의 수제자가 되었다. 교토의 고찰 겐닌지(建仁寺)의 쇼덴원에서 칩거하면서 조안을 지었다. 메이지 시대에 조안을 이곳 이누야마로 이전했다. 조안이라는 이름은 그의 천주교 세례명 조안나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조안은 사랑채 같은 조그만 단층 건물이다. 다다미를 깔아 놓은 방은 두 세 사람이 앉으면 족할 크기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작은 게 특이하다. 문을 작게 만든 이유는 몸에 품고 들어갈 수 없도록 칼을 풀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무라이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창문은 얇은 대나무 창살을 엮어 만들었는데, 햇살이 비추면 다실 바닥과 벽에 창살 무늬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다실을 미적으로도 완성시킨 오다 우라쿠의 감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다실 정면에 부산해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돌 수반은 한국산이라고 하니 정겨운 느낌이 든다.
다실의 차분한 느낌 때문에 정원마저도 고즈넉하다. 다도의 느린 침묵이 정원을 감싼다. 아담한 정원이지만 하늘을 가릴 만큼 쭉 뻗은 대나무가 이어진 길은 상쾌하다. 이끼와 돌이 어우러진 정원에는 풀냄새와 나무냄새가 가득하다.
우라쿠엔에서 일본 전통 다도를 체험해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정원 입구 매표소 앞에 장식된 기품 있는 다기(茶器)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우라쿠엔을 나오면 기소가와를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온다. 기소가와를 가로지르는 이누야마 다리부터 이누야마 성까지 가는 800m정도 이어진 강변 산책로인데, 이 길을 기소가와 유호도라고 한다. 차 한 잔을 마시고 기소 강과 어우러진 언덕 위의 이누야마 성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는 길은 운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