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두잇두잇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 대사는 보통 훨훨 날아가고 싶어하는 누군가의 날개를 부러뜨리는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주제 넘지마’ ‘꿈도 꾸지마’ ‘네까짓게 감히?’ 등이 대표적인 첨언들이다. ‘현실’을 ‘직시하다’. 분명 중립적인 명사와 동사로 구성된 문장인데 잘근잘근 씹어보면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문장이다. 그러다보니 조언보다는 꼰대짓의 상황에 많이 등장하는데, 혹시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정중하게 나도 모르는 내 주제를 님이 뭔데 알고 계시는지 도리어 질문하며 과연 내 주제는 뭘까, 나라는 사람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려보면 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은 상당히 미래지향적이다. 이 말은 걱정을 우선 사서 해보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까지 죄다 끌어와서 머리 싸매고 생각하게 되는거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가능성보단 두려움이 자란다. 두려운 마음은 많이 소심해진 마음이다. 소심한 나는 잘못될 일 없는 안정적인 선택을 한다. 예를 들면 앞서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보고 이게 더 안정적이니까 너도 이 길을 따라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길. 현실이 아무리 개떡같아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얘기한 길을 따라간 미래가 여기서 더 개떡같아질리 없다는 자기 위로와 함께.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그랬다. 마음의 목소리를 누르고 ‘해야 할 일들’을 해야 나중에 커서 좋은 대학도 가고, 좋은 직장도 얻고,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인생은 승승장구 꽃길만 펼쳐질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당장 좀 힘들어도 참고 견디고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학원에 가고 방학에도 나와서 공부를 하라고. 야간자율학습에서 자율은 ‘일단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공부할 자유’를 뜻했다. 자율적으로 하교를 하고 노래방에 갔다가 다시 끌려 들어와서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매를 맞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공부를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는 대강만 알았다.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적도, 그렇게 질문해보라는 조언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사실 따르거나 누르거나 할 마음의 목소리도 없는 상태였달까. 생각해보면 참 말랑한 상태였다. 그런 말랑한 마음으로 마음껏 꿈꾸고 상상하고 그려봤으면 내 지난 10년은 좀 달랐을까.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채 살다가 이건 뭔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서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맘먹지 않을 수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그 사람들 있잖아, 마크 주커버그라던지 빌 게이츠라던지 스티브 잡스 이런 사람들.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특별하고 똑똑해서 학교 교육 따위 필요없다며 다 때려치우고 나와서 엄청나게 특별하고 똑똑한 것들을 만들어낸걸까.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현실감각이 뛰어나서 ‘일단 4년제 학사 학위까진 받아야 나중에 실패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마음을 다독이며 ‘현실’을 ‘직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한 시대가 아니다. 미래가 확실했던 적이 있던가. 삶의 루틴이 비교적 단순했던 뗀석기시대에도 2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한 사람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무한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장 필요한 능력은 ‘현실감제로력’이 아닐까. 굳이 멀리까지 가지 않고 주변만 살짝 돌아봐도, (요즘 세상에 주변 돌아보라는 말 = 유튜브에서 검색해보라는 말) 일단 시작했기에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는 세상인데. 회사를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든, 일단 퇴사를 하고 창업을 하든, 원하는 직무로 다시 주니어부터 시작해보든. 일단 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현재는 점점 더 달라질지 모른다.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왔던 지난 시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한 번쯤은, 오지 않을 미래보다는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답하고, 행동하는 현재를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나에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