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
며칠 전 클럽하우스에서 채식주의자의 연애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이야기하는 방이 있어 들어갔다. 비정상회담 출신 줄리안이 모더레이팅 하는 방이었고 10년 차 비건, 비건 식당 주인, 비건 크리에이터 등 한국에서 비건 또는 비건을 지향하며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연애에 대해. 타인의 연애 이야기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주제인 것이 듣다 보면 결국 내 얘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막 발을 담그기 시작한 비건 지향자로, 마치 라디오를 듣는 것 마냥 방에 참여하고 있었다. 계속 듣다 보니 이야기 주제가 거의 필연적으로 나와 가치관이 다른 상대와의 만남 자체보다는 계속해서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으로 좁혀지는 듯했다. 사실 연애라는 게 누군가와의 만남도, 그 만남을 유지하는 것도 비단 비건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어려운 주제다. 이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지는데, 폭발적인 연애 감정으로 시작해 적어도 3달 정도는 눈에 뵈는 게 없는 20대 초반에 비해 30대도 중반에 접어들수록 이성과 현실이 개입하는 마음의 여유가 점점 생기기 때문이다. 내 기준 20대에는 만남이 쉽고 헤어짐이 어려웠다면 30대인 지금은 만남부터 어렵다. 원래 연애라는 게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고, 그 두 사람이 가진 수많은 가치관은 상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건들의 연애가 특히 어려운 문제인 이유는 이게 먹고사는 문제라서가 아닐까. 실제로 이야기에 참여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비건이라서 애초부터 논 비건과의 만남이 어려웠거나 비건이라서 헤어져본 경험이 있었다.
누군가 20대 중반의 나에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명확하게 그려야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마치 꿈을 선명하게 그려야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조언처럼. 그 말을 들은 나는 노트 빼곡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의 조건을 써 내려갔는데, 살면서 그런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나에게 그런 조언을 한 그 사람도 여전히 결혼하지 않았다.) 이제는 누군가와의 만남에 대한 조언은 듣지도 않고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냥 스스로 다짐할 뿐. 어제 클럽하우스 채식 연애 토크방에서 나온 이야기의 주제는 어딘가 내가 며칠 전 ‘이런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하며 적어둔 내용과도 맞닿아있다. 한동안 연애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가 문득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날이었다. 나는 딱 한 마디를 적어 넣었는데, 그건 ‘잘 듣는 사람’이었다.
잘 듣는다는 건 상대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해보겠다는 노력이다. 어어 네 말이면 다 맞아, 식의 hearing 말고,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눈에서 눈으로 전해지는 감정, 상대가 하는 이야기에 담긴 마음까지 듣는 것. 세상엔 사람 수만큼의 우주가 있다. 사람이 나고 자라면서 겪는 모든 일들 만나는 모든 사람들만큼 가치관도 생각도 다르다. 내 안에서조차 충돌하던 것들이 자리를 잡아간다. 말랑하던 생각이 점점 더 단단해지거나 단단했던 생각이 말랑해진다. 막연하던 건 선명해지고 선명했던 게 막연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은 각자의 세계를 갖는다. 두 사람이라는 두 세계가 만나는 건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어렵다. 공감해야 공존할 수 있으니까. 비건-논 비건 커플 중 상당수는 식사를 따로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서로와의 일상을 유지하는 방식 중 하나인 듯했다.
비건은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무수한 특성 중 하나일 뿐. 비건과 논 비건이 사랑을 전제로 공존할 수 있는 이유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공존하는 것. 그래서 나는 잘 듣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지금까지 보다 어렵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에라 못 만나겠지 하고 싶지는 않은. 살다 보면 언젠가 만나겠지. 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고양이를 키울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