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가시를 품는다.
올해엔 어버이날 전후로 유독 부고 소식이 많이 들렸다.
어느 어버이날,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드리고 방에 들어온 뒤 거실에서 자그맣게 들려오던 엄마 아빠의 대화 소리를 기억한다.
"여보, 오늘 나도 부모님을 챙겨드리고 싶은데 이젠 안부 전화 한 통도 드릴 수가 없네."
공기처럼 당연히 곁에 존재하던 가족이 어느 날 문득 영영 사라져 버린다는 건 도대체 어떤 걸까. 엄마 아빠도 한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물 같은 딸과 아들이었을 텐데. 한순간 그렇게 자신의 부모를 상실한 채로, 물리적으로 그들에게 결코 닿을 수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부모로서 묵묵히 자녀를 길러내는 일이란 때로 참 많이 버겁고 외롭지 않았을까.
부모가 할퀴고 간 상처의 피멍울이 긴 시간 남아 있었다. 받은 사랑보다 아픔이 크다 느꼈다. 그러다 그 시기가 충분히 지난 후엔, '사랑해 마지않는 딸을 힘들게 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엄마와 아빠가 자연스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상처란 그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결핍이 무의식 중에 아이에게 대물림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들은 늘 자기 나름의 최선으로 자녀를 사랑해 왔다. 다만 인간인 이상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없었을 뿐. 어떤 형태로든 사랑 안엔 가시가 박혀 있다. 하여, 아마 나 또한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내게 박혀 있던 가시로 나도 모르는 새 그를 찌르는 날도 오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아이와 나의 아린 부분을 구슬피 울며 살펴줄 수 있게 된다면 어쩌면 그것 또한 사랑이 아닐는지. 장미는 가시를 품는다. 인간의 사랑 또한, 살다가 나버린 생채기를 별 수 없이 껴안아 가며 사는 게 어쩌면 가장 온전한 형태의 사랑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