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엔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어릴 적 트라우마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흩날리는 눈발을 가만히 바라보며 또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눈’을 매개로 해리되어 있던 감정이 의식 위로 명료히 올라오기 시작했던 게.
가족 외에 그날의 사건을 유일하게 자세히 알고 있던 남자친구가 작년에 나를 참 많이 도와줬었더랬다.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일로부터 어느덧 20년이나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불시에 터진 두려움에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힘겨워하던 나를 이상하다 여기지 않으며 응원해 주었고, 떨며 우는 나를 감싸 안아 주었다. 함께 눈밭을 거닐며 눈사람을 만들자고 해 주었다.
그럼에도, 트라우마란 순간의 온기들로 사라지진 않는다. 뜻하지 않게 자꾸만 사고처럼 눈앞에 들이닥쳐 운명처럼 숨통을 조이고 마는 제 할 몫을 끝끝내 다 해내곤 했다.
고요히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다 네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존재의 힘이 필요했다. 위로의 말을 건네주지 않아도 네 곁만은 안정감이 들었다. 하지만 너를 찾기엔, 네겐 그날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저 혼자 멍하니 방에 앉아 따스한 네 품으로 파고드는 장면을 상상했다.
거짓말처럼 그날밤 보자는 연락이 왔다. 원랜 볼 수 없던 날이었는데. 다행히 일이 조금 일찍 끝났다고 했다. 그날은 너도 힘든 날이었기에 나의 아픔을 굳이 알알히 늘어내어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네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해주다 이내 헤어지려던 중 다만 한 마디를 건넸다.
낮에 눈이 오더라. 그래서 네가 보고 싶었는데. 연락이 왔어.
너와 나만 알 수 있는 언어였다. 시간이 지나 네 마음에 조금 더 공간이 생겼을 즈음 다시금 말을 전했던 것 같다. 작년 이후로 눈이 올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은데, 너를 떠올리면 그래도 힘이 된다고. 너는 나에게 앞으로 세상이 하얘지는 날엔 같이 눈사람을 만들러 가자고 했다.
그날밤 꿈을 꿨다. 나와 함께 손을 잡고 눈길을 걸어주던 너. 까르르 웃으며 서로 장난도 치다 문득, 근처 벤치에 앉아 네 어깨에 가만히 기대었다.
눈을 뜨니 너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나는 네 품이었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장재열이 지해수에게 청혼을 하며 건네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침대가 아닌 화장실에서 자고, 엄마가 1년 365일 겨울에도 문이 열린 찬 거실에서 자고, 형이 감방에서 14년 지냈던 얘기.
너 말고 또다시 구구절절, 다른 여자한테 말할 자신이 없어.
내 그런 얘기 듣고 보고도 싫어하거나 불쌍하게가 아니라. 지금 너처럼 담담히 들을 수 있는 여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해.
해수야. 만약 그런 여자가 또 있다면,
제발 알려줘. 내가 너한테 많이 매달리지 않게.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의 서사를 아는 존재. 어쩌면 일반적이지 않을 아픔을 안고 살아온 나를 이상히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주었다. 네 곁에선 아무 말 없이도 편안했다. 나의 안전지대가 되어준 이 세상의 첫 사람. 오늘도 너와 함께 하이얀 눈밭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