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몇 조각조차 아직 소화되지 않는 배. 언제부터 식습관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해온 걸까. 벌써 약 15년이 흘렀다. 처음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회피하려던 감정의 크기가 점점 누적되며 쌓여간 탓일까.
어김없이 체기가 올라와 집 오는 길 토한 날이었다. 기운이 다 빠진 몸으로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오며 "지하철 타고 오다가 속이 울렁거려서 중간에 뛰어내려 게워냈어."라고 했다. 걱정을 한 아름 담고 있던 엄마의 눈빛을 기억한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부모의 관심을 받고 싶던 숨겨진 어린 마음이 몸의 증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게.
사실, 그때의 내게 필요했던 건 "요즘 자주 아픈 것 같네. 혹시 무슨 일 있어?"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 물음에 내가 겪은 일을 어떤 말로든 뱉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문장을 건네는 이도 답하는 나도, 없었다.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잃어갔다.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상처는 차마 더 다치기 전에 보호되어야만 했다. 안전을 이유로 주위에 세워진 방어벽은 슬프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한 성벽이 되어 갔다. 그렇게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고립되어 곪아갔다.
본능적으로 식사량과 소화가 부모의 걱정과 직결된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점점 더 자주 체하고 구토하다 어느 날 지치기 시작한 몸은 소화제부터 두통약, 감기약 등을 일상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격리되어 갇힌 아이를 미처 구해낼 힘을 키울 수 없던 나에겐 몸으로 발현되는 통증과 그를 즉시 가라앉혀주는 약들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자 예정된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아플수록 회피하는 기간이 길어져만 갔지만. 이 방법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그 시절의 내겐 없었다.
스무 살 중반즈음부터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극심했던 생리통과 비정상적으로 자주 찾아오던 몸살감기와 일상이 되어버린 두통, 그 외에 소화 불량을 동반하는 위염과 식도염까지. 이 모든 증상이 억압된 감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려가게 됐다. 그렇게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방을 하나씩 열어가다 보니 일상을 괴롭게 만들던 두통과 감기가 사라져갔다. 전엔 월경 때면 극심한 생리통에 매월 산부인과에 가서 주사를 맞지 않고선 간밤에 옅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매달 병원을 찾지 않아도 약만 제때 잘 복용하면 견딜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위와 식도 쪽으로는 증상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여전히 불편을 겪고 있다.
증세가 심해질 때면 허기에 주워 먹은 과자 몇 조각조차 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걸 느낀다. 가끔은 김밥 하나도 얹힌다. 한 줄이 아니라, 하나. 전처럼 속이 아파 일반식을 아예 못하는 수준은 아니니 호전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필수 생존 욕구 의식주 중 하나인 '식'에 남과 달리 문제가 있으니 박탈감이 든다. 소화가 조금이나마 잘 되는 날이라 해도 그저 몇 입의 음식만 더 넣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이번처럼 또 속이 꽉 막히게 되는 날엔 '오늘도 또?'라는 우울감에 잠식되어 가다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기도 한다.
버림받은 상처는 흐려지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된다. 동시에 이 방식은 숨겨진 내면을 아직 마주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 일차적으로 신체적 회복에 온 신경을 쏟아야만 하니까. 하여 나을 듯 낫지 않는 상태를 오랜 시간 끌어안고 살게 되기도 한다. 온전히 회복되면, 회피해 왔던 숱한 마음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무엇을 이다지도 극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걸까. 요즘 자꾸 나를 쫓는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도망치다 이내 숨어드는 꿈을 꾼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은 그 앞에 서기 두려운 나를 도와 숨을 곳을 마련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려나. 사실, 이제는 그만 뒷걸음질 치고 걸어 나와 무서움에 꽉 감았던 눈을 엷게 뜨고선 한 번쯤 그의 얼굴을 보고 손을 내밀어 악수해 보고 싶기도 한데.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몸의 증상은 용기 내려는 마음보다 한 발 앞서 자꾸만 나를 제자리로 끌어당긴다. 여전히 그 자리를 맴돌다, 가만히 숨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