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배의 파편을 붙잡고

by 리솜

오늘도 침대를 정리한다.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청소기도 돌리고, 돌돌이도 슥슥 민다. 이미 하루의 루틴이 된 지 오래.


나만 반복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엄마가 내 침대를 청소하는 걸 봤다. 나처럼 돌돌이를 밀던 엄마. 알고 보니 우리 엄마도 나 모르게 때로 이불 위 먼지를 정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어두컴컴한 방 안 침대에 누워 쌓여가던 생각들을 매일 털어내고 정리하려 애써왔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일까. 꿈속에서 눈을 뜨자 문득, ‘어쩌면 혼자서만 트라우마를 견뎌왔던 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 일이 벌어진 직후 경찰이 집에 와서 나에게 사건 경위를 물었었다. 이후 순찰을 도셨지만 CCTV 설치가 되어있지 않아 인상착의만으론 범인을 잡긴 어렵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나에겐 눈에 드러나는 신체적 피해는 크게 없었기에 아무래도 유야무야 수사를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수색에 실패한 뒤 아빠가 그들에게 화내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으니까.


경찰이 다녀간 뒤, 여기서부턴 내 기억엔 없는 얘기지만. 엄마가 나에게 사건에 대해 다시 물어봤었다고 한다. 엄마 말로는, 그때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물어보면 생각나니까 얘기 꺼내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로 그 일은 우리 집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스무 살 중반 무렵 상담으로 인해 그날의 사건이 머릿속에 떠올라 재구성되기 시작하면서, 아무리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쳐도 어떻게 평생토록 그 일을 함구해 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이 년도 아니고 이십 년 동안씩이나. 나였다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말 괜찮은지 넌지시 한 번이라도 물어보거나, 손을 붙잡고 상담소나 병원을 찾았을 것 같았다. 물론 티 나지 않게 일상 학업 상담이라던지 등의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데려가긴 했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어떤 방식이든 취했을 것 같았다. 혹은 하다못해 아파트 관리소에 CCTV 설치라도 건의해 본다던가.


나에게도 외면받고 가족에게도 버려졌던 중학생 아이는 그렇게 십수 년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 봉인되어 있다 서른 살 초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희미한 목소리를 내며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부모님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라곤 했지만 사실 엄마 아빠도 그 일을 회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들이야말로 정작 나보다 더 두려워서 차마 내게 다가오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 시절의 나야 어려서 몰라 그랬다고 쳐도 최소 수십 년은 더 산 부모가 딸이 겪은 일에 그저 침묵의 방식을 그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모로서의 용기도 책임감도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분노가 치밀었다. 나를 구하기 위해 그 어떤 시도라도 해줬었다면, 하다못해 시간이 지나 단 한 번만이라도 괜찮냐고 조심스럽게 다시 물어봐 줬었더라면. 이후의 내가 아주 조금은 덜 망가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어서. 오랜 시간 밖으로 탓을 돌리고 싶었었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비극을 야기시켰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하고 싶다. 그때의 내겐 '해리' 야말로 생존을 위한 최고의 방어 기제였다. 만일 그날 겪은 일이 나로부터 즉시 분리되지 않았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은 이제와 생각해 봐도 자명하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은 내가 사는 아파트 출입구 근처에서 벌어졌었으니까.

이후 시간이 흘러 현재의 연인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때 그는 "나였다면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왔을 것 같다"는 말을 해줬었다. 그랬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잃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엇이 그 시절의 나를 더 돕는 선택이었을지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겠다. 기어이 기억을 부여잡고 정신 병원에라도 입원해 즉시 치료받는 게 나았을지. 혹은 이대로 감정을 분리시키고 시간이 지난 뒤 부모님의 제안으로 상담소 혹은 병원에 함께 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 그런데, 그렇게 만약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오게 됐었다면 그 시절을 지나온 나는 지금의 나보다 온전했을까? 외려 잦은 자극에 역효과가 나 이보다 더 깊은 곳으로 훌쩍 피해 숨어 들어가지는 않았을는지.

스스로 택한 자아의 격리와 부모가 사수해 온 침묵의 방식이 실은 방치가 아닌 보호였고 외면이 아닌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최근에서야 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부모님이 여행을 다녀온 후 채 정리하지 못한 가방 하나가 며칠간 거실에 계속 있었더랬다. 가해자의 인상착의가 여전히 나는 생생한데, 공교롭게도 덩그러니 집에 놓인 가방이 그가 착용했던 브랜드와 동일한 데다 형태도 몹시 유사했다. 그맘때쯤 한창 유행했던 검은색 아디다스 더플백.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검게 드리웠지만 희한하게도 시야에 그 가방이 들어올 때마다 늘 엄마는 이미 밤에 깊이 잠들어 계셨었다. '다음에 얘기를 꺼내봐야지' 하고 며칠을 지났다. 그날들 동안 내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게 맞을지 고민했다. 이젠 그만 아픔을 드러내어 공유하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표면적으론 햇살을 받으며 그저 평화롭게만 일렁이던 파도를 굳이 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공존해서였다. 그럼에도 이젠 더 이상 혼자 일상의 트라우마를 감당하고 싶진 않다는 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어 결국 엄마에게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 주 주말. 저 가방을 보면 기분이 안 좋아진다고, 예전 그 사람이 저 가방과 유사한 걸 들고 있었다고. 그의 행색을 아직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아이고, 그랬구나. 조금 더 일찍 말해주지 그랬어. 몰랐네."라며 며칠을 가만히 뒀던 아디다스 가방을 내 시야에서 바로 치워주셨다. 말 한마디면 이렇게 해결될 거였다니. 어쩌면 엄마 아빠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이십여 년 넘게 나를 도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그게 그날의 사건을 기억 속에서 없애길 바라는 거였을지라도.

내 의사를 존중하기 위한 침묵과 공백의 시간이 되려 외면과 방치가 되고, 어느 날 점차 기억을 되찾기 시작한 내가 "어떻게 나를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그대로 둘 수 있었냐"라고 따져 물었을 때 그 말을 들은 엄마야말로 전에 없이 황망하며 당혹스럽지 않았었을까. 그럼에도 그날의 엄마는 내게 사과했었다. 몰랐다고.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었다고. 그때 알았다. 부모님에게 "물어보지 말라"라고 소리친 과거의 내가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기억이 내겐 소실되어 있었다는 걸.


누구의 명백한 잘못도 없는 사고가 해일처럼 우리 가족을 뒤덮쳤다.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부서진 배의 파편을 붙잡고 수면 아래 발버둥 치며 견뎌왔던 게 아닐까. 어쩌면 나는 오래도록 진실로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손의 힘을 풀면 이대로 가라앉고 말게 될 거라는 절박함에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