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인쇄비

책에 깔려 죽어도 내게는 호상이 아닐까

by 김이소

고3때, 공부는 손에 안 잡히고 딱히 다른 일탈을 행할 용기는 안 날때는, 매번 교내 도서관을 오갔다.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눈길이 가면 닥치는대로 책을 대여했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유일한 고등학교때 수상기록은 다독상이었다.


당시 담임은 반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야 성과금이 나오는건지, 유독 명문대 진학에 목숨을 걸었었고, 그런 이상적인 경로를 이탈한 내게는 “다른 좋은 상들 놔두고 다독상이나 타냐, 재랄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라고 면박을 주었다. 내가 금서를 읽는것도 아닌데, 학생이 책을 읽는다고 꾸짖음을 받다니…지금도 실소가 나오지만, 나는 그렇게 탄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계속해 나갔고 지금도 책을 꾸준히 읽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취미가 뭐냐고 물을때 자연스레 독서라고 대답할 정도로 책을 읽는 습관만큼은 이어나가고 있다. 늘 무슨 취미를 갖곤 금세 흥미를 잃는 내가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리추얼이다.




이런 습관이 자리잡는 데에는 집안 분위기가 한 몫 하였다. 다른 소비는 아껴도, 책 사는데는 아끼지 말자며(말은 이래도 가오를 위해 쓰는 접대비와 복리후생비가 어마어마하지만), 책은 원없이 사주게 하셨던 부모님덕에 당시 동네에 있는 세 개의 층이 전부 서점인 대형책방으로 하는 책 나들이가 나는 무척 좋았다.


판타지 세계에 등장하는 100가지 괴물들을 열거한 판타지 도감,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간질간질한 양산형 로맨스 소설, 어린이가 아닌 청소년을 위한 묘하게 어두웠던 중2병스러운 동화, 먼나라 이웃나라를 비롯하여 내가 문사철 중 하나의 전공을 향하게 한 내 인생을 망친 나의 구원자같은 역사책들, 그리고 가끔 학생된 도리를 보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끼워 넣었던 학습지까지. 기억해보면 그때 당시 돈으로도 10만원 가까이 하였지만 부모님은 기꺼이 사주셨고, 그럼 집으로 돌아가 누워서 델몬트 주스와 음미하며 책 속 세계에 빠져있을 때가 나의 소확행이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 내 글감의 토대가 되었고, 현재도 누워서 노트에 메모하고, 책과 함께 뒹구는 시간을 무척 소중히 여긴다.




내 책장뿐만 아니라 타인의 책장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온갖 어려운 클래식책과 여행서적이 특히 많은 걸로 기억하는 고모의 책장, 그 당시 트렌디한 소설과 에세이는 다 있었던 사촌언니의 책장, 그 외에도 북카페나 서점의 큐레이션을 보며 이런게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기회가 되면 책을 구매한다.


2025년 나의 책장 트렌드는 에세이, 제로웨이스트,

철학, 시골생활, 출판업, 기록, 글쓰기가 주류 키워드이다. 최근 독서모임이 이번 주제를 장르소설로 정해서 아마 장르소설도 몇 권 추가될 예정이다. 알라딘에서 구매한 베이지색과 하늘색이 메인 컬러인 to do list에 날짜와 읽은 책 제목을 적는다. 연말이 다가오지만 100권은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뿌듯하다.

집에 있는 책장이 아마 말을 한다면 “주인님, 지금 근로기준법을 넘은 과로중입니다. 이럴바엔 저를 죽여주세요” 라고 하소연을 할테지만 나는 책장 한정 악덕사업주답게 가뿐히 무시하고 책 컬렉션을 추가하고, 도시목록에 기입하고, 초록색 소파에 앉아 책장을 응시하며 이 풍족함을 누빌 것이다.


다독을 하는만큼 책 회전율이 꽤 있는 편이다. 내 인생의 흑역사인 여우같이 연애하는 법은 10년전에 이미 중고서점에 후다닥 내팽겨쳐지듯 팔렸고, 지금에 본가에 남아있는 책들은 조금씩 나만의 검열-책장에 두어도 부끄럽지 않은지, 여전히 글쓰기나 다른 독서에 도움이 될 지, 하다못해 디자인이라도 어여쁠지-을 거쳐 남겨질지, 기부가 될 지, 알라딘이나 당근마켓에 매물로 올라올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비워진 자리만큼 이번엔 어떤 책으로 채울까 행복하면서, 서울의 서촌이나 북촌, 전주, 제주 등 어느 곳의 어느 서점을 갈지 네이버 지도를 검색해본다. 연말정산시 신용카드 소득공제에 문화비 소득공제까지 포함되니 이득이라는 합리화를 하면서.



주로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는 때는 마음에 화나 답답함이 켜켜이 쌓여갈 시기였다. 회사생활, 인간관계, 재정문제, 건강, 하고 싶은 걸 당장 할 수 없을때 등 좌절과 절망, 때론 장마철 눅눅하게 젖은 채 마르지 않는 수건처럼 침잠하며 우울감이 밀려올 때 나는 울다가도 책을 찾았고, 책을 읽으며 울기도 했다.


요즘처럼 불안감이 도처에 깔린 시대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더 빠르고 편히 얻고 싶어서 신점이나 타로, 사주에 의존하곤 한다. 나도 많이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 5만원이면 꽤 많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신점이나 타로를 보곤 했지만 그 뒤의 허무함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하는 문제였다.

독서는 내가 가진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바로 주지 않는다. 운 좋게도 얻어걸리듯 방법을 찾을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읽은 경험만 남을때가 많다. 5도2촌에 대한 책을 읽어도 당장 내가 고양이를 싸들고 이사를 할 수도 없고, 아직 글감이 마련되지 않았는데 출판업 책을 읽었다고 책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소로나 아들러의 철학책을 읽는다고 내게 해탈에 가까운 깨달음이 보상처럼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재테크와 관련된 책을 읽는다고 나의 작고 소중한 통장잔고에 로또 당첨금같은 거액이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읽으면서 붙인 인덱스 밑의 글귀가, 노트에 개발새발 남겨놨던 메모가, 아이폰에 급하게 타닥타닥 눌러놓은 글들이 언젠가는 희한하게도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도 한다. 이는 꾸준히 뭐라도 읽고 쓰고한 내게 주는 아카식 레코드의 자그만한 축복이 아닐까 망상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내향인이 많은 편이다. 민음사 유튜브에도 나온 패밀리데이때 인터뷰를 하려고 하면 마치 겁먹는 햄스터들처럼 도망가기 바쁜 구매자들이 남일같지 않아서 웃플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서점마다 특색이 있지만, 대체로 무뚝뚝해 보이는 책방지기님들도 책 얘기를 하면 강도의 차이만 있지 들떠있는 게 느껴진다. 책이 뭔데, 책이 뭐길래 내향인들도 이렇게 활력있게 만드는 걸까. 가만히 있던 사람에게도 미소를 띄게 해주는 걸까.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수많은 내향인들은 비록 마주하고 있지 않아도 책이란 매개체로 서로간 소통을 한다. 이것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새 시대를 본 사람이 너무나 많다-헨리 데이비드 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