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광화문의 단풍을 지나 예술의 시간으로
광화문 광장은 가을 단풍이 짙어졌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 옆 세종문화회관은 항상 공연과 전시의 포스터가 크게 걸려져 있고, 그 주제에 따라 계절감을 한껏 더 느끼게 해준다. 풍경들 사이로,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다.
단풍이 든 나무들과 바람, 그리고 서울의 햇빛을 뒤로하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서 샌디에이고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시간의 흐름별로 모아둔 예술의 여정을 챕터별로 따라가면서 천천히 감상해보았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예술가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했는지 생각해보고, 붓의 움직임을 읽어보고자 했다.
바로크 작품 세션에서는,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공간을 감싸는 극적인 느낌을 많이 맞이했다. 안토니오 디 벨리스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그런 바로크의 정수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특히 이 작품이 겪은 복원 과정을 알고 난 뒤 화면은 마치 두 겹의 시간이 포개져 보이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어둡게 덧칠된 아래 1/4에서 골리앗의 잘린 머리와 칼이 1999년에 드러났다고 한다.
작가의 본 의도를 누군가가 지우고, 없애려고 하여도 결국에는 드러난다는 생각과 함께 크게 뜬 눈의 골리앗 머리와 칼이 이 작품의 완성 포인트임을 체감했다. 마치 과거가 스스로를 회복하며 다시 살아나는 듯한 감각을 준다. 작품 설명을 읽고, 작품을 바라보니 복원이란 행위가 단순히 그림을 되살리는 작업이 아니라 숨겨진 역사를 다시 꺼내는 일이었다.
그림 속 다윗의 근육은 힘차게 도드라지고, 그의 팔에 실리는 무게는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한 실체감을 가진다. 반면 갓 잘린 골리앗의 머리는 생기가 빠져나가 메말라가며, 핏기조차 남지 않은 채 죽음의 정적을 띤다. 두 인물의 생명력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바로크가 가진 감정의 격량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생명력이란 무엇인지, 인간이 살아있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어지는 시몽 부에의 "트로이아에서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와 그의 아버지" 역시 강렬했다. 벽을 가득 채운 화려한 의상 색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절망의 순간에서도 인간이 품고 있는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장치처럼 보인다. 불타는 트로이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올리려 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바로크가 단지 극적이고 화려한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깊은 감정을 그림 속에 담아낸 시대였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고통과 희망이 한 화면에 공존하며, 생과 사의 경계에서 드러나는 절박함을 이렇게 정교하게 담아낸 시대였던 것이다.
다니엘 세헤르스와 에라스무스 퀠리누스가 함께 그린 "성 가족이 있는 꽃 리스"는 이번 전시에서 유독 오랫동안 바라보게 만든 작품이었다. 꽃을 그리는 데 탁월했던 세헤르스와, 인물 묘사에 강점을 가진 퀠리누스가 하나의 작품을 두고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해 완성한 방식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예술이 단지 개인 작가의 고립된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서로에게 강점인 부분을 제공하고, 전문성을 나누며 하나의 ‘더 큰’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협업의 힘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꽃 리스는 화면 밖으로 향기를 흘릴 것처럼 생생하다. 꽃잎 안에 들어가는 빛의 결, 미세한 색감의 변화, 그리고 꽃잎이 가진 질감을 그대로 살려낸 표현은 바로크 시대 정물화의 섬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중심에 자리 잡은 성 가족 장면은 꽃들의 생명력과 대비되며 오히려 더 평온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예술과 비즈니스가 혼재된 방식에도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후원자가 원하는 주제를 중심에 두고, 세헤르스가 화려한 꽃으로 그 장면을 감싸며 작품의 가치를 확장하는 방식은 바로크 시대의 ‘협업 시스템’이기도 했다. 이런 구조를 보면서 오늘날의 크리에이티브 산업과 상업적 구조가 그렇게 전통적 예술과 동떨어진 개념이 아님을 깨달았다.
프란체스코 과르디의 "남쪽에서 본 리알토 다리와 대운하"는 이번 전시에서 나에게 아주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베네치아 풍경을 담은 작품들은 도시를 낭만화하고 화려함으로 가득 채우는 경우가 많지만, 과르디는 달랐다. 그는 베네치아의 실제 일상을, 있는 그대로의 냄새와 소리까지 담아내려는 듯했다. 그림 속에는 빨래가 너저분하게 걸려 있고, 창문들이 활짝 열려 있으며, 장사를 위해 짐을 실어 나르는 상인들과 노를 저으며 이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 장면을 보고 나는 1770년대의 베네치아가 어떤 도시였는지를 실감하며, 이상화된 풍경이 아닌 '살아 있는 도시'를 보는 기분을 느꼈다.
대운하는 실제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는 현장이었고, 그림 속 분위기에서는 소음과 습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생생함이 있었다. 과르디의 시선은 도시의 현실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모습이었고, 이를 통해 풍경화가 단순히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예술이란 결국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며, 그 속에서 도시와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를 기록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베르나르도 벨로토의 풍경이 도시를 이상적이고 정교하게 그리고 있다면, 과르디의 풍경은 그 이상적인 틀을 꺾으며 실제 삶을 중심에 두고 있다. 나는 이 대비가 너무나 흥미로웠고, 벨로토의 피르나 풍경이 ‘가고 싶은 장소’의 욕망을 자극한다면, 과르디의 대운하는 ‘살아있는 도시’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전시는 각각의 작품이 시대의 삶과 감정을 담아내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바로크의 극적인 생동감과 감정의 폭발, 세헤르스의 협업이 보여준 예술의 확장, 그리고 과르디가 기록한 현실의 도시 풍경은 모두 예술이 단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깊은 언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나는 전시장의 마지막을 지나며 예술이란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은 여전히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아름다움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고, 예술은 그 모든 흔적을 그대로 품어낸다. 신화와 종교적 색채를 담은 그림도 의미가 있지만, 나는 사람이 담긴 칠판에 더 마음이 가고 오랫동안 쳐다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용하고 어두운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 만난 샌디에이고 미술관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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