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겨울밤, 피아노가 전해준 따뜻한 울림과 웅장함
갑자기 찾아온 초겨울의 쌀쌀한 공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했던 저녁, 서울 끝 공연장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는 마치 그 추움을 잊게 해주는 따스한 불빛 같은 시간이 되었다. 공연장은 크지 않았지만, 그만큼 더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아늑한 분위기였다. 어두운 객석과 대비되는 무대 위의 피아노는 마치 그 자체로 주인공처럼 보였고, 연주자의 등장과 함께 음악은 시작되었다.
첫 곡으로 연주된 바흐의 ‘토카타 D장조’는 바로크 음악 특유의 명료하고 화려한 구조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건반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연주자의 손가락은 마치 바흐가 구축한 음악적 건축물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 보였다. 고전적인 규율 속에서도 생동감과 감정이 살아 숨 쉬는 이 곡은 공연의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바흐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차갑지 않은 정교함을 담고 있는데, 이날 연주는 그 정교함에 연주자의 따뜻한 해석이 더해져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어진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는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늘 인간적이고 따뜻한 서정을 담고 있다. 이 곡의 첫 악장 ‘Allegro moderato’는 밝고 맑은 선율로 관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열어주었고, ‘Andante’에서는 부드러운 감정의 물결이 잔잔히 흘렀다. 마지막 ‘Allegro’에서는 슈베르트 특유의 유려한 멜로디와 리듬이 더해지며 한편의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는 듯했다. 특히, 이 곡은 마치 오래된 친구가 조용히 손을 잡아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는 슈베르트 음악만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이라고 생각된다.
리스트의 ‘장송곡’은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장엄하면서도 고독한 이 곡은 마치 한 시대를 초월해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한 음 한 음에 담긴 무게감은 단순히 슬픔을 넘어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특히 저음부의 깊고 울림 있는 연주는 마치 무언가를 묵직하게 관조하는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인터미션 이후, 드뷔시의 ‘영상’ 제1집이 시작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드뷔시의 음악은 이름처럼 마치 눈으로 보는 영상 같다. 첫 곡 ‘Reflets dans l’eau’에서는 물결의 반짝임과 잔잔한 흐름이 피아노의 섬세한 터치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두 번째 곡 ‘Hommage à Rameau’에서는 깊은 명상과도 같은 분위기가 연주장을 채웠고, 마지막 곡 ‘Mouvement’은 리듬감과 생동감으로 관객들을 일깨웠다. 드뷔시의 곡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통해 어떤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연주의 큰 매력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곡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각각의 악장이 하나의 그림을 묘사하는 이 곡은, 음악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무소르그스키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롬나드’로 시작된 여정은 ‘바바 야가의 오두막’과 ‘키예프의 대문’에 이르기까지 점점 강렬해졌다. 특히, 마지막 대문 장면에서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피아노는 잔잔한 선율을 연주할 때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악기이지만,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며 거대한 탱크처럼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이 곡은 공연을 마무리하기에 완벽한 선택이었다.
피아노는 참 독특한 악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따뜻하고 섬세한 위로를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강렬함과 웅장함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날 연주는 피아노의 이런 양면성을 완벽히 보여주는 시간이었고, 연주자는 그 모든 감정을 능숙하게 표현해냈다.
차가운 겨울밤에 만난 음악은 단순히 감상을 넘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위로와 강렬한 울림을 동시에 남겼다. 공연장을 나서는 길, 갑작스러운 초겨울의 찬 바람이 다시 느껴졌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따뜻했다. 이날 연주회는 그 온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줄 것만 같은, 잊지 못할 선물이다. 일리야 슈무클러 피아니스트의 앞날도 기대가 되며 응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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