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이야기들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
'처음엔 좋지만 시간이 가면 가족도 보고 싶고 내 집만 한 곳이 없어''시설도 낡아가고 의료진도 시들해지고 직원들도 그렇고' '사람들끼리 갈등이 생기면 꼼짝없이 그대로 지내야 하거든'
그래서 나는 평소 시니어스클럽에 대해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걸맞은 경제력이 받쳐준다면 ”그런 곳을 물색해야지”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아는 친척 아저씨의 거처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아저씨는 할머니의 친정조카이다. 할머니는 생전에 자랑스럽게 그분 얘기를 하곤 하셨는데 과연 우리도 인정하던 바이다. 난공불락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에 선망이던 서울사람으로서 진외가의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왔다.. 큰 아저씨의 응대로 보아 엄청 지체 높은 분이라는 것을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제사에 참석한 우리도 알 수 있었다. 그분 부인인 아주머니는 한 번도 큰집 대소사에 나타나지 않는 서울깍쟁이 멋쟁이였다고 전해진다.
그 아저씨를 대면하게 된 것은 서울역 근처 언론연구원으로 아버지랑 찾아뵈었을 때였다. 시험에 합격하고 발령이 지체되어 아버지는 그분께 총무처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봐 달라는 청을 넣으셨다. 얼마 후 그분은 우수한 성적이더라고 알려 주시면서 부처를 선택할 때 “여자가 결혼해서 직장을 병행하려면 교육직이 최고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분의 말씀대로 교육부 산하 직원이 되었다.
그 후로 몇 번 편지를 드렸다. 발령이 났습니다.~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결혼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느 날, 진외가의 고모와 언니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했는데 진외가 언니 왈 ‘제니아! 우리 작은아버지가 때마다 너를 찾으시더라.’ 저런 이건 나의 실수가 아니라 세월의 실수로구나. 중간에 내가 여유가 없어 맘과 달리 거기까지 챙기지 못했구나. 그 언니에게 근황을 물으니 ‘아버지랑 뵀을 당시의 시니어스클럽에서 부부가 노후를 보내신다.’고 한다. 주소를 알아내 그다음 날 택배를 챙겼다. 연하작용이 어려우시다니 흰살생선과 다져서 사용할 전복 그리고 수제만두와 쑥인절미를 보냈다. 그 후로도 시간이 나지 않아 택배를 한 번쯤 더 챙기고 기회를 보던 차에 평소 연락하고 지내던 아저씨의 조카딸에게 가자고 청했다. 기꺼이 동행해 줬고 찾아가 뵀더니 90이 월씬 넘으신 기억력으로 나를 너무나도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다만 한 가지, 결혼을 했느냐고 자꾸 물으셨다. 그만큼의 시간에 머물고 계신 건지.
<학은가문의 가승보>는 할머니의 손녀인 우리들의 흔적도 한 줄 자리하고 있는 진외가의 가계도이다. 아저씨가 건강하셨을 때 집집마다 수소문하여 이름과 학력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손들의 이력을 책 한 권으로 편집한 기록인데 간략한 요점만으로도 책이 한 권 엮어져 그 당시 신기했던 기억이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 대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사라진 진외가의 가승보는 아저씨네 책상 한 모서리에 세 권이 꽂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 권을 청하니 기쁘게 사인을 하셔서 내어주셨다. 내가 가계도의 이력을 추적하는 작업을 반가이 하게 된 계기도 이 책 한 권의 영향력이 아닌가 한다.
올여름 그동안 만남을 이어온 진외가의 언니 둘과 이모할머니의 딸 그리고 우리 언니와 나. 이렇게 다섯이서 남도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진외가의 옛 집이 리모델링되어 하룻밤 자고 올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멤버 구성이 가능하게 하신 우리 할머니는 첫 포도가 나면 이웃마을 과수원에서 첫물 과일을 한 바구니 사 담고서 해마다 진외가의 제사에 참석하셨다,
그때마다 손녀들을 대동하고 가셨는데 초등학교 삼 사 학년 때는 하룻밤 자고 와야 해서 일기장을 들고 갔던 기억이다. 내 일기장을 장난 삼아 챙겨 다락방까지 쫓기며 읽어 내려가던 그 집 오빠는 자신의 동생들에게 ' "본받으라"며 채근을 했던 기억이 선연하다'며 옛이야기에 거들고 나선다. 그렇게 8남매나 됐던 그 댁의 자손들은 윗대는 우리 고모 삼촌들과 그리고 아래로는 우리 형제들과 끈끈한 유대를 갖게 되었고 서울살이를 하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끊임없이 선한 영향력을 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