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직접 농사지은 수박댓 통 과 이웃 과수원에서 가장 좋은 포도를 골라 담아 기차를 타고서 진외가로 출발하셨다. 일행으로 당신의 아들과 손녀들과번갈아 동행하여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이다. 과분한 환대를 하시고 대우해 주시던 큰 아저씨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대표적인 중년의 멋쟁이로 선연하다. 제사 다음날 새로 빚은 송편 한 석과 숭어새끼를 쪄낸 모찌 한 석을 챙겨주시곤 하셨는데 난 그것보다 외가의 오빠와 언니들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그 언니들이 차례로 결혼비사와 함께 시집을 가고 오빠들이 차례로 공직에 들어설 때마다 자랑스레 얘기를 들려주셨다. 남다른 애정으로 말이다.
서울 작은 아저씨의 글에서 발견한 할머니의 노래 ‘밤 한 톨 주서다가 시렁 위에 놓았더니 머리 까만 새앙쥐가 들랑날랑 다 까먹고 보누만 남겼으니 보누는 네가 먹고...’를 읊조리시던 자상함도 있었으나 자기 자랑도 구성지게 하셨다.
우리 집 사진첩에 당신 어머니 사진을 제일 앞에 붙어두고 서울 아저씨 자랑, 군대 아저씨 자랑, 그리고 선산조성에 얽힌 이야기 등을 어린 손녀들에게 자랑삼아 들려주시곤 하셨다. 방앗간 사고 소식과 둘째 이모할머니 이야기 등 어두운 이야기도 있었다.
내가 결정적으로 진외가의 도움을 받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취직 시험준비를 위해 진외가 언니의 자취방에서 동거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낸다.
할머니는 집안사정으로 사춘기 때 공석이 된 엄마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꿔주셨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뛰어나 여장부의 기개였는데 여럿인 손녀딸들의 기를 살려주시던 분이다. 소풍이나 가을 운동회때면 언제나 맨 앞자리에 자리하시고 공부 잘하는 손녀들의 위세를 한껏 누리셨다. 우리도 더불어 당당해졌다. 또한 배우자에게 잘하는 법을 직접 실천으로 가르치셨다. 오일장에서 낙지며 문어등을 따로 마련해 오셔서 제일 먼저 할아버지상에 올리시며 말씀하셨다. ‘내 신랑은 내가 위해야 한다’ 그러시면서 소화력이 약하신 할아버지를 위해 솥을 두 개 걸고 끼니마다 찰밥을 따로 하셨다. 그러면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언제나 관철하셨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생을 기리는 의미로 돌아가신 후 매월 초하루날이면 마른 제물을 정성스레 포장하여 시골집으로 소포를 보냈었다. 일년동안 이어진 이 경건한 의식의 마무리는 면사무소 근무하시던 작은아버지께서 도와주셨다.
결혼해 살아보니 代 물림이라는 걸 실감한다. 우리 아이들 입장에선 5대조 쯤되는 진외가의 어른이지만 우린 엊그제 추억담으로 논할 정도이고 그 기개가 대를 이어 전해지는 걸 느낀다. 할머니의 선 굵은 기개와 엄마의 섬세하고 고운 맘씨가 어우러진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우성의 유전자를 물려주었다고 자부한다.
오늘, 고향 선산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가 그립다.
석순이 최순례 여사로 시작된 인연으로 진외가 작은 아저씨가 쓰신한 권의 인물사전을 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