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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정인 Nov 15. 2020

내 안에 있는 조각을 믿기로 했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읽으면서 줄어가는 페이지수를 아까워하며 읽은 책.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는 나에게 너무 많은 충격과 신선함, 통찰 그리고 앞으로의 지향점을 주었다. 내 안에서 정리되지 않고 무겁게 쌓이던 것들을 언어화해서 보여준 책 같았다. 그리고 무거운 주제임에도 위트와 힘이 함께 있어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지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갈 힘과 방향까지 얻었으니 정말 귀한 책이다(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준 유주얼 작가님 감사합니다).        

 

  내가 왜 번아웃이 오고 이렇게 힘들어졌는가에 대한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화살이 향한 곳은 내가 너무 사랑했던 엄마였다. 내 마음속에 가시로 박혀있는 엄마가 했던 아픈 말들이 원망스러웠다. 엄마의 기대가 너무 무거웠고 그것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좌절시켰고 나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었다. 자식을 위해서 한없이 희생하고 자기를 챙기지 않는 엄마의 사랑이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희생하며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원망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항변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비겁하다 느껴졌다.      


  엄마 다음은 할머니였다. 장남에게 시집와서 아들을 못 낳는다고 엄마에게 모진 말과 행동을 했던 할머니를 원망했다. 그리고 고부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기는커녕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도망간 아빠를 원망했다. 그것도 지나서는 할머니를 너무 억척스럽게 만든 생활력 없었던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엄마를 너무 일찍 떠나버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원망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원망하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나와 그들을 아프게 할 뿐이었다. 그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았고 나를 너무 사랑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미친 듯이 올라오는 분노를 표현할 대상을 잃었다. 엄마도 할머니도 아빠도 그 누구도 아니었다. 결국 가부장적인 사회문화, 식민지와 전쟁의 역사가 원망스러웠다. 사회를 원망하게 되자 답이 없다고 느껴졌고 신물이 났다. 사회를 바꾸기에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너무 막막했고 나에게는 그런 힘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가라앉았고 하루 종일 잠만 오는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이 책은 가부장제에 포섭되지 않은 여성이 가장이 될 때, 가족들이 어떠한 결을 갖고 살아갈지에 대한 기분 좋은 전망을 준다.’ _김보라(영화감독)    


  김보라 감독의 말처럼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내게 전망을 보여줬다. 한국의 아픈 역사와 사회문화를 바꿀 수는 없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심시선처럼 기록한다면 내 다음을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한 사람의 고통을 사회의 영향을 배제하고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회문화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 존재를 자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공기처럼.      


  열심히 잘 달리고 있던 내가 왜 넘어졌는가에 대한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혹은 ‘내 가족’에게서 찾아내려고 1년 반의 시간 동안 분석하고 원망하고 싸워댔다. 그 안에서 가장 많이 상처 입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욱 가라앉고 우울해졌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나의 아픔을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씩 나아갈 방향이 보였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여러 조각들이 쌓인 결과이지만 가장 큰 조각은 당연 ‘시선으로부터,’ 책이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책의 마지막 구절은 내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우리 모두의 안에는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들의 조각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믿는 것도 어려운 사람이지만 그 조각들을 믿어 보기로 했다. 


  나라는 사람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남은 유전자들의 조합이니까.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선조들의 후예니까.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면 조금은 바뀔 것이다. 쌕쌕거리며 곤히 잠을 자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아이에게 조금은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심시선처럼 솔직하고 위트있는 기세등등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에게서 뻗어나간 가지들이 나를 떠올리며 힘든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이다.  


나의 조각을 가진 아이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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