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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기 Dec 24. 2018

완벽한 타인, 위험한 만찬

영화 완벽한 타인을 보고나서 떠오른 사색거리

영화 완벽한 타인이 끝나면 나오는 문장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하나, 개인적인 하나, 그리고 비밀의 하나.” 직관이 발달한 사람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할 수 있는 한 마디다.




공적인 삶은 거실, 부엌 등 공유하는 방이고, 개인적인 삶은 서재, 개인 방인데 평상시에 타인으로 방해받지 않지만, 언제든지 타인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므로, 정제된 개인의 삶이 놓이게 된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식탁과 부엌, 거실을 오가면서 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베란다로 몰래 두 사람이 빠져나오고, 안방으로 부부가 잠시 들어가면서 둘만의 대화를 나눈다. 개인적인 삶이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불쑥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있다. 화장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개인은 화장실에서 숨겨온 애인과 문자를 하고, 부인 몰래 처리한 금전적인 거래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super ego = 거실 공간, ego = 개인방, id = 화장실과 그대로 대입된다. 




등장인물들은 이 세계의 삶을 허무는 '우리가 남이가' 게임을 시작한다.


"오늘 저녁 우리는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거야." 


비밀을 말하느냐 마느냐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 또 거짓을 말하느냐 진실을 말하느냐도 본인이 결정한다. 그래서 법정에서는 위증죄라는 것으로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도록 강요한다. 아무리 지인들끼리 회식자리에서 모든 비밀을 폭로하자고 해도 하나 마나 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강제로 들추어 볼 수 없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원초적인 욕구를 저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보라는 것은 공적인 정보, 공공장소 게시판이었다. 개인의 정보는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인 '공인'이다. 개인은 개인이지만, 사회 여러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공인이라고 하고, 그들의 개인정보는 다수가 열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사한 사례가 범죄 수사다. 범죄는 사회적으로 영향을 주는 활동이므로 범죄 혐의자에 대한 개인 정보도 수집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세계의 삶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바로 SNS가 확대되기 전까지는. SNS는 그 개인이 공인이 아니고 범죄자가 아닌데도 타인들이 열람할 수 있게 만든다. 어디서 누구랑 만나서 식사하고 술 마시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든 것이 공개된다. 개인의 삶이 공적인 삶과 혼합된다. 더 끔찍한 것은 화장실이나 자가 용안 등 밀폐된 자기만의 공간에서 일기를 적는 일이 SNS를 통해서 외부의 타인과 연결이 되고, 그 내용을 또 다른 제삼자가 열람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발전이다.  화장실에서의 문자는 욕구(id)의 레벨로 나가는 빗장을 풀어버린 것이다. 가족들이 모르는 어떤 다른 사람과 내면의 감정이나 욕구를 충족하는 문자를 주고받는 것은 id와 ego와 심지어는 super ego까지 가로지르는 것이다. 




교수가 여학생을, 목사가 여신도를 포옹하는 행위를 공적인 삶에서 보면, 주님의 사랑을 공유하는, 멘토의 격려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목사의 마음에 여신도가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 포옹은 super ego의 활동이 아니라, 저 밑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 욕구의 삶, id의 영역이 된다. 심리상담가가 여성고객과 저녁 식사를 하고, 공원 벤치에서 지나간 세월에 대하여 담소했다면, 마음만 먹으면 두 사람은 id의 영역에 떨어질 수 도 있다. 이럴 때 다른 사회적 관계가 복잡해진다. 가족이 있는 유부남이거나, 유부녀라면, 이런 빈번한 만남이 공적으로 드러난 사제와 신도, 상담사와 고객의 관계를 넘어서서 남녀관계가 되면 그 두 사람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이 위험에 빠진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비밀 공개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벨소리는 카톡 문자, 전화 문자, 이메일이 도착했을 알리고, 마음속 깊은 곳의 표현들은 카톡과 문자에 증거를 남긴다. 영화 속에서 개인의 비밀은 스마트 폰이라는 기계가 사정없이 폭로하게 된다.  은밀한 성생활, 외도, 금전거래, 소비, 가십들은 여지없이 공개된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연약한 경고다. 고압전선으로 망을 치고, 사과나무 근처를 갈 수 없게 만들어야 하고, 주변에 커튼을 쳐서 사과나무 자체가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욕구(id)의 삶에 둘이 손잡고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적인 제어는 쉽게 허물어진다. 만난 적이 없는 블로그 친구의 주문에 따라서 주부가 팬티를 벗고 회식에 참석하는 것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병행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본인이 치마를 들추지 않는 한, 아무도 눈치 채지는 못한다. 이 세계의 삶이 존재하면 타인에 대하여 이 삼단계 영역을 인정해준다면, 절대로 핸드폰을 가지고 집단 놀이를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화장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를 언급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부인과 관계가 좋은 지도 일반인들이 알면 안 된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궁금해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잔인한 행위다. 




게임이라고 하지만, 영화 속의 등장인물은 잔인한 행동을 해버렸다. 핸드폰이라는 화장실 도구를 들고 나와서 사적인 욕구들을 공개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당연히 결말은 파국이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없는 부부들이 말미에서 타인이 되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프로이트의 세계의 자아를 준수하는 것이 평화로운 이웃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숙지하고 있다. 욕구를 공적관계에 투영을 시키면 히틀러 양진호 같은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각자 자기의 경계선에서 공적인 관계에서는 끝까지 공적인 관계로 남아야 하고, 사적인 세계는 그 자체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영화는 40대 중년들이 각자 애인을 두고 있건, 누구와 무슨 관계를 맺고 있건, 따지지 말고 살아가야 하며, 한편, 중년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유치한 행위를 뒤에서 한다는 사실도 당연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이 말은 딸의 가방에서 콘돔이 나온다고 해도 모른 척 함구해야 하며, 아예 가방이나 서랍을 뒤져서 사생활을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사적인 관계, 더 심하게 욕구적인 관계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 때만, 열려있는 선택이다. 동료나 가족이 모르는 반전의 개인적인 관계들은 집에 총기를 두고 사는 것과  같다. 우연한 기회에 방아쇠를 당기면, 대 참사가 벌어진다. 자신 없으면 총자체를 치워버려야 한다. 만일 창세기에서 조물주가 이 지점까지 이해했다면, 에덴동산에 선악과 자체를 뿌리 뽑아서 제거했을 것이다. 




한마디 더, 현대인의 사회적 관계에서 총기는 무엇인가?


핸드폰이다. 


남편이 잠시 화장실을 간 뒤에 들려오는 알림 소리가 거슬려서 폰을 열어보는 순간, 왜 요즘 남편이 밤마다 야근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10년 전 같으면, 식당에서 남편을 우연히 본 아파트 이웃 아줌마가 전해줄 만한 내용을 핸드폰이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범죄 수사에서 핸드폰 압수 수색은 기본 중에 기본이 된다. 이렇게 위험한 총기인 핸드폰 내의 SNS를 너무 사랑해서 화장실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은밀한 것들을 배설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




외로워요. 




황야의 무법자 장고는 생존하기 위해서 권총을 들었지만, 현대인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핸드폰을 든다. 아찔한 시대에 살고 있다.




https://youtu.be/-UWdeFywy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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