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귀먹어

by Rudolf

天聾尙未聞哀訴 |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먹어 애달픈 소리 듣지 못하고


며칠 뒤 연준은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부터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소녀를 찾아야 한다. 반드시.

아버지의 피에 대한 진실은 할머니가 아니라 소녀가 말해 줄 것이다.

소녀가 고성의 산비탈에서 절망에 빠져 헤매다가 강릉과 묵호를 거쳐 미군의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 것까지는 더듬을 수 있었다. 그것 말고는 소녀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하늘이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준의 감각세계에서는 그 이상의 방법은 모른다. 그리고 연준은 자신이 그린 방법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부산에 도착한 소녀는 더 이상 연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피난민촌 어디에서부터 부산 생활을 시작했을 텐데.

한 통계에 의하면 1951년 6월까지 남한 전 지역의 피난민 수는 모두 571만 972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1950년 말에는 피난민 한 명 당 하루에 쌀 2홉, 밀가루 1홉 3작, 기계로 납작하게 누른 보리인 압맥 7작을 배급했다. 그 이듬해인 1951년 초에는 양곡 3홉, 그리고 부식비와 연료비로 50환의 돈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피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서류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정부에서 (그 당시는 유엔이지만) 제도적으로 피난민을 구제하려 한 것을 보면 피난민들에 대한 명단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 일을 주관한 부서는 유엔민사원조처(UN Committee of Assisting Civilians)라고 하니 여러 경로를 통하면 알아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연준은 이 방법은 택하지 않기로 했다. 소녀는 그 이후 70년을 더 생존했기 때문에 명단을 확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녀가 부산 또는 다른 지역 어디에서 피난살이를 했더라도 상관없다. 소녀는 부산에 도착하고 나서 3년 뒤 경기도 성남으로 옮겼다. 연준에게 필요한 것은 소녀의 삶이다. 육신뿐만 아니라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고통 겪었을 그 마음을 추적하고 싶은 것이다.

하늘이 소녀에게 가장 비참한 상황을 내려주었다면 피난민 시절도 가장 험악했을 것이다. 그래야 소녀의 삶이 더 극적이게 된다.

연준은 여러 기록을 통해 아미산 공동묘지에 피난민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곳이다.

비련의 주인공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는 없다.

지난번 부산에 가서 피난민촌을 찾아다녔을 때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준은 이번에는 확실할 것이라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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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은 50번 고속도로를 통해 45번 고속도로, 67번 국도, 55번 고속도로를 지나 부산 시내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강변대로, 낙동대로, 까치고개길, 온천로, 아미로를 통해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도착했다. 중간에 두 번 쉬고, 또 길이 꽤 막힌 탓에 근 8시간이나 걸렸다. 새벽에 떠났는데 정오 지나서 도착한 것이다.

아미산 남쪽 자락에 자리했다는 공동묘지. 그 터에 동네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동네 한 편에는 당시의 비석들로 만든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근처의 대성사라는 절 부근에는 추모공간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이다. 소녀가 부산에 정착했던 곳.

그러나 공동묘지 자리라고 해서 다소 음산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동네는 깨끗하고 밝았다.

연준은 그 동네를 이곳저곳 다녀보았다.

피난민촌이 느껴지는가?

연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준은 동네 바로 위에 있는 아미산으로 올라갔다. 정상까지 15분 정도 걸렸다. 그 중간에 괴정공동묘지라는 곳이 있었고, 산에 오르는 길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옛 피난민 시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이 변했다니까.

연준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러면서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정상으로 올라갔다.

산의 높이는 163미터라고 한다. 사실 약간 높은 동산 정도에 해당한다.

정상에 오르니 전망대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낙동강 하구와 모래섬들로 이루어진 삼각주가 보였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나서 연준은 그 옛날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쪽을 향해서 섰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바뀐 곳이다.

그곳에 100년도 더 전부터 수많은 생명이 묻혔다.

“경치가 좋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여든은 넘었을 것 같은 노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와 있었다. 나이치고 몸은 건강한지 허리가 꼿꼿했다.

“아, 예. 그러네요. 산 아래가 탁 트이고…….”

“서울에서 왔나 봅니다. 말씨가…….”

“아, 예.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내려왔다가…….”

“나는 이곳에 자주 온다오. 나도 서울에서 사는데 여기 손주들 집에 올 때마다…….”

어딘지 약간의 이북 사투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괜한 생각이겠지만.

“저기 저쪽 좀 봐요. 저 아래…….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곳 있죠?”

“아, 예, 저기……, 저 아래쪽…….”

“맞아요. 거기.”

노인의 숨이 약간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 그때는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연준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육이오 때 저곳에서 지내셨나요?”

“열대여섯 살 때였지.”

“아, 예…….”

노인은 잠시 말이 없이 산 아래를 바라본다. 추억이, 아니 회한이 담긴 시선.

“그때는 공동묘지였는데도 그 사이에서 정신없이 뛰놀았다오. 비석들 뽑아서 집 짓는 놀이도 했지. 별 짓 다했어.”

“…….”

“저기서 죽기도 많이 죽었어. 아기들도 태어나고.”

아기…….

“저 혹시 그때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서 좀 아시나요?”

노인이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연준을 쳐다본다.

“저, 실은……, 제가 지금 누구를 좀 찾고 있거든요.”

연준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대략 설명을 했다.

“그 소녀 이름이 연희인데, 손연희……, 당시 열여섯, 아니 아기를 낳았을 때는 열일곱…….”

노인은 옛일을 더듬는 듯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 당시 처녀들도 많았고 애도 많이 태어났지. 그런데…….”

연준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음……, 그 나이면 내 또래였을 텐데……. 그때 아기를 낳았다……?”

연준은 애가 탔다. 제발……, 제발…….

“내가 저기에 왔을 때는 일사후퇴 지나고 나서 봄이었는데, 그럼 한 번 정도 마주치기는 했을 게요. 하지만 낮에는 저기 저 멀리 국제시장 쪽에 가서 일을 하고 밤에 돌아왔거든. 그래도 저곳에서 2년을 살았으니까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지냈다우. 아마 댁 할머님도 보기는 보았을 게요. 이름이 연희라고 했지……. 음, 들은 것도 같고…….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갓난아기들도 많이 태어났는데 죽기도 많이 죽었어. 아기들이. 전염병도 많이 돌고 영양도 안 좋았으니까. 어른 먹을 것도 모자랐는데 아기들이야 오죽했겠어…….”

“저, 그래도 기억을 좀 더듬으시면…….”

노인은 또 잠시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겼다.

“흠……, 댁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정확치는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많은 사람이 나갔지…….”

그리고는 노인은 말을 끊었다.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됐수. 내 딱히 이렇다 저렇다 얘기는 못 하겠지만 보기는 보았던 것 같소. 예쁘장하고 얌전한 여자. 내 나이 또래. 죽을 동 살 동하며 아기를 낳아서……. 그 당시 어떤 젊은 여자가 애 낳다가 피를 너무 흘려서 다 죽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얘기는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그 사람인지……. 아이고, 참. 나이가 드니 이렇게 되어버리네. 마안하우.”

노인의 말은 잠시 더 이어졌지만 딱 부러지는 확증은 얻을 수 없었다.

노인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연준은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깊이 허리를 숙이며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다시 혼자가 된 연준.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자리를 내려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래, 나 같아도 70년 전 일을 다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별히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었다면 모를까. 괜히 엄한 노인을 다그친 것은 아닐까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연준은 그래도 노인이 이것저것 이야기해 준 덕분에 공동묘지 피난민촌을 좀 더 현실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생동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그 당시의 광경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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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은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육이오 피난민들을 떠올렸다. 공동묘지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떠도는 한 소녀, 의지할 사람 전혀 없이 홀로 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여인. 갓난아기를 안고서.

연준은 그 소녀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돌아가신 할머니 얼굴에 남아 있을 소녀의 모습을.

보일 것도 같고…….

잠시 그러고 있자니 산 아래쪽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바람소리인가?

아니다.

사람들 소리.

죽은 영혼들의 소리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산 자들의 소리였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과 애절함이 담긴 소리들.

살아 있는, 그리고 살아가려는 억척이 담겨 있는 소리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미세한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소리……?

연준은 귀를 기울였다. 마음을 모았다. 고개를 기울였다.

저 소리…….

아, 그것은 아기 울음소리였다. 이제 막 탄생하는, 어머니 자궁에서 나와 세상을 향해 터뜨리는 함성.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지금 막.

연준은 눈을 떴다.

소녀가 아기를 낳은 것이다.

갑자기 연준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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