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이야기
30대 이야기
1
희영은 이번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적당한 시기였다. 30대 후반에 그 정도면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희영은 크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에도 심사에서 탈락하면 영 체면을 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기회였다. 사실은 희영은 남들보다 성과가 무척 좋아서 마음속으로는 진작에 승진이 되어 남들보다 앞서가는 기분을 맛보고 싶었었다. 그래도 어떻든 이번에 다른 사람들한테 처지는 꼴을 보이지 않은 것만도 썩 괜찮은 것이었다.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지?”
“별 말씀을요.”
“앞으로는 고속도로 탈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솔직해서 좋다니까.”
“제 성격이 원래 그래서요.”
“바로 그 점이 좋은 거야. 앞으로 더 열심히 해. 꼭대기에 계신 분들이 눈여겨보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나이 들면 혼자 있는 거 보기 안 좋아. 리무진 고르려다 브리사 탄다고. 브리사 알아? 옛날 국산차. 자네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차지.”
브리사는 1974년 기아자동차에서 나온 배기량 1,000cc짜리 승용차였다. 일본 마쓰다 자동차의 한 모델을 본 딴 것이었으며, 브리사(Brisa)는 ‘해안가에서 부는 산들바람’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그 이후 1976년 현대자동차에서 한국형 승용차 조랑말 포니(Pony)를 처음으로 생산했다. 배기량 1,238cc.
본부장은 희영의 어깨를 툭 치고 가면서 한마디 던진다.
“심심하면 나한테 말해. 좋은 데 있으니까.”
희영은 본부장 뒤에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느끼한 인간. 그렇지만 늘 희영 편에 서준다. 그래서 싫은 척할 수도 없다. 이번에도 희영에게 힘을 많이 써준 것으로 안다. 어떤 식으로든 보답은 해야 하는데 마음은 영 내키지 않는다.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삐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무엇인가 해주긴 해야 하는데…….
사무실 저쪽 구석에서 몇몇 사람이 희영을 바라보며 커피 잔이나 손을 들어올린다. 희영은 그들에게 손을 살짝 들어서 흔들며 답했다.
희영은 저녁 술자리에서 일찍 나와 대리운전을 맡긴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가 온다.
일부러 안 받았다.
깔똑. 또 깔똑.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축하해…….
한잔 사…….
퇴근 직전에 한 친구가 저녁이나 먹자고 전화한 것을 회식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더니, 회식 없기로 유명한 회사에서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묻기에 할 수 없이 승진 회식이라고 알려주었었다. 약간 후회도 되었다. 나중에 적당한 기회에 깜짝쇼처럼 해야 극적 효과가 있었을 텐데, 자기 킹 카드를 너무 일찍 내밀었나 하는 것 때문에 속이 좀 상했다. 게다가 누구보다도 말이 많은 친구인지라 아마도 지금쯤은 삼천만이 다 알았을 것이다. 나머지 이천만은 조만간 알게 될 것이고. 일주일 내에 대한 외국인 250만한테까지 소문이 다 날 테지.
마음이 조금 개운치 않았다. 너무 일찍 터뜨린 샴페인 병에서 흘러넘친 김빠진 거품 같은 느낌.
다 좋았는데 그것 하나가 마음에 걸려 공연히 배알이 뒤틀렸다. 김이 샌 것이다.
하필 오늘 전화를 한담. 고 계집애.
그러나 희영은 아직도 코끝에 배어 있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조금 더 누리려고 차를 돌려 뉴카리브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스카이라운지로 곧바로 올라갔다.
희영은 혼자 창가에 앉아 가벼운 술 한 잔 시켜놓고 입에는 대지 않은 채 창밖 야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참 아름답다. 낮에는 웅장한 대리석 건물 속에서 떠도는 선남선녀들, 지금 이 밤에는 화려한 야경 속에서 피어오르는 전설 같은 추억들. 사실 그동안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잘 넘겼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스릴 넘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한 것들 기막히게 다 이겨내고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일 그때 조금만이라도 삐끗했더라면……. 갑자기 소름이 쫘악 끼치며 희영은 몸을 움찔했다.
희영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화들짝 놀라 길거리 상점의 좁은 차양 밑으로 뛰어들어 비에 젖은 머리 흔들며 물기 털어내듯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그때 그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에서 탈락한 동료들. 몇몇 이는 아직도 회사에 남아 있고, 또 몇몇은 떠나갔지. 그들 중 다른 곳에 가서 다시 일어난 이들도 있고, 존재감 없이 사라진 사람들도 있다. 그이들 중에서는 정말 괜찮은 인물도 있었는데. 그 아까운 사람들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몇몇 이는 소식을 알지만, 지구에서 사라진 듯 아주 완전히 자취를 감춘 이들도 있다. 그중 하나, 엄청 미인에다 성격마저 좋았던 성진희. 그녀는 회사 내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희영 자신도 같은 여자로서 시샘도 나긴 했지만 자신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저 먼 산 쳐다보듯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자부심도 대단하고 실력도 괜찮았다. 사람들의 기대도 한 몸에 받고 있었고. 나이는 희영보다 두 살 많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떠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스트레스를. 매일같이 쌓여가는 중압감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다. 결혼했네, 다시 외국으로 나갔네, 강원도 어디 가서 심신을 달래고 있네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는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 버렸다. 순수한 국내파인 희영으로선 성진희가 지닌 프로필이 늘 부러웠지만 자신과 너무 격차가 나고 성격이나 외모나 집안이나 모든 면에서 아예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약간은 주눅이 들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성진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 순간 며칠 전에 사무실 한 구석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왔던 것이 기억났다.
아까운 사람…….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지.
사실 희영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희영 자신도 남들에게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희영에 대해 실력파 올드미스로만 알고 있다.
그 말은 맞다. 외형적으로는. 지금까지 법적으로 결혼한 적은 없다. 그리고 지금도 어엿한 독신, 즉 혼자서 산다. 그러나 실제로는 법적 용어인 미혼모다. 두 아이, 쌍둥이 아들이 있다. 남들 같으면 고등학교 갈 나이인데 두 아이 모두 아직도 누워 있다. 7개월 만에 태어난 미숙아인데, 출산 때 둘 다 뇌를 다쳤다. 영구장애. 게다가 임신 때 희영이 자살하겠다고 약을 먹은 것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흘러들어가서 그랬는지 대두증으로 태어났다. 두 아이는 지금 시골에서 늙은 부모님이 데리고 있다. 희영은 돈만 넉넉히 보내줄 뿐 거의 내려가 보지 않는다. 부모님도 아예 내려오지 말라고 한다. 보면 가슴만 아플 테니까. 서울에서 일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그것이 아이들한테도 도움이 된다며, 시골 일은 아예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게 잊어버릴 일인가 말이다. 그래서 희영은 악착같이 일하고 일하고 또 일을 했다. 잊어버리려고. 잊히지 않는, 결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일을 잊어버리려고. 그래, 맞다, 털어버리려고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잊어버릴 일이냔 말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회사에만 나오면 그 일은 깡그리 잊고 만다. 그리고 마치 자신은 그런 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흔히 말하는 성공한 독신 커리어 우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에서의 희영은 유쾌하고 강단 있으며, 실력까지 갖춘 미래의 인적 자산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그 사람……. 그 사람은 죽었다. 그쪽 집안에서 희영을 반대하는 바람에 둘이 자살하기로 하고 함께 약을 먹었는데 그 사람은 죽었고 희영은 살아남았다. 그 대신 두 아들 쌍둥이를 얻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죽은 남자 집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두 아이는 희영의 몫인 것이다. 평생의 짐으로 남더라도. 그래서 호적에도 희영의 성인 한씨로 올렸다. 한희망, 한소망. 이 두 아이의 존재는 남자 집에서는 모른다.
희영은 그동안 접근한 남자도 많았고, 소개시켜 준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미소로. 마음에 드는 남자도 있었지만, 두 아이의 존재를 안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 모두 포기했다. 그러고 나서 오직 일만 한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이고.
기분 좋은 날, 떠버리 친구의 입방정이 무드를 살짝 깨고, 거기에다 옛 추억들이 우울하게 만든다.
2
희영은 호텔 주차장에서 대리운전을 불러 자신의 오피스텔로 갔다. 그곳은 작은 공간이지만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25층이어서 바깥 내다보는 재미가 좋았다. 특히 밤 풍경은 영화 그 자체다. 주변 건물들에서 나오는 찬란한 불빛들, 널따란 숲 공간에 난 산책로를 따라 빛을 발하는 가로등들, 호수공원 옆 도로의 보안등 불빛에 반사되어 흔들리는 호수의 물결들, 신호등에 걸려 늘어선 차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헤드라이트 조명 쇼, 그리고 30층이 넘는 빌딩 위의 전광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현란한 빛의 파노라마…….
처음에는 그런 광경들이 신기했고, 그 다음에는 시들했으며, 더 지나자 지겨워지기도 했지만, 그 시기도 지나니까 오히려 정답고, 또 거기에서 더 나아가자 이제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희영은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의 환상을 즐겼다. 빛의 환상. 희영은 무엇인가 잊고 싶을 때는 한밤중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 장면들은 그 어떤 화려한 쇼보다도 더 환상적이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현란한 한밤의 무대.
그러나 그 유희를 감상하는 끝 순서는 늘 눈물이었다.
희영은 그 눈물도 화려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그 눈물에 밤의 빛들이 반사되어 화려한 슬픔을 보여줄 테니.
희영은 오늘밤은 즐기자고 생각했으나 틀렸다. 그래도 눈물만 흘리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 눈물이 이 밤의 피날레를 망치고 만 것이다.
희영은 약간의 술기운이 있었는데도 새벽 3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