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이야기
3
희영은 아침 일찍 시골로 내려갔다. 회사에는 일단 이메일과 카톡으로 이틀간의 휴가신청을 보냈고, 출근시간 가까워 오면 또다시 전화를 할 생각이다. 승진 다음날 휴가를 간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희영은 한 가지를 꼭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모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희영의 집은 경상남도 하동. 군청에서 조금 내려간 신기리 근방. 원래는 포항에서 십 몇 대째 내려오는 집안인데 희영이 초등학교 때 그곳으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군청 근처에서 장사한다고 옷가게를 했었는데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고리타분하고 고집 센 성격이라 장사에 안 맞아 손해를 많이 보고 지금 사시는 곳으로 이사했다. 그 뒤 농사도 조금 짓고, 집에서는 가내수공업 비슷한 것을 해서 사는 데는 문제없었다. 그 집에서 두 오빠와 희영 모두 대학 보내고, 오빠들은 둘 다 부산과 마산에서 그런대로 모두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빠들 모두 자식이 없다. 올케나 오빠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두 오빠가 작정하고 자식을 안 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둘 다 그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삼남매가 서로 연락도 별로 하지 않고, 특히 오빠들은 부모님 집은 거의 찾지 않는다. 해외로 여행은 자주 다니는 것 같은데. 다만 희영만은 두 아들 맡겨둔 탓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전화를 한다. 돈 보내고 나서 그 다음 날.
“어제 통장으로 들어갔을 거예요. 확인해 보세요.”
“그래, 알았다. 몸은 괜찮니? 힘들진 않아?”
그 말을 들으면 희영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늘 그 말만 하시는 어머니. 다른 말도 많을 텐데 항상 똑같은 말을 물어본다. 그렇지만 그 말 말고 달리 하실 말이 무어가 있겠는가. 장애인 두 아들 맡겨놓고 혼자 서울 가서 사는 딸에게 타박을 하겠는가, 살림살이가 어떤지 물어보길 하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썩어 들어갈 가슴 안고 살아갈 딸한테.
사실 근년에 부모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 두 분 모두 원체가 건강 체질이라서 그동안 잔병 없이 지냈지만 일흔이 넘어서면서 점점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특히 두 아이 돌보는 일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끔 내쉬는 한숨에 그러한 내색이 묻어나온다. 하긴 벌써 15년간 시달렸다. 이제는 손 놓고 싶으실 거다. 늘 딸 불쌍하다고 한숨 쉬는 아버지, 성격 벼락같은 늙은 남편 옆에서 숨도 못 쉬고 장애인 손자들 뒤치다꺼리 하는 늙으신 어머니. 두 분은 손자들을 맡으면서 외부 사람들하고 교제도 거의 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밖에 나가봤자 사람들이 자기들 편하자고 한마디씩 하는 말이 더 가슴을 찌를 테니까.
“밖에도 나가 마실도 다니고 그러세요. 필요하면 돌보미도 부르시고요. 돈 걱정 하지 마세요.”
“얘는……. 네가 보내주는 돈 넉넉해. 네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면 다 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런데 아버지가 몸살을 내는 바람에…….”
“네? 몸살이 나셨어요?”
“얘는……. 그런 게 아니고…….”
어머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부모님이 말은 안 해도 그 심정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연세도 점점 드시니 힘이 부칠 것이다. 주변 사람들하고 담 쌓고 사신 것도 꽤 오래 되었으니 그 답답한 마음 어디 가서 풀 수 있을 것인가.
희영은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을 이번에 실행하자고 갑자기 마음을 먹게 되었다. 어젯밤 거의 뜬눈으로 보내면서. 오늘,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세상, 더 넓고 큰 세계로 나가려면 이제는 털어낼 것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오늘이 아니면 또다시 결단하기 쉽지 않다.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이번에 끝내자.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4
희영은 부모님 집에 들른 뒤 오후 느지막이 늘봉산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면 표지석에 268.9m라고 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250m로 나온다. 18.9m의 차이. 1,890cm. 키 190cm 사람 10명 높이가 다른 것이다.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면 엄청난 높이 같기도 하고, 지구 기준으로 하면 무시할 만한 것 같기도 한 차이. 하긴, 아무려면 어떠냐.
희영은 늘봉산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다보았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인다. 늘봉산 앞의 강폭이 가장 넓은 것 같다. 철교와 섬진강대교 사이가 특히 그러했다. 한강이나 남해안 바다에 비하랴마는 희영에게는 어렸을 때 그곳의 강이 마치 태평양 같았었다. 당시 젊은 애들은 그 강을 건너가는 내기를 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위험한 일이 여러 번 생겨서 한때는 주변에서 수영 못 하게 막기도 했었다. 희영은 세계 여러 나라에 여행도 가고 출장도 갔었는데, 유명하다는 강에 막상 가보면 그 강폭이라는 것이 집 앞 섬진강 정도에도 못 미치는 곳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런 강들을 소재로 수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시와 노래와 소설, 연극, 뮤지컬, 영화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럴진대 섬진강이 그에 비해 부족한 것이 무어 있으랴 싶다. 물론 섬진강을 소재로 해서 여러 문화적 산물들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희영은 자신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그 강이 좀더 세상에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었다. 섬진강 주변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강 건너 전라도 쪽으로는 가까이에는 무동산, 그 뒤로는 불암산이 느긋한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뒤편 동쪽으로는 등산로를 통해 늘봉산 위쪽으로 연달아 달려 올라가는 여러 산이 등산코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마을 곳곳에는 능소화가 소담하게 피어 있고, 담쟁이덩굴이 어지러이 감고 올라간 고택의 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화개장터는 섬진강을 따라 구례 방면으로 한참 위로 올라가서 경상남도 쪽 강변에 있다.
희영은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을 대양처럼 여기고서 깊은 숨을 들이쉬고 한참 만에 내뱉었다. 이 산꼭대기는 수십 번도 더 와봤지만 타지로 떠나고 나서는 좀체 올라와 보지 않았었다. 그런 탓에 희영의 머릿속에는 30여 년 전의 모습만 남아 있었는데, 막상 오늘 올라와 보니 옛 기억에서 그리 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희영은 늘봉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잠시 내려가 기억을 더듬으며 여학생 시절에 가끔 찾아가곤 했었던 야트막한 절벽 쪽으로 가보았다. 등산로가 여러 곳에 나 있었는데 그 절벽 쪽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컴컴할 뿐 사람의 발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으며 나무들 사이로 난 풀밭 우거진 곳들을 조심스럽게 밟고 들어가 보니 옛 길의 흔적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는 곳이 나온다.
아, 바로 이곳이다. 남동쪽으로 향한 약간 널찍한 풀밭. 오랫동안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인간이 만든 쓰레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풀들이 그렇게 어지러이 돋아나 있지도 않고 마치 고랭지대처럼 낮은 키의 풀들만 가지런히 자라 있는 것이었다. 이런 곳에 널따란 캠핑 돗자리 펴놓고 앉아서 먼 산 바라보면 한 편의 영화가 된다. 게다가 그 바로 앞은 제법 깊은 낭떠러지로 곧장 연결되어 있어서 시야가 탁 트여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이었다. 저 멀리 하늘에는 조각구름 서너 개가 한가로이 떠 있다. 그 구름 따라 날갯짓하고 떠나면 남해안 푸른 바다가 나올 테지.
희영은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실바람이 약하게 불어와 옆으로 쓸어넘긴 머리카락을 살짝 들추며 지나간다. 여학교 때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희영은 이곳에 와서 하늘 보고 구름 보면서 미래를 꿈꾸곤 했었다. 그 뒤 거짓말처럼 훌쩍 지나가 버린 30여 년의 세월. 그런데 오늘 이곳에 다시 와보니 그 30년이 그저 한 순간일 뿐이었다. 바로 어제 왔다가 다시 온 느낌이었던 것이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어도 그러나 그 비밀의 풀밭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타임머신 타고 돌아온 것처럼. 희영은 눈물이 날 정도로 자신의 과거가 반가웠다. 가슴이 아리기까지 했다.
“넌 무엇이 될 거니?”
“아무것.”
“그게 무슨 대답이야? 아무것이나 된다는 거니,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거니?”
“둘 다.”
“넌 욕심이 너무 많다. 둘 다는 안 돼. 하나만 골라.”
“싫은데.”
“욕심이 과하면 탈난다는 거 알지?”
“탈날 거야. 난 탈이 좀 나고 싶어. 아니, 탈나도 괜찮아.”
“그게 무슨 말?”
“탈이니까.”
“탈이 뭔데?”
“가면, 사고, 자유.”
“무슨 소리야?”
“사전에 그렇게 나와.”
“…….”
“탈. 머리에 쓰는 거. 호랑이탈. 탈. 사고나 나쁜 일이 생기는 거. 탈이 나다. 탈. 벗어날 탈(脫). 탈출.”
“그중에서 하나만 골라라. 욕심 많으면 두 번째 탈이 난다.”
“좋아. 하나만 고를게.”
“그게 뭔데?”
희영은 여고 때 이곳에 와서 자신과 대화하면서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런 뒤 지금껏 그 질문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오늘 생각이 난 것이다. 갑자기.
그래, 이제는 대답할 때가 되었다. 오늘 여기에서. 이 장소에서.
희영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
누구야?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언제 온 거지?
“방금 왔어요.”
“…….”
이상한 애네. 옷도 좀 이상하고. 어디에서 온 거야?
“하늘에서 왔어요.”
희영은 눈썹을 찌그러뜨렸다. 무슨 소리야? 이상한 애가 왔네.
“예, 저 좀 이상하긴 해요.”
어머……. 얘가 내 생각을 아네?
“네, 알아요. 다 알아요.”
뭐를 아는데?
“아줌마의 슬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그런데 얘가 내 생각을 어떻게 알지?
“하늘에서 왔거든요. 그래서 알아요.”
“너 집이 어디니? 누구 같이 온 사람 있니?”
“우리 집은 하늘에 있고요, 저는 혼자 왔어요.”
“여기를 어떻게 알고?”
“저는 다 알아요.”
“뭐를 아는데?”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을.”
“뭐라고?”
희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너희 집이 하늘이야?”
“네, 맞아요. 저 위.”
소년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희영도 따라서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저만치에서 보였던 조각구름이 어느 샌가 하늘 한가운데로 옮겨왔다.
희영은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좀 이상한 애구나. 그런데 이 근처를 잘 아는 모양이다. 웬만해서는 찾아오기 힘든 곳인데,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네, 맞아요. 여기는 아무도 몰라요.”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저는 다 안다고 했잖아요.”
어머, 얘가 내 생각을 다 읽고 있잖아. 어떻게 된 거지?
“저는 하, 늘, 에, 서, 왔고요. 그래서 다, 알, 아, 요. 아줌마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갈등하고 그러는 것까지.”
희영은 멍한 눈길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뿐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 다시 올게요. 여기로.”
소년은 한번 빙긋 웃더니 돌아서서 걸어간다. 희영이 들어왔던 풀숲 길로. 그런데 어딘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라 숲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잘못 봤나……?
5
희영은 자신이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거의 자지 못했는데도 오늘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 새벽에 이곳까지 운전하며 내려올 때도 조금도 졸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역시 마찬가지고. 그리고 낮에 산에 다녀온 일 외에는 이것저것 두 아이 돌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하는 것이라서 약간 서툴긴 했지만 그런대로 감당할 만했다. 희영은 이 일 말고도 집 안 여기저기를 돌며 살림살이도 살펴보고 나름대로는 신경 써서 부모님 말벗도 해드리고 그랬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약간 긴장도 되고 해서 이런 일들이 사실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밤에 자리에 누웠을 때 눈은 말똥말똥하고 머릿속은 서리가 내린 듯 싸아하면서도 한겨울 강에 언 얼음 위처럼 한기가 쏴악 스쳐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은 감을 수가 없었다. 두 눈을 뜬 채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며 희영은 거의 온 밤을 새웠다. 그러나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잠을 자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상태로 아침을 맞은 것이다.
희영은 두 아이와 같은 방에서 잤다. 아이들은 밤에는 잘 잔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새벽에 일어나 희끄무레한 빛 속에서 희영은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둘이 쌍둥이이기 때문에 둘 다 나이는 15살이다. 중학교 3학년 나이. 그러나 체격은 일곱 살 정도밖에 안 된다. 그나마 머리가 커서 그렇지 몸만 따지만 서너 살밖에 안 되어 보인다. 병원에서는 의학적으로도 아주 특이한 경우라고 한다. 희영은 두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메어졌다. 여느 애들 같으면 엄청 뛰어놀 나이였다. 공부도 물론 열심히 해야겠지만, 사내아이들 그 나이에 무엇인들 못하랴. BTS를 비롯한 가수들의 노래라는 노래는 다 따라 부를 것이고, 늘 공을 발로 차고 배트로 치고 경기장에도 쫓아다니며 소리소리 지르며 응원할 텐데. 가수나 영화배우, 탤런트, 운동선수 사진도 잔뜩 모아놓고 붙여놓고 낙서해 놓고 할 테지. 학원에도 다니며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고생도 감당해야 할 것이고, 열다섯 소년들답게 여드름이 날지도 모르고, 예쁜 여자애들 때문에 애를 태우고 연애편지 써서 어떻게 보낼까 밤새 고민할지도 모르지. 그것도 자라면서 겪는 아픔이요 아름다운 꿈인데.
희영은 이제는 아이들 바라볼 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만큼 익숙해진 걸까? 그렇겠지. 그리고 마음이 아픈 것도 이제는 지났다. 그냥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 뿐. 이 세상에 저렇게 왔다가 저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누워만 있다가 간다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만 들 뿐이다. 정말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것도 삶일까? 두 아이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혼자서 뒤채지도 못하고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다. 그저 하루 종일 눈 뜬 채 허공만 바라볼 뿐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튜브가 있어야 가능하고, 대소변은 기저귀에 해결한다. 말은 물론 못하고, 가끔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낼 뿐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신음의 의미를 다 아는 것 같다. 신음 때마다 각기 다르게 다뤄주니까.
저 아이들이 꿈은 꿀까? 주변에서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까? 사랑을 베풀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야단을 치면 마음이 슬퍼질까? 부모,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와 남을 구별할까?
생각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알까?
그렇다면 비관을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마음이 아주 슬프겠지. 처참하겠지. 그것은 별로 안 좋다.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렇지만 생각이 있더라도 꼭 일반인들과 같은 그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삶 속에서, 자신들의 인지 속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과 생명을 누릴지도 모르지. 개미가 그러하고, 지렁이가 그러하듯이. 구더기도 그렇고, 날파리 하루살이도 그러할 테니.
희망아, 소망아, 너희들은 어떤 세계 속에서 사니? 그곳에도 엄마가 있니? 아니야, 엄마는 없어도 좋아. 그렇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있어야 해. 너희들 부모는 내가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니까. 나는 나쁜 엄마란다. 엄마도 아니지 뭐. 그냥 너희들을 낳았을 뿐이다. 기계처럼. 너희들을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 할아버지란다. 그 두 분이 너희들 부모야.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 엄마는 그분들 생명을 너희들에게 운반만 해주었단다. 아무것도 아니지. 그냥 배달꾼일 뿐이야.
나는, 엄마는…….
희영은 갑자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고. 그냥 저도 모르게 그랬을 뿐이다. 슬펐을까? 희영은 마음속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닐 거야. 그보다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부끄러워서.
희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여명이 창문의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방 안에서.
6
희영은 아이들을 정성껏 씻겨주었다. 머리만 컸지 사실상 자그마한 몸집. 두 아이가 얼굴 모습은 물론 팔다리나 몸통까지 아주 똑같았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7분 먼저 태어난 희망의 왼쪽 어깨에 희미하게 얼룩 같은 점이 나 있을 뿐. 그 덕분에 두 아이의 구분이 쉬워진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표정의 변화나 얼굴의 특징도 없고 이름을 부르거나 다른 자극을 주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두 아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구분한다 해도 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어차피 둘 다 누워서 가만히 있기 때문에. 마치 쌍둥이 인형이나 마찬가지이다.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오줌똥 싸는 것만 빼놓고는. 그래도 때 맞춰서 예방주사 다 맞혀야 하고, 나라에서는 취학 통지서까지 보내준다. 고맙게도. 눈물 날 정도로 고맙게도.
희영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때 희망과 소망이라는 희망과 소망을 담아 희망과 소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사전과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희망(希望)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기대감이나 바람, 또는 좋은 일을 기대하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 한다.
소망(所望)은 어떤 일을 바라는 것이라 하고.
희영은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둘 다 똑같은 것 아닐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두 가지의 미세한 차이에 대해 거창하게 나열해 놓았다. 그러나 말장난 같아서 별 가치 없게 여겨 희영은 무시해 버렸다. 그보다는 희망이나 소망에 대한 명언이 몇 가지 있어서 그런 것들만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불행을 고치는 약은 소망뿐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 세르반테스(Cervantes,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시인)
소망과 희망을 가진 이는 이미 미래에 사는 사람 - 피터 섀퍼(Peter Shaffer, 영국의 극작가이자 평론가)
행동은 낮게, 희망은 높게 -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영국의 목사이자 형이상학파 시인)
희망은 가난한 사람들의 빵 - 탈레스(Thales, 그리스 철학자)
희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 - 아베 피에르(Abbé Pierre, 프랑스의 신부이자 정치가)
희망이 없으면 노력도 없다 - 새뮤얼 존슨 (Samuel Johnson,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수필가)
희망과 소망은 이처럼 훌륭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과 소망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그와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인가? 내 아이 한희망과 한소망에게도.
희영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희망고문.
그 말이 맞다. 희망과 소망은 없이 고문만 가하는 것. 명목뿐인 소망이요 희망만 있는 것.
희영은 두 아이 희망과 소망을 한꺼번에 뉘어서 실을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큼직한 쌍둥이 전동차에 싣고 산으로 올라갔다. 늘봉산으로. 산 아래에서부터 등산로가 잘 닦여져 있어서 약간 힘들기는 했지만 충분히 올라갈 만했다. 비탈이 좀 급한 곳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희영이 가려고 하는 곳은 그리 높지 않다. 조금만 고생하면 갈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참 열심히도 희영을 도와주었다. 마치 자기 일처럼. 자신들의 아이들인 양.
고마웠다. 너무도 고마웠다. 정말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시민 여러분, 하동 마을사람들, 감사합니다. 희영은 고개를 숙였다. 직접 숙이기도 하고, 마음으로 숙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아이에게 미소를 보낸다.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한다.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희영에게도 미소를 보냈다. 희망을 가지라는 뜻이겠지. 응원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고. 그러나 혹여 그 속에 동정이 담겨 있다면 거부하리라. 만일 안 받겠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돌려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이나 눈에는 그런 징조나 표시가 없었다. 모두들 순수한 마음으로 축복을 나누어 주고 지나가는 것이다. 고마운 분들.
희영은 어제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뺨으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눈앞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눈가에 고인 것은 맞다.
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린 것은 아주 오래 전에 끝났다. 그런데 이제는 남들이 고마워 눈물을 보인 것이다. 아이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불쌍하게 여겨주어서.
이것은 반칙이다. 정당하지 않다. 어미는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데, 남들이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안 된다.
희영은 그 다음부터는 가능한 한 남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아이들의 전동차를 붙잡고 올라갔다.
힘은 들었지만, 희영은 어제 갔었던 그 풀밭까지 무사히 쌍둥이 전동차를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