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의 마지막 글귀 (1)

60대 이야기

by Rudolf

60대 이야기

유서의 마지막 글귀


1


김언출 회장은 요즘 너무 분해서 잠도 제대로 오지 않는다. 10년 이상 자기 수족처럼 놀리던 총무라는 인간이 배신을 한 것이다. 고등학교 35회 동창회에서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가깝고 주위에서 쌍둥이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완벽할 정도로 일치했었다. 게다가 총무가 젊었을 때 잠깐 실수를 해서 교도소에 다녀온 이후 일이 잘 안 풀려 생활이 무척 어려웠을 때 김 회장이 글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이었고, 둘 다 운동을 좋아해서 축구, 야구, 족구, 배구 등에서 늘 한 편이 되어 호흡을 맞췄다. 대학 졸업하고는 서로 길이 달랐으나, 그 친구가 교도소 다녀온 뒤 제일 먼저 달려간 이가 바로 김 회장이었다. 그리고 나서도 김 회장은 그 친구 자녀들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해서 남들 눈에 안 띄게 많은 면에서 도와주었다. 그러나 최근에 사정이 역전되었다. 김 회장은 하던 사업을 계속 붙들고 있기 힘들어 남에게 인계한 뒤 여러 가지로 입지가 쪼그라든 반면, 그 친구는 조부 때부터 내려오던 산비탈의 조그만 땅이 최근 재개발되면서 그곳에 그럴듯한 빌딩을 하나 짓고 나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김 회장은 그동안 동창회와 고등학교에 여러 형태로 기부를 많이 해서 지난 10년간 줄곧 동창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또한 그때부터 그 친구 강영철을 총무로 임명해서 함께 호흡을 맞춰왔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일은 강영철이 다 해오고, 김 회장은 뒤에서 무게만 잡고 있었으나 그 대신 찬조금은 넉넉히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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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놈 강영철이 요즈음 돈깨나 만지더니, 쉽게 말해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화를 해도 잘 안 받고, 회의에서 김 회장이 무슨 말을 하면 꼭 토를 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나이 일흔을 다 바라보고 손자들까지 있는 마당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 허허 웃으며 그냥 넘어가 주었는데,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지난번 모임 때는 아예 대놓고 망신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씨×, 회장 오래 하더니 사람 ×같이 보고 있네.”

그 말에 김 회장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이들이 모두 아연실색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아서 못 해먹겠다.”

강영철이 이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나서는 의자를 발로 뻥 차고는 나가버린 것이다. 아주 하찮은 일 가지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평소 사람 좋기로 이름난 김 회장도 얼굴이 벌게져서 노려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뿐, 그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는 참석한 친구들이 모두 무안해서 한두 마디 할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강영철에게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어, 쟤 왜 저래?”

“어디 아픈가?”

“아유, 나이들 들어서 왜들 그려?”

“그러다 말겠지.”

“회장이 한잔 사면서 타이르지 그래?”

“둘이 아주 가까웠잖아?”

“저도 이젠 먹고 살 만해졌다는 뜻이야.”

“오늘 모임 날 샜군. 어디 가서 한잔하지.”

“골프나 치러 가세.”

그날 김 회장은 친구들을 따라 밖에 나가 여기저기 다녔지만 마음은 처참했다. 평소대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지만, 마음속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저녁에 집에 와서도 김 회장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침대에 벌렁 누워 있었다. 20년 전에 아내가 암으로 죽고 나서 10년 후에 새로 들인 둘째 부인인 민 여사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여러 번 물었어도 김 회장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누운 채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게다가 눈을 감았다가도 마음이 편치 못해 금방 다시 뜨는 것이었다.

“일어나슈.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속 풀고 어여 나와요.”

민 여사가 또다시 방문을 열고 얼굴만 삐죽 들이밀고 한마디 한다. 민 여사는 원래가 동안인 데다 피부관리와 운동을 열심히 하는 덕에 아무리 봐도 60이 넘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50대 중반? 게다가 성격도 깔끔하고 사분사분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호감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은 매우 걸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김 회장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남들은 오히려 그것이 매력이라고 하지만. 특히 부회장인 송경식이.

어떻든 김 회장은 요즘 부쩍 민 여사가 눈에 거슬린다. 그런 데다가 강영철까지 속을 긁어놓으니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김 회장은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은 덕분에 호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지금 침대 한가운데 누워 있어서 손에 닿는 것이 없기에 망정이지 무엇이든지 손에 잡혔다면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을 것이다. 딱히 강영철 한 사람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 좋게 살아오느라 억눌렀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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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보통 키보다 약간 큰 정도인데도 사람들은 꽤 큰 거구로 본다. 살집이 약간 있지만 비만까지는 가지 않고 풍채가 좋다고 표현할 정도다. 게다가 부처상이라고 부를 정도로 얼굴이 길고 호인상인 데다가 코도 길고 인중도 길어 전체적인 풍모가 넉넉하면서도 커 보이는 것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길고 상체와 얼굴이 작은 것을 선호하지만, 조선조 말 근대까지만 해도 상체가 크고 허리와 팔이 긴 것을 선비와 같다고 하며 선호했었다. 삼국지의 유비는 팔이 땅에 닿을 정도였다고 하며, 이와 같이 옛날에는 상장하단(上長下短)을 귀인상이라고 본 것이다. 한마디로 숏다리가 좋았다는 뜻이다. 김 회장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을 적당히 갖춘 데다가 재산이나 자녀가 모두가 남들 보기에 부러울 정도였고, 김 회장 또한 그것을 적당히 누리고 있었던 덕에 남들에게는 커 보였던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단체사진 찍은 것을 보면 다른 사람보다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죄다 한마디씩 한다.

“김 회장이 생각보다 키가 작아.”

“늙어서 그렇지. 나이 들면 쪼그라든다잖아.”

“아, 김 회장만 늙나? 우리 다 늙지.”

“마음속에 있는 것 죄다 퍼주다 보니 사람이 작아진 거야. 그리 알면 되지 웬 타박이 그렇게들 많아.”

“그냥 한번 말해 봤어.”

“어여 가세. 한잔하러.”

“술 좀 작작 해. 속도 안 좋다면서 맨날 술타령이야.”

“답답해서 그려.”

“저만 답답하나? 우리는 뭐 재미 좋아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저 친구 맨날 술 먹을 거리만 찾느라고 그래. 신경 끄셔.”

“참, 내일 국경일 아녀?”

“늙은 나이에 국경일이라고 어디 갈 일 있남?”

“늙을수록 젊게 살아야 하는겨.”

“아이고, 아프지나 말지, 젊게 살긴 뭐…….”

“참, 요즘 국경일에 태극기 단 집 별로 안 보이던데…….”

“저 김 회장 집 하나뿐일걸.”

“김 회장은 자기 아파트뿐만 아니라 자기 애들한테도 태극기 달라고 난리를 치는 양반이야. 국경일에 아이들한테 태극기 단 것을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라고 한대요.”

“그게 애국일세.”

“밥 잘 먹고, 술 잘 먹어주는 것도 애국이야. 가세, 한잔하러.”

“난 안 가. 교회 나가기 시작해서.”

“에이그, 쯧쯧…….”

김 회장은 동창회 모임이 끝나고 나오면서 한마디씩 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모른 척했었다.

아, 이야기가 좀 빗나갔다. 김 회장이 사람 좋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키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으로 흘러 결국 태극기 이야기까지 오고 말았다. 어떻든 김 회장은 그렇게 살아왔는데, 오늘은 그런 것 모두가 영 마뜩잖은 것이다. 괜히 부아만 나고.

그게 다 그 강영철 때문이라고 김 회장은 입속에서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속은 더 바글바글 끓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김 회장의 모습을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때 핸드폰이 울린다.

김 회장이 화면을 보니 부회장 송경식이다. 지금 상태로서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지만, 아까 헤어지면서 다음 달 라이온스클럽과 연합해서 하는 행사 이야기를 하다 말고 집에 온 것이 생각나서 할 수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부회장.”

“그래, 나일세. 저녁 먹었나?”

“뭐 그냥…….”

“아까 얘기하려다 말았는데, 영철이 그 자식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뭐 그냥…….”

“뭐 뭐 하지 말고 얘기해 봐. 뭔 일 있었냐고?”

“뭔 일은 뭐……. 그냥…….”

“하, 답답해. 아무튼 지금 내가 회장 집에 갈 테니까 기다려. 어디 나갈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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