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의 마지막 글귀 (2)

60대 이야기

by Rud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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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출 회장은 부회장 송경식을 통해서 총무 강영철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종합하면 강영철은 동창회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가서도 난장판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요즘 아주 많이 살판났다고 한다. 하긴 그동안 힘들게 살아오다가 갑자기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지금껏 억눌러 왔던 것 다 쏟아져 나오는 것이겠지. 그러니, 부회장 말로는, 김 회장이 속이 쓰리더라도 참아주라는 것이었다. 제 놈도 사람이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닫게 되고, 그러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참 고마웠다. 사람 어려울 때 다독여 주고 힘을 내게 해주는 것이 친구가 아니고 무엇이랴. 역시 죽마고우라고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친구가 제일이다.

김 회장은 술을 전혀 못 하는 체질이어서 포도주 냄새만 맡아도 취하기에 술은 입에도 대지 않지만, 사업도 하고 각종 모임에도 많이 나가기 때문에 고급술 선물을 많이 받는다. 그런 것들을 집에 가져오면 민 여사가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필요할 때 여기저기에 선물하곤 한다. 자기 혼자 홀짝홀짝 마시기도 하고.

부회장이 근 세 시간에 걸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앉아 있다가 일어서자 민 여사가 그때까지 마신 양주병하고 또 다른 고급술 한 병을 가져와서 튼튼한 쇼핑백에 넣어서 부회장 손에 쥐어준다.

“어이구, 나 혼자 술 마시느라 민폐 끼쳐드렸는데 선물까지 받아 갑니다. 이것 참 미안해서…….”

“아녜요. 우린 이런 거 들어와도 마실 사람이 없어서 그냥 쌓여 있어요. 애들도 회장님 닮아서 술 하고는 담을 쌓아서 가져갈 사람도 없고요. 종종 오셔서 이거 마시고 가져가시고 그러세요. 호호호.”

“어이구, 이거 나만 횡재했네 그려.”

하하 호호 화기애애하게 부회장은 떠났다. 그 사람은 대학교수인데 몇 년 전에 정년퇴직했다. 성격이 호방하고 사람 가리지 않는 데다가 교수라면서 어깨에 힘주지 않고 동창들하고 잘 어울리는 바람에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얻고 있다. 한 가지 흠이라면 툭 하면 강의하듯이 떠벌이는 바람에 남들 지겨워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 정도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법. 그것이야 어떻든 부회장, 즉 송경식 교수는 거나하게 취한 채 양주 두 병을 가지고 기분 좋게 떠났다.

밤 11시가 넘었다. 부회장은 같은 아파트 단지 저쪽 끝에 살기 때문에 느긋하게 휘파람도 불고 하면서 천천히 걸어갈 것이다. 워낙에 성격 좋은 사람이라. 한 가지 흠이라면 몇 년 전에 부인을 잃은 뒤 술을 자주 찾아 가끔 실수를 하는 것인데, 오늘은 아무런 탈 없이 잘 돌아갔다. 주사가 좀 심한 편이긴 했는데.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서 배웅하고 돌아온 민 여사는 피곤하다며, 김 회장에게 빨리 들어와 자라는 말을 하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너른 거실에 혼자만 남은 김 회장은 마음이 헛헛해졌다. 기분이 묘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런대로 사회활동 활발히 하며 외지지 않게 살고 있었지만, 오늘 밤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지나고 나서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은 채 덩그러니 남은 성탄 트리의 그 화려한 장식이 오히려 쓸쓸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상해 혼자 침대에 누워 속을 끓이고 있을 때 친구가 찾아와 주어 고마웠다. 강영철 흉에서부터 다른 친구들 주욱 훑으며 험담도 좀 섞어가며 떠벌인 끝에 상한 마음이 많이 풀렸던 것이다.

김 회장은 거실 한복판에 서 있다가 소파로 가서 앉았다. 친구 술 마실 때 옆에 앉아서 민 여사가 준비해서 가져다준 안주를 잔뜩 집어먹었던 탓에 속이 좀 거북했다.

김 회장은 문득 동창회도 이젠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다음 달에 총회를 열어야 하는데, 이 기회에 그 자리 내려놔야 하는 거 아닐까……? 그동안 근 20년 이상 동창회에 매달렸다. 그중 회장만 10년을 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동기생 550명 중 15퍼센트 정도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전에도 경찰생활 오래 하고 은퇴한 친구 부고 소식을 듣고 화환 보내고 문상까지 다녀왔다. 해가 갈수록 특히 동창들 장례에 가는 빈도가 많아졌다. 김 회장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리더에 속한 편이었다. 특히 유도부에서 왕초 노릇을 많이 했다. 대회에 나가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리더 역할을 한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고등학교를 4년간 다녔지만.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특히 동창들과는 꽤 많이 어울렸고, 동창회를 만들 때도 주도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학교 때 학생회장을 지낸 친구가 처음부터 근 10년간 회장을 하다가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김 회장이 물려받다시피 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많은 일을 했다. 김 회장은 자신이 주도해서 한 여러 일들을 주욱 회상하며 하나하나 음미해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듯하지만 당시만 해도 파격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그런 일들. 김 회장은 그 10년의 기간이 마치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100세 노인이 되어 과거를 반추하는 듯한 기분. 아쉬웠던 것, 좀 부끄럽기조차 한 일들도 많았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일들을 통해서 동창회를 크게 만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김 회장은 그것 하나만은 자부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 다 내려놔야겠다. 그동안 여기저기 단체에서 들어오라고 수많은 제의를 받았지만 그런 곳 어느 한 군데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동창회만 매달렸다. 그리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그 일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영철이 그 자식 한번 회장 시켜보면 어때? 요즘 돈 쓸 데 없어서 몸살을 앓는 모양인데, 회장 하면서 돈자랑 하라고 해보는 거야.”

부회장이 한 말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혹 그것이 김 회장에게 회장 내려놓으라는 암시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런 다음, 사람이라는 종자가 그렇고 그런 것이라서 그런지, 갑자기 그 생각이 다른 쪽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혹시 부회장이 자기가 회장 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 김 회장이 회장 자리 내려놓으면 부회장이 회장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 요즘 고약한 말만 하고 다니는 총무를 누가 회장이 되도록 밀어주겠는가? 다음 달에 총회가 있는 것을 알고 강영철 핑계로 일부러 찾아와서 김 회장 의중을 슬쩍 떠보려 한 것은 아닐까?

그것 참…….

방금 전만 해도 회장 자리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이제는 어딘지 서운한 마음이 든다.

허 참…….

이래저래 이젠 내려놓을 때가 됐어. 10년 동안 회장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니,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할 거야. 앞에서야 대놓고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어딘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웬일이냔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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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언출은 회장에서 물러났지만, 그 대신 증경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아냐. 회장에서 물러나면 곧바로 증경회장이 되는 게 아니란 말야. 일단 직전회장이라고 부른 뒤, 그 다음 총회에 다른 사람이 새로운 회장이 되면 그때 가서야 증경회장이 되는 거야.”

매사에 원칙을 들이대며 나대기 좋아하는 승언이 한마디 했다. 어째 그날은 조용하다 싶었는데, 그러면 그렇지 안 나설 리 없었다.

“아이고야, 그런 원칙 필요 없다. 김 회장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수고했냐? 증경회장이 아니라 명예회장, 평생회장 이런 거 다 가져가도 된다. 불만 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매번 승언과 맞서는 동식이 이번에도 잊지 않고 나선다. 승언과 동식은 늘 아웅다웅 못 잡아먹어 난리다. 그런데도 또 개인적으로는 무척 가까운 모양이다. 세상일 알고도 모른다는 말이 바로 그 두 친구를 두고 하는 말 같을 정도다. 아무튼 그 둘의 관계는 세계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어떻든 두 사람 말싸움과는 상관없이 김언출은 증경회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증경(曾經). 한자로 보면 일찍 증(曾)에다 날실 경(經)이다. 경에는 날실 말고도 세로, 도로, 조리(條理) 등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어쨌든 ‘증경’이라는 말이 들어가니까 엄청 오래된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 하긴 일흔이 내일모레인데 그런 말 들어도 괜찮지.

이렇게 해서 증경회장, 한마디로 말해서 김언출은 별 볼 일 없는 뒷방 영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새 회장은 부회장이던 송경식이 되었다. 모두 다 순조롭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언출 회장은 역시 그대로 김 회장이었다. 그동안 하던 사업을 몇 년 전에 정리했는데, 그 당시 그 사업을 인계한 사장이 김언출 회장의 이름이 당분간이라도 계속 남아 있어야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명목상 회장이라는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 회장은 여전히 김 회장이 된 것이다.

그날 밤 김 회장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새로이 회장이 된 송경식이 한잔 산다고 해서 모두 우르르 몰려갔는데, 김 회장이 술 못 마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 회장이 강제로 밀어붙여서 소주잔으로 딱 반 잔 마신 뒤에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실려왔다. 그리고 뱃속에 든 거 다 토한 뒤에 드러누웠다가 두 시간 정도 잤나, 자정 전에 잠이 깬 뒤 그대로 꼬박 밤을 새운 것이다.

“이 친구 회장에서 물러나면서 분해서 저렇게 된 겁니다. 여사님이 많이 위로해 줘야겠어요.”

김 회장을 집까지 부축해서 데리고 온 신임 회장 송경식이 민 여사에게 이렇게 말하고 둘이서 함께 김 회장을 침대에다 뉘어주었다.

“남자가 술도 한잔하고 그래야지, 생긴 건 멀끔해 가지고 술 반 잔에 이렇게 되면 어떡하누? 사내도 아니라예.”

민 여사가 이렇게 나무란다.

“나 정도 되어야 사내지, 암. 이 친구 죽으면 제상에 올리는 술 한 잔 못 받아먹을 텐데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겠군.”

“그러게 말예요. 겉만 사내지 속은 아녜요.”

송경식이 거실로 나가자 민 여사가 김 회장의 옷을 벗겨주며 이것저것 타박을 한다. 김 회장은 대꾸하고 싶어도 속이 좋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민 여사가 물수건을 가져와서 얼굴과 손발을 닦아주고 나서 이불 덮어주고 나갔다. 밖에서는 민 여사와 송경식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이 얼핏 들리는 듯했다.

그런 소리 어렴풋이 들으면서 김 회장은 잠이 들었다.

김 회장이 잠이 깨어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조금 넘었다. 옆에서는 민 여사가 코를 골며 잔다. 속이 편한 사람이다. 아무 때나 눈 감으면 코부터 곤다. 김 회장은 보기보다는 예민한 구석이 많아서 한번 어떤 생각에 몰두하거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잠에 곯아떨어지곤 한다.

이날도 김 회장은 새벽까지 잠을 못 자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떠오른 생각에 새벽까지 사로잡혀 있었다. 강영철. 그 녀석은 총회에 나왔다가 일찍 일어나서 나갔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 것이 사실은 어제 저녁부터 계속 김 회장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회장 해 처먹으면서 임금 노릇 하더니 이젠 지겨워졌나? 진작에 물려주지 뭐 잘난 것도 없으면서 혼자 독재하더니……. 씨×놈, 잘난 것은 ×도 없으면서 돈 많다고 지랄이나 하고……, 어쩌고저쩌고…….”

못 하는 술 반 잔 마신 것도 사실은 그 녀석 때문에 홧김에 한 것이고, 그 뒤 먹은 것 다 토한 것도 그놈 생각에 분한 마음이 치솟아 속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식 생각 잊어버리려고 억지로 이런저런 일들을 끄집어내어 일부러 곱씹다가 결국엔 또다시 강영철 그놈에게 생각이 향하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룬 것이다.

그 자식…….



3


김 회장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해 약간 멍해진 머리로 차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무작정 간다는 곳이 강영철의 건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강영철 건물 앞에 차를 대고 느긋하게 그놈이 하는 제과점으로 들어갔을 텐데, 이날은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지의 한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서, 또 그 건물로 바로 가지도 않고 멀리 빙 돌아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가서 서서 멀리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그 건물 입구로 연신 드나들고, 제과점으로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린다. 5층짜리 건물이 작기는 하지만 실속이 있는 것 같았고, 제과점도 잘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어깨에 힘주고 다닐 만하지. 그놈 큰딸 대학 들어갈 때 입학금 없다고 비관할 때 김 회장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며 그 다음 날 통장으로 송금해 주었다. 그것 말고도 그 녀석이 가장 힘들 때 다른 친구들은 말로 위로했지만, 김 회장은 늘 돈을 보내주어 해결해 주곤 했었다. 그러면서 남들한테는 단 한 번도 그런 말 꺼낸 적 없었다. 집에서도 물론 몰랐고. 게다가 그때마다 녀석은 김 회장에게 고개를 푹 숙이고 평생 갚겠다고 말하며 울먹였었다. 그러나 늘 김 회장은 없었던 일이니까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그런데도 그놈이 먼저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곤 해서 결국 죄다 알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한번은 강영철이 술에 잔뜩 취한 채 김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행패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었다.

“야, 너 돈 좀 있다고 나 망신주는 거냐?”

“무슨 말 하는 거야? 술 먹었니? 내일 얘기하자. 집에 들어가.”

“야, 이 씨×. 내가 한마디 하겠다는데 꼽냐? 내가 버러지야? 네 꼬붕이야?”

“자, 자, 자, 그만하고 내일 얘기…….”

“×가튼 새끼. 내가 말하겠다잖아. 이 씨×놈아…….”

“알았어. 말해 봐.”

“네가 돈 많은 거 아는데……, 그리고 나 많이 도와준 거 아는데……, 뭐 씨×, 그런 게 대수라고 동네방네 다 소문내고 다니냔 말야. 나 쪽팔리잖아. 안 그래? 나 쪽팔린단 말야. 너는 돈 많아서 돈지랄하지만, 나는 쪽팔린다고! 알았어?”

김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로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이 없었다. 모두 그놈이 얘기하고 다닌 것이지. 그러나 한번은 어떤 친구가 김 회장에게 와서 물은 적이 있었다. 강영철이 자기에게 와서 김 회장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며 김 회장이야말로 진짜 친구라고 말하던데, 그것이 정말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에이, 뭘 그런 거 가지고……. 별거 아냐. 영철이가 힘들어서 조금 도왔을 뿐인데 뭐…….”

이렇게 대답해 준 것이 금방 소문이 나고 말았다. 바로 그 뒤 강영철이 전화를 해서 거친 말을 쏟아낸 것이다.

김 회장은 강영철의 전화를 끊고 나서 기분이 상당히 나빴으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고 했다. 친구에게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도움받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기분 좋을 사람이 없다. 그것을 알기에 그동안 그 사실을 김 회장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다. 한번 보고 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만나는 사이였으니,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저도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민 여사도 모를 정도로.

그랬던 것이 엉뚱하게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며칠 뒤 강영철을 만났을 때 그 녀석은 전화한 일은 다 잊어버렸는지 평소처럼 김 회장을 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 회장도 다행이다 싶어 그 일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김 회장을 그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제 그놈이 자신에게 한 말을 자신도 모르게 곱씹고 있었다.

“10년 동안 회장 해 처먹으면서……, 씨×놈, 잘난 것은 ×도 없으면서…….”

김 회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개새끼…….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자신의 자식들을 떠올렸다. 큰아들은 검사고, 며느리는 변호사다. 둘째 아들은 세무서에 다니고, 며느리는 대학교수. 막내딸은 미국에 가서 공부하다 그곳 백인과 결혼해서 지금 레스토랑을 크게 한다. 그런 뒤 김 회장을 이민 초청하겠다는 것을 말렸다. 한국에서 잘 지내는데 미국 가서 뭘 하겠느냐면서.

지금 김 회장은 아들 둘에게 저놈을 알려서 샅샅이 털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사실은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핸드폰으로 아들 둘한테 전화를 했었다.

“내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한데, 어떤 인간이 있는데 아무래도 수상해서 말야……. 갑자기 어디에서 돈이 뚝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단 말야……. 평소 하는 짓도 좀 수상했고…….”

그 말을 한 뒤 전화를 끊고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뭐 꼭 두 아들한테 어떻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화풀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달리 말하고 있었다.

― 복수하고 싶은 거잖아.

― 이번 기회에 아예 버릇을 고쳐놔.

― 그동안 헛짓 한 거잖아.

― 아주 박살을 내버려.

―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잖아.

김 회장은 입을 꼭 다물고 돌아섰다.

?

어떤 애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남자애가.

이 녀석이…….

어른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괘씸해서 한마디 하려다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즘 애들한테라도 섣불리 야단쳤다가 그 부모에게 망신당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혹 주변에 누군가가 있나 하고 살핀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좀 이상했다. 틀림없이 방금 전까지 김 회장 주변에는 어느 누구도 없었던 것이다. 누가 있었다면 김 회장이 멀리에서이지만 남의 건물과 상점을 노리듯이 바라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김 회장도 그 점을 걱정해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건물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거야 어떻든 김 회장은 이 버릇없는 녀석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너 누구냐?

“소년이에요.”

이 녀석 봐라.

“죄송해요. 제가 버릇없게 보였죠?”

요놈이…….

빨리 집에나 가라.

“저 집 여기에 없어요.”

다른 동네 사는 모양이군.

“집은 어디냐?”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김 회장도 소년을 따라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구름 몇 조각이 떠 있다.

“저 하늘에서 왔어요.”

엉뚱한 대답. 이상한 녀석이네.

김 회장은 아이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몸을 옆으로 돌려서 차 세워놓은 곳으로 가려고 했다.

“내일 다시 올게요.”

소년이라는 놈이 뒤에서 말을 한다.

김 회장은 발걸음을 떼려다 멈췄다. 그리고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소년이라는 아이는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선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좀 이상했다.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소년의 모습 자체가 이상했던 것이 생각났다.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자연스럽지 못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뭔가가 어색했다. 여느 아이들하고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그런 데다 신경을 쓰는 자신이 한심한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그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소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소년이 없었다.

없다……. 사라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길은 하나뿐이다. 골목도 없고, 옛날식의 집이 몇 채 있었지만, 그 집들 사이나 그 집 속으로 들어가서 없어졌을 가능성은 없다.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 애가 마구 뛰어서 갔다 해도 분명히 눈에 띄었을 것이다. 누구 말대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안 된다. 영화도 아니고,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헛것을 봤나……?

아냐, 그랬을 리가 없다. 나이가 60대 후반이지만 그럴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떻든 아이가, 소년이라고 한 애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별일도 다 있군…….

김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차 있는 데로 걸어갔다.



4


김 회장은 영철이 검찰조사나 세무조사 받는 것만으로는 성이 찰 것 같지 않았다. 그놈에 대한 배신감이 극에 달한 것이다. 아무리 김 회장이 사람 좋다 소문났지만 한번 성질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가능하면 그 짓을 김 회장 자신이 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서 그놈이 자기 앞에서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김 회장 자신을 나타낼 수는 없기에 검찰과 세무서를 앞세우고, 더더욱 폭삭 망하게 해주고 싶었다. 꼬투리 잡을 것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해서 철저하게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종일 영철에 대해 곱씹었다.

그 새끼…….

김 회장은 영철이 한 말이나 짓거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놈을 무너뜨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모두 소소한 것일 뿐, 그리고 그런 일들은 망신을 주는 데는 도움이 될망정 무너뜨리는 데는 별 소용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김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뒤 문득 그 인간의 자식들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대학 입학금 대준 그 딸까지 포함해서.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애들은 놔두자. 자식들이 무슨 죄냐? 그동안 부모 잘못 만나 고생한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달리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좋아. 그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지.

찾아보자.


김 회장은 어제 갔었던 그곳, 영철의 건물이 건너다보이는 곳에 다시 찾아가서 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이곳에서 기필코 방법을 찾아내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그 나쁜 놈…….

김 회장은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소년.

어제 본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뒤에 서 있는 것이었다. 미소를 지은 채.

그러고 보니 어제 본 뒤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애가 언제 또 온 거야?

아 참, 오늘 다시 온다고 했었지. 그제야 김 회장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애가 오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애가 나타났다. 어제처럼 갑자기.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야?

김 회장은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에 계속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러다가 어제처럼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겠지.

김 회장은 몸을 돌려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 지금부터 생각할 것이 많다. 다른 데 정신 팔 겨를이 없다.

“제가 회장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어요.”

뭐라고? 네가 나를 알아? 김 회장은 뒤로 돌아서서 소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하긴 여기저기에 명함을 내밀고 얼굴도 들이밀었으니. 그렇지만 동창회 회장으로 안 거야, 아니면 회사 회장으로 안 거야?

“둘 다요.”

뭐라고? 네가 내 생각을 알아?

“그럼요. 저는 다 알아요.”

이놈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유서에 대해서도 알거든요?”

“유서?”

“네, 유서.”

“무슨 유서?”

“잊으셨어요? 늘 보관하고 계시잖아요, 그 유서.”

“뭘 보관하고 있다고 그래?”

김 회장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

“50년 이상 간직해 오신 유서.”

김 회장은 다리가 부르르 떨려왔다.

이놈…….

“저 욕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그 유서는 왜 지금까지 가지고 계신 거예요?”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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