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엽서

by Rudolf

두 번째 엽서



정욱은 산타마리아 수도원에서 나와 렌터카를 몰고 동쪽의 한적한 마을로 갔다. 지금 바타야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조용한 도시인 바타야의 산타마리아 수도원 바로 위에 있는 바타야 축구경기장(Campo de Futebol de Batalha)에서 오늘 저녁 시합이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축구 열기도 다른 유럽 국가 못지않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 중 하나가 바로 축구시합이 있는 날 도시의 모습이다. 클럽 대항전이 있는 날 대도시는 한낮부터 축제 분위기 못지않은 모양이다. 바타야에서는 그렇게 소란스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모습에는 흥분감이 깃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을 전체에 어딘지 축제 전야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정욱은 한가한 시골에서 벌어지는 경기이지만 그래도 축제와 같은 기분을 맛보고 싶었으나, 지금 자신은 여행객의 정취를 느낄 만한 처지는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불원천리 타향에 온 비련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정욱은 마을에서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한적한 농촌 지역의 조그만 호텔에서 하룻밤 묵은 뒤 다음 행선지로 떠날 예정이다. 그 숙소가 호텔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값싼 요금에 편히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곳이라서 큰 부담은 없었다.

잃어버린 사랑. 이런 말을 사용하면 어떤 느낌을 줄까? 비련의 주인공. 어떤 이유에서건 그 사랑을 차지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거나,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런 장면이 떠오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 맞다. 정욱과 그녀 도희도 맺지 못한 사랑을 했다. 그녀가 떠난 것이다. 정욱을 남겨두고. 영원히.

‘영원히.’

정욱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떠난 도희. 그러니까 이것도 비련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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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희는 두 번째 보낸 엽서 끝에 ‘Adeus, Adeus, Adeus’ 이렇게 썼다. ‘안녕, 안녕, 안녕히.’

이번에 정욱은 포르투갈에 두 번째로 왔다. 첫 번째는 도희가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도희는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이 입원했다고. 그러면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 끝에 ‘안녕’이라고 쓴 것이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정욱이 그 병원에 도착한 바로 그날 도희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욱이 병실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그날 정욱은 미치는 줄 알았다. 공항에서 짐을 찾아서 나올 때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택시를 탈 때 허겁지겁 달려와서 사정하는 뚱뚱한 할머니에게 양보만 하지 않았더라면, 늑장 부리며 운전하는 택시 운전사에게 조금만 더 재촉을 했더라면, 병원 입구에서도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병실 번호를 확인하며 천천히 걷지 않고 뛰기만 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에라도 병실을 노크하지 않고 곧바로 열고 들어갔었더라면……. 그렇게 했다면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방금 숨을 거두었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그 손을 잡아주었거나, 뺨이라도 쓸어주었거나, 아니면 눈이라도 감겨주었을 텐데. 그리고 혹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정욱에게 속삭여 주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1분, 딱 1분 차이였다. 그녀가 숨을 거둔 것과 정욱이 도착한 시간의 차이가.

더군다나 정욱은 도희가 그런 상태인 것도 몰랐다. 그저 아프려니, 그래서 병상에 홀로 있기가 힘들어 와달라고 했겠거니 한 것이다. 그런데 왜 도희는 그런 말을 카톡이나 이메일로 하지 않고 엽서로 보낸 것일까? 그것은 도희가 보낸 두 번째 엽서였다. 게다가 정욱이 그 엽서를 받은 뒤에는 카톡도 이메일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니, 도희는 아예 열어보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정욱은 급히 떠났다. 포르투갈로. 그녀가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영화나 연극이나 소설이나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사실 영화 같은 데서는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 달려와서 손을 잡고 마지막 말을 나눈 다음 눈을 감지 않던가. 그러니까 그런 장면이 다 거짓이었단 말이지, 응?

물론 도희도, 또 그 부모나 의사도 정욱이 온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도희의 임종을 조금이라도 미루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인인 도희는 기다려 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정욱이 보낸 이메일이나 카톡 메시지는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달려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만이라도 이 세상 떠나는 것을 연기했어야 옳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오히려 그 반대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무대의 막이 떨어지게 했다. 이것이 정당한 것일까?

게다가 이역만리 달려온 낯선 청년에게 ‘당신은 누구냐’는 표정으로 보내는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어색하게 서 있어야 하는 사내의 꼴은 또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말이다. 그 경우 남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 것일까? 정욱처럼 그 자리에서 무릎이 꺾이면서 털썩 주저앉는 모습이 그 상황에서 합당한 것일까? 정욱보다 더욱 비통해할 부모가 눈 감은 딸에게 망연한 눈길만 보내고 있는 장면에서 그보다 더 큰 애통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딸을 잃는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플까, 아니면 지구 3분의 1을 돌아 허겁지겁 달려온, 부모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비련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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