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풍경화 (5)

장면 5 | 속절없는 마음

by Rudolf

장면 5 | 속절없는 마음



휘영은 분했다. 정말 분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인간 윤 대리의 얼굴을 열 손톱으로 박박 긁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황 이사 앞에서 휘영이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던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지를 생각해 보면.

“허허, 좋은 얘기야. 요즘 연애도 귀찮아서 사람 만날 생각들은 아예 안 한다는데, 이렇게 가까운 데서 배필 찾는 일이 얼마나 좋은 거야.”

황 이사는 휘영의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선다.

“이 사람 얼굴 빨개지는 거 봐. 너무 순진해……. 어이, 김 과장 나한테 와봐.”

황 이사는 이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뒤 휘영은 더 이상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없어서 조퇴를 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대낮에 회사에서 나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길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파도처럼 쓸려가고 쓸려오고 있었는데 자기 혼자만 외딴 섬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거구나.

휘영은 눈에 띄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아무 데나 가서 앉았다. 그러나 창가를 골라서.

이층이라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기가 괜찮았다. 바깥은 참 보기 좋았다. 사람들은 또 왜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지. 그런 중에도 눈에 띄는 장면이 몇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

팔짱을 꼭 끼고 가는 두 사람.

칫―!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다시 그리로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하지만 곧 휘영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꼭 매달리다시피 해서 가는 거냐? 벌건 대낮에.”

휘영은 자기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생각한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중얼거린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고개가 계속 뒤로 넘어가며 그 커플을 뒤쫓는다.

여자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웃는 것 같았다. 남자가 손을 들어 여자 코끝을 간지럽힌다.

“에비, 벌건 대낮에 무슨 짓거리냐? 저것들이 남녀칠세부동석 시대에 태어났으면 곤장 수십 대는 맞았을 텐데.”

이 말을 중얼거린 것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다.

여자가 괜히 얄미웠다. 그리고 혼자서 또 중얼거린다.

“남자 너무 믿지 마라.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몰라.”

그 커플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사라질 때까지 휘영은 고개를 젖혀 계속 바라보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악담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깨져라, 깨져…….”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니, 여종업원이 커피잔을 들고서 노려보며 서 있었다.

휘영은 갑자기 무안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커피잔을 받으려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여종업원의 손을 친 것 같았다. 친 건지, 건드린 건지. 아무튼 커피잔과 받침대가 탁자 위로 떨어지면서 쨍그랑과 둔탁한 소리가 동시에 나면서,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커피는 쏟아져 내리면서 홀라당 그 커피를 다 뒤집어쓰고 말았다. 휘영이. 또한 탁자에 떨어진 것들은 산산이 깨져버렸고.

와장장창…….

누가 잘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경우 박박 우기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휘영은 자기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해버렸다. 그 다음 일은 상상에 맡기겠다.



휘영은 산 지 얼마 안 되는 옷 다 버려놓고 우울하다 못해 비참한 심정으로 지하철을 탔다. 갈 데가 정말 없다. 커피숍에서까지 쫓겨났으니까. 그래서 집에나 가자고 한 것이다. 갈 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전철에서 내려 오피스텔 쪽으로 걸었다. 기다란 상가 겸 오피스텔 건물 네 동이 양쪽에 죽 이어져 있고 그 사이에 연못 공원을 만들어놔서 이국적인 광경을 느끼게 하는 쇼핑 거리. 그곳은 늘 복작거린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휘영은 갑자기 그 거리를 뚫고 집에까지 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큰길 쪽으로도 입구가 있지만, 대로라서 늘 시끄럽다. 달리는 차들, 오가는 사람들……. 휘영은 자신이 마치 버림받은 여자, 소박맞은 여자, 실연당한 여자, 해고당한 여자, 어디에서 쫓겨난 여자가 된 것 같아 부끄럽고 창피하고 화가 나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큰길 건너 얕은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어젯밤 소연을 기다리면서 바라보았던 그 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통 단풍으로 물들어 있어서 보기 좋았는데 그때는 가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단풍 거의 끝 무렵에 그곳에 갈 생각을 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꼭 때를 못 맞춘다니까. 항상 헛다리나 짚고 말이지.

그러나 이제라도 생각이 났으니 다행이다 싶어 길을 건넜다. 그렇지 않다면 바로 집 앞의 단풍 산도 감상 못 하고 이 가을을 지나칠 뻔했다.

그래, 그곳에 가서 산속 숲길이라도 걸으면 마음이 풀리겠지.

휘영은 천천히 산을 올랐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있었다. 주로 노인층이지만.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형태로 편리하게 닦아놓았다. 길옆으로는 여러 종류의 낮은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심겨져 있고, 또한 곳곳에 쉴 수 있게 벤치나 정자, 그리고 아주 깔끔한 화장실까지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적당한 높이마다 공원처럼 잘 가꾸어놓았고, 여기저기에 등산로나 산책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지점부터 또 다른 지점까지의 거리와 소요시간까지 팻말에 적혀 있었다. 이곳에 몇 번 와보았는데도 휘영은 올 때마다 감탄을 했다. 그리고 늘 아쉬워했다. 이렇게 잘 꾸며놓은 곳이 지척에 있는데도 왜 자주 찾아오지 못했는지. 게다가 조금만 더 들어가면 마치 고산준령으로 들어선 듯 제법 깊숙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안내판에 없는 숲속 오솔길도 많이 있다. 하긴 사람이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니까.

얼마 전 어떤 책을 읽었을 때 눈에 띄었던 구절이 문득 생각난다.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 곧 길이 된다.


1921~22년에 베이징의 한 신문에 연재된 글을 모아서 만들었다는 《아Q정전》의 작가 루쉰((魯迅)이 한 말이란다.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다니면 길이 되는 거지 뭐. 발길 닿는 곳.

그래, 가보자. 아무 길이나. 혹시 아냐, 내가 걸었던 길이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될지.

이런 생각으로 휘영은 적당한 길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 옆으로 거친 돌과 덤불이 나 있는 곳이 보였다. 11월 늦가을의 쓸쓸하고 낙엽 마구 쌓여 퇴락한 느낌이 드는 거친 곳. 아무도 그리로는 발걸음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조심조심. 낮은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낙엽 덤불 속에 빠지지도 않게 잘 살펴가며.

그렇게 시냇물 가장자리를 따라 잠시 올라가니 제법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사람들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 그곳은 천연의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사방이 높은 나무들로 둘려져 있어서 아늑하기까지 했다.

하, 이곳에 그이와 함께 오면 멋지겠는데. 낭만이 뚝뚝 떨어지겠…….

휘영은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이는 누구고, 낭만은 또 뭐란 말인가? 마치 실연당한 여자 같은 우울함으로 이곳까지 올라오더니 그새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꿈같은 공상에나 빠진 거란 말이야?

한심한 인간. 한심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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