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hort sleepe past, wee wake eternall
1
정일두는 이제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일본은 여러 극우단체를 통해 수많은 일을 진행해 왔다. 그중 대부분은 일본 총리실과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들 상당 부분은 일을 진행하다 중단되었고, 또 일부는 중단되었다가 정권이나 환경이 바뀌면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게다가 그러한 프로젝트에 따라 일본과 파트너가 된 한국의 정치인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바뀌기도 하고, 또 일부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연계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계속해서 자신들에게 협조할 만한 인물들을 찾아내며, 자금을 대주고 회유하여 끌어들였다. 그리고 정치인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심지어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도 했다. 일본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친일인사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 친화적인 여론을 조성하되, 절대로 일본인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즉, 한국 내에서 자발적으로 친일화된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인사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사회 여론에 대한 정보를 서로 나누고 모아서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점조직화된 체계를 만들어 갔다. 또한 여기에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를 통해 확보된 인사들은 한국 사회 전반에 파고들어 계속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와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지도층이면서도 현실에서 한 발 벗어났거나 은퇴한 인사들에게 집중적으로 다가가 그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컨센서스, 즉 공동체 다중의 합의가 형성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가장 앞에서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가 과거 국회 다수당의 유력한 정치인이자, 15년 전에 정계에서 은퇴한 경회식이었다.
2
해선은 오피스텔에서 나와 고시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 수요일 저녁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와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김상기 전무가 늘 하던 대로 수요일 모임을 계속 갖는지, 오진희가 또다시 USB를 받아서 전달하기 위해 그 일식집으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그날 낮에 동준은 호텔로 전화를 걸어 단체행사 예약을 하고 싶다며 총지배인을 찾았다. 그러나 호텔 직원은 총지배인이 아니라도 자신들이 예약업무를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동준은 정부의 큰 행사를 맡아서 하기 때문에 총지배인과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며 꼭 통화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잠시 뒤 총지배인이 전화를 받았다. 동준이 횡설수설하며 거창한 행사에 대해 떠벌이다가 다시 전화하겠다면서 전화를 끊기 전에 총지배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총지배인은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김상기 전무이사라고 대답하며, 아무 때나 다시 연락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연락처를 묻기에 조폭 B의 번호를 불러주었다. 그 뒤 동준은 호텔로 직접 가서 리셉션 카운터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오진희를 찾으려고. 그러나 해선이 보여준 사진의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동준이 슬쩍슬쩍 카운터 근처의 여직원들 이름표를 훔쳐보았으나 ‘OH’라는 성은 없었다. ‘PARK’이나 ‘LEE’ 또는 ‘SONG’만 있었을 뿐.
그리고 나서 해선이 저녁 무렵에 일식집으로 간 것이다.
해선은 이번에는 그 일식집으로 직접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예약하고 싶다며 방을 보여달라고 했다.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주말 낮에 전화만 주시면 좋은 것으로 잡아드릴게요. 인원은 어떻게 되나요?”
“대여섯 명인데, 좀 넓은 방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리로 오시지요.”
해선은 종업원을 따라갔다.
종원업이 방 하나를 열고 뒤돌아본다. 자기 스스로도 만족한다는 듯한 얼굴.
해선은 방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깔끔했다. 해선은 일식집에 몇 번 가보았지만 이 집과 같은 고급은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 곳들은 어떻게 해놓았나 하는 호기심도 있어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평소 상상했던 것처럼 호화롭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단조롭고도 깨끗할 뿐이었다. 깔끔하다는 표현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해선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약간 미흡하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다른 방은 어때요?”
종업원의 양미간에 약간 주름이 가는 듯했다.
“별 차이 없어요.”
“보여주실 수 있어요?”
“네, 그러세요.” 종업원의 목소리가 다소 퉁명해진다.
그런 뒤 해선은 그 일식집의 방을 다 둘러보고 마지막 방 하나만 남았다.
“거기에는 지금 손님들이 있어요.” 종업원은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다른 방들하고 별 다를 것 없어요.”
해선이 그 방 앞을 보니 여자들 구두만 몇 컬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해선은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종업원의 눈길을 피하며 조금은 건방진 투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일식집을 나왔다. 그 뒤 오진희가 김 전무에게서 USB를 받은 시각까지 그 건물 근처를 빙빙 돌았다. 그러나 오진희나 김 전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해선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오진희의 빌라로 갔다.
빌라 밖에서 창을 올려다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혹시 몰라서 해선은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컵라면을 샀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붓고 창가에 앉아서 잠시 기다렸다. 그런 다음 컵라면 뚜껑을 열고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라면 속으로 젓가락을 푹 담근 다음 먹음직스럽게 크게 한 입 거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젓가락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일부러 무심코 내다보는 척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창 밖에서 누군가가 서서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해선은 깜짝 놀라서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바람에 뜨거운 라면에 입을 데고 말았다.
앗뜨뜨뜨뜨!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편의점 창 밖에서 호기심 있게 안을 들여다보다가 해선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저도 같이 놀랐는지 후다닥 뛰어서 도망가 버린다.
해선은 이번에도 라면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입술만 덴 채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오진희의 빌라로 가서 한 번 더 올려다본 뒤 다시 공영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 안에 들어가 오진희의 차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김 전무의 벤츠도 없었다.
한여름밤 낭만에 젖었던 그 벤츠가 보이지 않자 무대가 갑자기 썰렁해 보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
해선은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통쾌하지도 않았다. 서글픈 마음이 앞섰다. 오진희나 해선 자신이나 모두 소모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 놀음의 꼭두각시가 되어 춤을 추다가 어느 날 버림받는 존재.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슬퍼해 주거나 기억해 주지도 않는다. 주인공 노릇을 하는 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상황이 변하면 또 거기에 붙어 살아남아서 또 다른 자신들의 무대를 꾸미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놀이에서 희생되어 사라진 인간들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또 다른 꼭두각시가 등장해서 그들의 입맛을 맞추어 줄 테니까.
오진희……. 어디에 있어? 알려줘. 내가 가서 같이 울어줄게.
해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을 향해 가는 늦여름 밤하늘. 그래도 한여름밤인데 조금도 화려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별들이 오진희나 해선의 처지처럼 느껴졌다.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억울하게 직장을 잃어버린 해선 자신이나 한여름밤 주차장에서 화려한 로맨스를 불태웠다가 불 꺼진 빌라의 창만 남겨놓고 사라진 오진희.
둘 다 불쌍했다.
3
해선은 우울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오진희는 한 직장, 같은 부서에서 정을 붙인 사이이다. 깊은 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은 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이것도 인생……?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해선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특히 자신의 직장.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그 대신 호텔에서 쫓겨난 이후 참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 이것도 일종의 모험이지. 하지만 또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모험. 그러나 한편으로는 꽤 많은 스릴도 느꼈다. 추적, 납치, 탈출 등등. 일생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떻든 이제는 결말을 향해 다가가는 것 같았다. 그 결말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해선은 이제 다음 단계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카메라 가방을 들고 고시원을 나섰다.
독도 문서에 서명한 한국 정치인 다섯 명. 그중 하나는 어르신. 또 하나는 사망. 나머지 셋 중 둘은 현재 국회의원이고, 마지막 하나는 꽤 큰 도시의 시장이다.
해선은 이 셋 중에서 우선 시장을 선택해서 접근하기로 했다. 무조건 사진 찍는 것이다.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그 주변 인물들과 함께. 그러다 보면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지푸라기라도.
해선은 시청으로 가서 근처를 빙빙 돌았다. 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시장의 동향이 어느 정도 나와 있다. 비서실을 통하면 시장의 동선에 대해서 대강은 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시청 주위에 어슬렁거리며 시장을 좇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자나 시민단체 사람들, 여러 이익단체 사람들, 민원인들, 하이에나들 등등. 해선도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사람들 일부는 서로 잘 아는지 만나면 인사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한다. 그리고 혹 시장의 모습이 보이면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시장의 차를 가로막고 항의하거나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치인들, 생각보다는 피곤할 것 같았다. 개인생활도 없고.
해선은 시장이 나타날 때마다 무조건 셔터를 눌렀다. 필름도 필요 없고 하드디스크에 저장만 하면 되니 아까울 것 없다. 마구 눌러댔다. 각종 행사에도 쫓아가 사진 찍고, 동영상 담고, 망원렌즈, 광각렌즈 다 동원해서 시장의 모든 것을 담았다. 시장은 별의별 사람 다 만나고 온갖 곳 다 다녔다. 크게는 대형행사나 건물이나 건설현장에서 기공식, 착공식, 완공식에서부터 고아원, 양로원, 탁아소, 보육원, 애육원, 모자보호소, 노인복지관, 노인재가센터, 주간복지센터, 어린이재단, 장애우재활협회, 아동센터, 미혼모가정지원센터, 재활원 등등 기능은 비슷비슷하지만 다양한 이름을 가진 수많은 단체들을 찾아다니고, 시장이나 여러 기업도 방문하고, 어떤 때는 길거리를 다니며 사람도 만난다. 또 여기저기 후원단체에 가서 연설도 하고, 외국 무슨 단체나 기관, 또는 여러 기업들과 협약도 맺고, MOU라는 것을 체결하기 위해 조인식에서 서명도 하고, 무슨무슨 식마다 쫓아다니며 연설도 한다. 그리고 웬 서명은 그렇게 많이 하는지 여기 가서 끄적, 저기 가서 일필휘지 날리듯 만년필 굴리고 한다. 만나는 사람은 왜 또 그렇게 많고 사진도 얼마나 많이 찍는지 모른다.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도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시장이라는 직업 알고 봤더니 보통 사람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 종일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정치한다는 사람들, 아휴, 체력이나 배짱이나 소신 뭐 그런 것들 없으면 단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았다. 해선 같으면 하라고 모시고 간다고 해도 절대 사양.
2주일 동안 시장을 따라다니면서 해선은 녹초가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찍은 영상만 산더미. 매일매일 거의 하루 종일 눌러댔으니까. 다리는 또 얼마나 아픈지. 다른 두 국회의원도 그렇게 쫓아다니라고 하면 도망갈 것 같았다.
해선은 더 이상은 그 짓을 할 수 없다고 항복하고서 사진들을 정리하겠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대고 방 안에만 눌러앉았다. 그런데 실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선, 어떤 기준으로 분류해야 할지, 어떤 것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동준도 해선이 찍은 수천의 자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 얼마 동안은 세밀히 살펴보는 듯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이 짓 또 해야 하는 것 아니죠?”
“뭘 또 해?”
“이렇게 하루 종일 쫓아다니며 사진 찍는 거 말예요. 다른 두 국회의원.”
동준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사실은 아직 자료가 조금 부족해.”
“그 USB만 가지고는 안 돼요? 그거 엄청나던데.”
“하지만 그것은 친일하고는 직접적으로 연결이 안 되거든. 좋게 말하면 일본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자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어. 물론 그것만 터뜨려도 타격 입을 사람 꽤 많아. 아마 자기 분야에서 모두 얼마 못 버틸걸. 결국엔 다 쫓겨날 거야. 그렇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야. 게다가 알고 보면 정치나 사회 전반에 걸쳐 친일 인간들이 꽤 많아. 그놈들이 교묘하게 감싸줄 거란 말이야.”
동준은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혼자 중얼거리듯 덧붙인다.
“진짜는 그 독도 문서거든. 그것하고 USB를 연결시키면 빼도 박도 못할 텐데, 그게 쉽지 않단 말야. 특히 그 서명 문제. 그게 조작된 가짜 서명이라고 하니까 달리 방법이 없어. 아무튼 좀더 찾아내야 해. 그 세 사람. 서명에 참여한 놈들. 그 인간들한테서 분명히 뭔가가 나올 거야.”
해선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그럼 직접 해요. 난 더 못 해.”
해선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동준이 새로 옮긴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막상 밖에 나왔지만 달리 할 일도 갈 곳도 없었다. 취직자리는 계속 알아보고 있지만 연락 오는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채에는 도전하기 힘들고.
해선은 뺑소니 합의금 받은 것이 있어서 그것에 의지하다 보니 그동안 마음이 절실하지 않았던 것이 좀 후회스러웠다.
해선은 그 스웨덴 회사가 늘 마음에 떠올랐지만, 지난번 신세 진 이후 또다시 먼저 전화하기가 미안했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한.
“철판 깔아봐……?”
해선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그 중후하면서도 인자한 지사장 얼굴을 떠올렸다. 그 다음으로 밝고 잘생긴 남주환 과장.
해선은 핸드폰 전화번호부에서 두 사람 이름을 찾아내고 눌러 말어 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이럴 때 저쪽에서 먼저 전화해 주면 좋잖아.”
해선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핸드폰 들여다봐도 벨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해선은 한숨을 푹 쉬고 걸었다. 발길 닿는 대로 가자.
지하철역 입구가 나왔다. 지상은 아직도 뜨거웠다. 지하로 내려가자. 타죽는 것보다 땅속에 묻히는 게 낫겠지.
지하철 상가를 지나가다 보니 또다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아냐, 올라가기는 싫어.
해선은 몸을 돌려 다시 상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개찰구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마침 전동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몇 정거장 가니 환승역이 나온다. 해선은 아무 생각 없이 긴 환승통로를 지나 또다시 마침 막 들어오고 있는 전철에 뛰어가서 올라탔다. 전동차는 조금 가다 멈추고 또 조금 달리다 서고 한다. 그때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역 이름들.
해선은 한 정거장의 이름이 나오자 어딘지 정다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내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 다음도 발걸음 닿는 대로. 터벅터벅.
참 잘들 산다. 해선은 길거리 건물마다 상점마다 흘끗흘끗 쳐다보며 입을 헤 벌리고 걸었다. 부러웠다. 저 멋진 옷들, 가구들, 자동차, 가전제품, 가구, 골프용품, 여행사, 증권회사, 은행, 멋진 레스토랑, 그리고 스타벅스…….
해선은 커피광은 아니다. 그러나 스타벅스 간판이 보이자 갑자기 코끝에서 구수한 커피 향이 맴돈다.
그래, 커피나 마시자.
그러나 해선은 눈앞에 있는 스타벅스에는 들어가지 않고 빌딩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나 있는 것처럼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커피숍을 향하여.
마침내 목표한 커피숍 가까이 다가가는데……, 아, 아직도 운명은 내 편인가 보다 하고 해선의 마음에 벅찬 마음이 확 올라왔다.
최정명 지사장이 막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지사장은 해선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여자와 함께 회사 앞 커피숍에서 막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해선은 멈칫하고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옆 빌딩 쪽으로 바짝 붙어서 지사장으로부터 사각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질투 반 호기심 반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어떤 여자인가 하고 살펴보았다.
아, 맞아. 저번에 보았던 그 부인. 딱 한 번 보았을 뿐인데, 그때 그 인상이 해선 마음에 깊게 남아 있었는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참 품위가 있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너무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도 해선이 뭔지 모를 분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한 느낌이 들어서, 아 그래, 지사장에게 말도 실수한 게 있어서 저도 모르게 커피숍에서 홱 나가버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해선은 다시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지사장은 모른 척하며 곧바로 일거리를 주었지. 참 좋은 사람이다. 자상하고. 한마디로 신사지.
해선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지켜보고 있는데 부인이 돌아서더니 해선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지사장은 뒤에서 부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부인이 몇 걸음 걷더니 뒤돌아본다. 지사장이 손을 흔들어준다. (너무 자상해!)
부인도 한 손을 살짝 드는 듯하더니 이내 돌아서서 걷는다. 해선 쪽으로. 그러나 곧 한 건물 옆 주차공간에 세워놓은 승용차로 가더니 문을 연다. 그리고는 몸을 이렇게 돌리는데……, 그때 처음으로 해선은 그 부인이 서류봉투를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은 그 전부터 보기는 했을 텐데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남의 부부 다정한 모습 부러워하고 질투하다가.
서류봉투.
동준이 한번 서류봉투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지사장과 남 과장, 그리고 봉인된 봉투.
그런데 저 부인이 손에 든 봉투. 왜 부인이 봉투를 들고 있지? 동준이 수상하다고 말했었던 그런 봉투는 아니고, 그냥 봉투겠지? 평범한 봉투. 그러나 혹 봉인? 하지만 거리가 좀 떨어져 있고 시야 각도도 그리 좋지 않아 봉인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부인의 차가 출발한다. 천천히 해선 쪽으로 다가온다. 그러더니 금방 해선 앞을 지나쳐 간다. 그리고 곧 큰길로 나가 해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봉투…….
왜 봉투를 부인이 가져갔을까? 지사장은 왜 부인에게 봉투를 준 것일까? 대낮에 회사 앞에서. 그리고 저 봉투를 어디로 가져가는 것일까?
해선은 뛰었다. 큰길을 향해서 뛰었다. 천만다행히도 그때 막 택시 한 대가 길가에 서면서 손님을 내려준다. 해선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뛰어서 손님이 닫으려고 막 문에 손을 대는 순간 손님과 문 사이로 비집고 들듯이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도 채 닫지 못한 상태에서 외치듯이 말했다.
“출발!”
이것은 장군이 병사들에게 고함치는 명령이었다. 돌격!
아마 택시 운전사들은 이런 경우를 심심찮게 경험하는 모양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택시는 부르릉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튀어나갔다.
해선은 문장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말을 마구 뱉어냈다.
“저기, 회색, 혼다 어코드, 저 멀리!”
이 정도 말이면 끝나는 모양이다.
택시는 미사일처럼 날아갔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