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1
정일두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일본 정부와 사쿠라 쪽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무슨 뜻인가? 정일두를 버린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지금까지 들어간 자금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해저 태양관 기지는 약간만 더 버티면 완공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해저기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부스키에 건설될 미래 태양국의 수도, 광대한 태평양 제국을 호령할 태양시의 상징이며 그와 동시에 위대한 해양제국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일두는 조국까지 버렸다. 그리고 근 20년간 외부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아주 정교하고도 비밀스러운 일을 감당해 왔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은밀한 반인륜적인 쓰레기 일까지도 맡아서 해주었다. 이 프로젝트를 맡아서 하는 동안 정일두 개인은 없었다. 오직 태양시, 나아가 태양국을 위해, 즉 미래 일본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을 했다. 대한민국에는 매국이지만 그것을 각종 변명으로 스스로 합리화해서 오직 일본만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외면한단 말인가? 자신에게는 단 한마디 설명도 없이.
그리고 갑자기 정일두는 깨달았다. 일본은 이와 같은 프로젝트에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대신 한국인을 앞세우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자신들은 빠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매국노가 모두 뒤집어쓰게 된다.
게다가 정일두가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일본은 태양국 프로젝트 외에 그와 비슷한 여러 일을 진행시켰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동시에, 또 때로는 선별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일본과 한국 어느 곳에서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비밀 프로젝트들이 하나 또는 복수로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 땅에 수많은 매국노를 심어놓고 조종하려 할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그러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도 결코 손해 보지는 않는다. 성공하면 일본에게 좋은 것이고, 실패해도 그 과정을 통해 한국에 수많은 동조자들을 만들어놓게 된다. 이것은 넘치는 엔화를 소모하면서도 미래 일본의 야심을 이루어가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프로젝트들이 실패한다 해도 한국 매국노들은 그것을 세상에 알리지 못한다. 자신들이 앞장 서서 매국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중에 적당한 때가 되면 일본은 그들을 다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그들을 단지 관리만 해주면 된다. 막대한 자금을 풀어서. 일본 엔화는 기축통화여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조절할 뿐이다.
사실 일본이 이런 식으로 비밀리에 찍어낸 엔화가 얼마인지는 그들 자신도 계산하지 못할 것이다. 천문학적 금액이니까. 일본은 불경기 때마다 이런 식으로 엔화를 풀어내서 경기를 활성화시키곤 했다. 이것 때문에 늘 일본은 침몰한다는 루머에 시달리면서도 기사회생했었다. 외부에서는 이것을 일본의 저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검은 돈의 힘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일본은 엔화의 비밀스러운 양적 팽창을 통해 세계 금융 및 무역시장에서 엔화의 지배력을 꾸준히 높여가고 있었다.
2
동준은 요즈음 자신의 주위에서 무엇인가가 맴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드론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맴도는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를 불안감이. 그러나 원인은 모르겠다. 한동안 계속되는 긴장감 때문에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졌거나, 아니면 이상반응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반응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동준은 이 상태로는 오래 가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쉴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주변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해선은 숙제를 잔뜩 내주고 나가버렸다. 자기가 2주일 동안 찍어댄 사진들을 적어도 10번을 반복해서 살펴보라고 한 것이다. 이미 한 번 샅샅이 훑었다. 나중에는 힘이 들어 설렁설렁하게 살폈지만.
그런데 저녁 무렵 해선은 허겁지겁 동준의 오피스텔로 달려 들어왔다. 두 사람은 아주 급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핸드폰을 꺼두도록 해두었기 때문에 서로간에도 연락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해선은 오피스텔 현관문이 닫히지마자 속사포같이 말을 퍼부었다.
“전화 좀 켜놔요. 급할 때 연락할 수가 없잖아요. 나 오늘 대박 건졌어요. 대애박! 무슨 일인지 알아요?”
동준이 어떻게 그 대박을 알 수 있겠는가? 들어보면 알겠지만.
“숨 좀 쉬고……. 자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숨 좀 쉬고 나서……. 차근차근 말해 봐.”
동준은 냉수를 한 잔 따라주며 해선의 흥분을 가라앉혀 주려 했다.
그러나 해선은 냉수를 받아서 단숨에 마셔버린다. 그러더니 사래가 들렸는지 캑캑거린다.
“거 봐.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했잖아. 천천히, 천천히…….”
해선이 시뻘게진 얼굴로 동준을 노려본다.
“알았어, 알았어……. 천천히, 천천히…….”
해선은 잠시 가슴을 쓰다듬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잠시 후 해선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스웨덴 무기업체 사무실 앞에 갔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혹시나 일거리 없나 하는 마음으로 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지난번 서류봉투 봉인 때문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한번 그곳에 직접 가서 살펴보려 했다고 둘러대면서 말을 꺼냈다.
“…… 그렇게 해서 그 혼다 어코드를 뒤쫓은 거예요. 경기도 광주까지. 거기에 단독주택들이 별장처럼 들어서 있는 커다란 단지가 있었는데, 글쎄 거기까지 갔어요. 택시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아세요……?”
동준은 눈으로는 이야기나 빨리 하라며 재촉했지만, 입으로는 ‘돈 많이 썼겠네’ 하고 다독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정말 택시비 안 아깝다는 말이 그 경우에 딱 맞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들어간 집, 정말 대궐 같더라고요. 얼마나 큰지.”
그래서……?
“그래서 부동산에 가서 물어봤죠. 그 집이 누구 거냐고.”
“순순히 알려줘?”
“그럴 리가 있어요. 내가 그럴 줄 알고 처음부터 음료수 캔하고 제과점에서 롤케이크까지 사가지고 간 거 있죠. 그런 동네 부동산들은 돈독이 올라서 그냥은 안 가르쳐 줘요.”
해선의 설명에 의하면, 해선이 일부러 카메라 꺼내어 어께에 둘러맨 채 간식거리를 잔뜩 들고서 들어간 덕분에 부동산 사람들이 처음에는 경계하더니 나중에는 마음이 풀어져서 그 집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려주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 그전에 TV에도 많이 나온 사람 있잖아요. 국회의장 지냈던 사람.”
해선이 신이 나서 말을 한다.
“국회의장 누구?”
동준은 지난 12년 동안 세상과 담 쌓고 산 탓에 요 근래의 대한민국 중요인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국회의장 지냈다는 그 사람은 요즘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사람 몰라요? 왼손잡이.”
“왼손잡이?”
“그래요. 자기는 왼손잡이이지만 좌파는 싫어한다고 말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잖아요. 국회에서고 언론에서고.”
“……?”
“왼손잡이 비하네 아니네 해가면서 말예요. 사실 나도 왼손잡이거든요.”
“그 사람 이름이 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아니,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말예요, 그 집에 찾아간 여자가 누구냐 하면…….”
해선은 말을 멈추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 여자의 차가 자주 그 부동산 앞을 지나서 그 저택으로 가기 때문에 잘 알고 있대요.”
“누군데?”
“그 국회의장의 딸. 둘째 딸.”
“……?”
“그러니까 스웨덴 무기회사 최정명 지사장의 장인이 바로 그 옛날 국회의장인데, 그 여자가 자기 아버지와 남편 최정명 사이를 오가며 서류봉투를 전달해 준 거라고요. 오진희처럼.”
해선은 머리가 나쁜 초등학생에게 가르쳐 주듯이 또박또박 말을 한다.
“그런데 왜……?”
“아, 잠깐. 그 국회의장 이름이 생각났다. 경회식. 경회식 국회의장.”
경회식. 그래, 생각이 난다. 입심 좋고 카리스마 강한 사람. 동준이 교도소에 가기 훨씬 전부터 이름이 나 있었던 사람이다. 한때는 대통령에 출마한다 안 한다 하며 말도 많았었다. 그 사람의 특징은 새로운 당을 몇 번씩이나 만든 것. 그러나 그때마다 성공해서 창당의 명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새로 생긴 당도 그 사람을 비롯한 몇몇이 주도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얘기가 묘해지는데…….”
“그렇죠? 내 생각에도 그래요. 이거 아무래도 이상해요.”
하지만 그 여자가 자기 아버지에게 전달했다는 봉투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은 큰 수확이나 다름없다.
어르신, 스웨덴 무기업체 지사장 최정명, 최정명의 부인, 그리고 최정명의 장인 경회식.
이들 사이에 무슨 내용이 오가기에 봉인된 서류가 인편으로 전달되는 것일까?
그것이 뉴레인보호텔 김상기 전무, 오진희, 205호, 그리고 어르신의 커넥션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 두 커넥션 사이의 중심점은 어르신이다. 결국 핵심은 바로 어르신인 것이다.
그리고 어르신과 경회식은 모두 국회의원이었고 또한 같은 당이었다.
혹시…….
동준은 머릿속이 갑자기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저번에 미사대교에서 찾은 우산 비닐 주머니……. 거기에 무슨 당 이름이 써 있었죠?”
“잠깐 기디리세요.”
해선은 자기 가방을 가지고 왔다. 뉴레인보호텔 볼펜과 마찬가지로 그 우산 주머니는 해선이 전리품처럼 가방 속 작은 포켓에 잘 넣어두었었다.
해선이 우산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나서 살펴보니 ‘미래공영당 창당대회’라는 말이 은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동준은 얼른 인터넷으로 미래공영당 창당대회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여기에 자세히 나와 있네……. 미래공영당 창당의 주역은 노회한 경회식과 중후하고 뚝심 있는 신형석 전의원이었네. 바로 그 국회의장과 우리 어르신이었어.”
동준은 오피스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만있자……, 경회식은 그 이전 당의 국회의장 출신이었고, 신형식은 국회 국방위원장을 오랫동안 지낸 7선 의원…….”
동준의 머릿속에서 전등이 켜졌다. 스웨덴 무기업체의 한국 지사장 최정명과 국회 국방위원장을 오랫동안 지낸 노회한 신형석 전의원.
동준은 급히 무기 구입에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수많은 기사들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최근 몇 달간의 기사들 중에서 간간이 ‘TS Stockholm’사가 언급되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름조차 없었던 그 회사가.
“아, 찾았어요!”
그때 갑자기 해선이 소리 지른다. 동준은 깜짝 놀라 해선을 돌아다보았다.
“지역구!”
무슨 소리야?
“미래공영당에서 임시로 발표된 지역구 위원장 명단.”
해선이 의기양양해하며 자신의 노트북을 동준에게 내민다.
“여기 보세요. 경기도 광주 지역구 위원장 이름.”
해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름을 보니 바로 최정명이었다. 경회식 국회의원의 지역구도 바로 그곳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장인이 사위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어르신이 끼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국방부의 무기구입에 관해서 최근에 갑자기 최정명의 스웨덴 회사 이름이 오르기 시작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렇게 연결시키는 것이 억지일까?
동준과 해선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가지 계획을 짰다.
대담한 계획. 그러나 얄미운 계획.
3
동준은 어르신에게 전화했다. 이제는 정말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준은 어르신에게 전화했다.
“저……, 여러 가지로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사실은 한 가지 꼭 보셔야 할 자료가 있어서 갖다드리려고 합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 같습니다. 저에게가 아니라 어르신에게.”
어르신은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기 전에 어르신이 먼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어르신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USB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 어르신 성함이 많이 나와서요…….”
“들어와.”
동준은 어르신 저택으로 가기 전에 지난번처럼 사모님 드릴 잣죽 세트와 풍성한 꽃다발, 그리고 이번에도 자그마한 동양란 화분을 하나 준비했다.
동준은 저택에 들어가서 일층 식탁에 잣죽 세트를 올려놓고, 다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꽃을 다듬은 다음 화병에 꽂아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동양란을 들고 이층에 올라가서 서재 문을 살며시 노크했다.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난다. 동준은 문을 살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숙이고 허리도 45도 정도 굽혔다. 그리고는 어르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따님 액자 쪽으로 갔다. 동준은 그곳에 놓인 동양란 화분을 슬쩍 살펴보았다. 지난번 갖다놓은 위치와 형태 그대로였다. 스프레이로 물만 가끔 뿌려준 것 같았다.
동준은 그 화분을 들어내서 바닥에 내려놓고는 새로 가져온 화분을 올려놓았다. 어르신과 마주보는 각도를 잘 조절해서.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어 어르신 책상으로 가져갔다.
어르신은 그때까지는 동준을 보지 않고 하던 일만 계속하는 것 같았으나, 동준이 다가가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쳐다본다. 아무런 표정 없다.
동준은 두 손으로 USB를 내밀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원본입니다. 혹 분실될까 봐 하나 복사한 것은 제가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동준을 쏘아보았다. 그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듯했다.
동준은 책상에서 물러나면서 다시 말했다.
“며칠 있다가 또 들르겠습니다. 다른 중요한 자료들이 또 있거든요.”
이렇게 말하고 동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따님 액자 쪽으로 가서 바닥에 내려놓은 먼젓번 동양란 화분을 들고서 서재를 나왔다.
4
동준은 오피스텔에 들어서면서 급히 해선에게 물었다.
“참, 지난번 경회식 얘기를 할 때 너도 왼손잡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네, 맞아요. 왜요?”
“밥 먹을 때 보니 오른손 쓰던데?”
“왼손, 오른손 다 써요. 어렸을 때는 왼손잡이였는데, 커서 다른 사람들이 놀릴까 봐 오른손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럼 지금 오른손이 편해, 왼손이 편해?”
“당연 왼손. 그런데 지금은 양손 다 괜찮아요. 습관이 돼서.”
“그러면……, 혹시 왼손 글씨하고 오른손 글씨가 같아?”
“당연히 다르죠, 많이 차이는 안 나지만.”
“빨리! 노트북!”
동준은 이렇게 소리 지르며 자신의 노트북을 찾아서 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경회식이 외손잡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혹시 그 시장도 왼손잡이는 아닐까? 그것은 모르기는 하지만 가능성은 있어. 헛수고 하는 셈 치고 한번 확인해 보자. 운이 우리 편이라면 그렇게 될지도 몰라.”
동준과 해선은 외장 하드디스트에 담아놓은 그 시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시장이 서명하는 장면. 그가 어느 손으로 서명하는지 찾기 위해서.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노트북으로 따로따로 찾았다. 외장 하드디스크도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동준은 동영상, 해선은 사진을 뒤지기로 했다.
사진의 양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서명하는 화면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오른손으로 서명하는 것이었다. 동준은 사진을 다 뒤지고 나서 실망스러워 뒤로 몸을 젖히며 맥 빠진 소리로 말했다.
“없네. 없어.”
하지만 해선은 소파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계속 화면만 들여다보며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준은 해선 옆으로 가서 앉아 노트북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해선이 몸을 움직거리며 옆으로 엉덩이를 조금 옮긴다. 동준의 몸이 너무 붙은 것이다. 동준은 멋쩍어서 슬그머니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해선이 외친다.
“찾았다!”
“어디?”
동준은 얼른 다시 해선 옆에 앉아서 해선의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모았다. 맞았다. 시장이 외국 무슨무슨 기관하고 MOU를 체결하는 장면이다.
MOU, 즉 ‘Memorandum of Understanding’의 약자로서 우리 말로는 양해각서(諒解覺書)라고 한다. 민간기업이나 국가 간에 교환하는 합의문서 또는 합의 그 자체를 뜻한다. 이는 계약 당사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계약 체결 이전에 교섭 중인 단계에서 나중에 최종적으로 체결될 사항들을 서로 확인하면서 중간에 합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법적으로는 강제성이 없지만 명확한 이유 없이 양해각서를 파기할 경우 매우 큰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된다. 따라서 별 다른 일이 없는 한 MOU는 그대로 이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때도 최종 단계에서 내용의 일부가 약간 변경될 수는 있다. 양측의 합의에 따라서.
해선은 이러한 것을 동준에게 설명해 주었다. 해선이 호텔에서 근무할 때 MOU 체결 행사를 종종 보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준은 조금 머쓱했지만 그래 너 잘났다 하고 묵묵히 들어주었다. 지금 그런 일로 타박할 때가 아니니까.
아무튼 시장이 왼손으로 서명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왼손잡이가 사회생활 때문에 양손을 다 사용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주로 오른손을 쓰면서도, 저도 모르게 무심코 왼손을 사용하는 때가 있다. 바로 시장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 시장은 태생적으로 왼손잡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가 한 왼손 서명이 오른손 서명과 다른지 확인해야 하는 일이 또 남아 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진에서는 그것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선이 찍은 서명 사진과 동영상은 모두 다섯. 그중 하나가 왼손이다.
혹시 시청에 가면 시장이 서명한 MOU 증서를 확인할 수 있을까? 그것과 동준이 보관하고 있는 독도 문서의 서명을 비교해 보면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시장은 공인이기 때문에 그가 재임 시 생산한 모든 문서는 보관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MOU와 같은 중요한 문서는 액자에 넣어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해놓았을 수도 있다. 시장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터넷을 더 뒤지면 그 증서 사진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그 서명과 독도 문서의 서명을 대조해 보면 일치하는지 않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가 진실이라면 나머지도 넷도 진실이 된다. 더 나아가 그 문서에 서명한 일본인들 다섯의 서명도 진실이 된다. 그들 모두 왼손과 오른손을 바꿔서 서명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왼손잡이로서 그냥 살아온 경우에는 오른손으로 서명했겠지만. 물론 이때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검증하는 기관의 신뢰도나, 또 왼손 오른손의 비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등등의 논란.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또 다른 문서, 즉 그 USB에 담긴 내용들로 인해 스스로들이 판 함정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5
동준과 해선은 어르신의 서재에서 가져온 USB의 동영상을 모두 살폈다. 실내에서 움직임이 있을 때만 작동되는 카메라라서 화면이 자주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 72시간 계속 촬영되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모두 살펴보는 데 끔찍하게 지겨웠을 것이다.
그 동영상은 USB나 왼손 서명 이상으로 큰 수확이었다. 어찌된 이유인지 모르지만 뒷부분에 가서는 동영상은 없이 시커먼 화면만 계속 나오고 있었으나, 앞부분에는 아주 선명하게 화면이 잡혀 있었다. 뒷부분은 아마 화분이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카메라 렌즈가 엉성한 부엽토 속으로밀려들어가서 묻혀버린 탓에 그랬던 모양이다.
어떻든 동영상은 엄청난 것이었다. 동영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 대부분 어르신이고, 가끔 사모님이나 가정부가 등장할 뿐이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문제는 전화통화 내용이었다.
그것을 통해 어르신이 어떤 사람들과 접촉하는지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대화도 고스란히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내용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스웨덴 무기업체의 최정명 지사장과 대화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최정명은 어르신, 즉 신형석이 과거 국회 국방위원장이었다는 점을 이용하여 국방부가 스웨덴제 무기를 적극적으로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이것은 주로 과거 국회의장을 지내고 현재는 은퇴한 경회식의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회식과 최정명, 그리고 신형석 사이에 문서가 오가는 것은 극도의 보안을 위해 우편이나 이메일 등은 사용하지 않고 인편, 즉 경회식의 딸이자 최정명의 아내가 담당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서류 전달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게다가 경회식과 신형석은 새로운 정당인 미래공영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경회식이 자신의 사위 최정명을 경회식의 과거 지역구에 심어놓아서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신형석도 뒤에서 최정명의 국회 진출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경회식, 신형석, 최정명, TS Stockholm Korea, 더 나아가 일본과 연결되는 카르텔이 형성된 것이다.
이밖에도 신형석은 일본 극우단체와 연결되어 한국 내 친일파 네크웍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제공되는 거의 무제한의 자금을 공급 받아서.
게다가 최근에는 10여 년 전에 취소되었다가 다시 시작된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추진 중이었다. 독도 중립화 음모.
동준은 또다시 어르신에게 전화했다. 자신이 독도 문서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며 그것을 알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는 대신 어르신에게 먼저 알리겠다는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도 잣죽 세트와 꽃다발, 그리고 동양란 화분을 들고 그 저택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일층 식탁에 잣죽 세트를 올려놓고, 화장실에 가서 정성 들여 꽃을 다듬어 화병에 꽂아서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화병 주위를 돌며 음미했다.
꽃 참 예쁘다. 무엇보다도 풍성해서 좋네.
동준은 세상은 알고 보면 참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모두가 만들어가는 정의로운 세상.
그러나 ‘정의’롭다는 단어가 들어가자 동준은 어딘지 마음이 찔리는 것이었다. 그동안 정의보다는 자신의 ‘편의’에 따라 살아온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正義) - 사회나 집단 공동에게 합당하고 올바른 도리.
편의(便宜) - 살아가면서 환경이나 여건 등이 편하고 좋은 것.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차이가 나지?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정의와 편의에 대한 설명이 한자에 따라서 달랐다.
정의(情誼) - 사람끼리 서로 가까워져 이루어진 정.
편의(偏意) - 공평치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진 마음이나 뜻을 일컬음.
이 경우 정의나 편의는 둘 다 비슷해 보였다. 서로 통하는 것이다. 서로 사귀어 친해지면 당연히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지 않나? 동준은 자신이 지금까지 편의에 의해 살아왔다는 것도 보는 각도만 살짝 돌리면 정의 쪽으로도 갈 수 있겠다고 억지를 부리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동준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동양란을 들고 서재 문 앞에 섰다.
동준이 살짝 노크하자 이번에도 헛기침 소리가 났다.
동준이 문을 살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르신이 팔짱을 낀 채 서서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책상 앞으로 나와서. 무서운 얼굴로.
아이, 깜짝이야.
동준은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한 다음 곧바로 어르신 따님 액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액자 옆에 놓인 화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동준이 새로 가져온 화분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움직거리며 각도를 조절했다.
그리고 나서 동준은 어르신 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주머니에서 USB를 하나 꺼냈다.
“이것은 처음에 동양란 화분 가지고 왔을 때 심어놓았던 몰래카메라의 USB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에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찍혀 있더군요. 통화내용하고요. 아무래도 이것을 저 혼자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어르신에게 갖다드리려고 왔습니다.”
동준은 이렇게 말하고 어르신 앞으로 가서 두 손으로 USB를 내밀었다.
그러나 어르신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동준을 바라보기만 한다. 정말로 아무런 표정도 없이.
동준은 USB를 더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 뒤 어르신이 마지못한 듯 주저하는 손으로 USB를 받는다.
동준은 몸을 돌이켜 따님 액자 쪽으로 가서 바닥에 놓아둔 화분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화분 속을 뒤져 몰래카메라 USB를 꺼내어 어르신 쪽으로 들어올렸다.
“거듭 죄송합니다만, 여기에 또 몰래카메라를 숨겨두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동준은 다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뒤에 얼굴은 어르신을 향한 채, 그러나 손으로는 액자 옆에 새로이 올려놓은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화분에도 또 몰래카메라를 심어놓았습니다.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이것은 다음에 가지러 오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동준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재 문을 열고 나서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리고서 말했다.
“참, 그 독도 서명, 왼손으로 하셨더군요.”
그러나 어르신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눈 밑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인 듯했을 뿐이다.
6
동준과 해선은 며칠 동안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USB에 담았다.
“해선아, 네가 한 방송국을 골라봐.”
“싫어요. 난 방송국 잘 몰라.”
“그럼 어떤 곳에서 이 자료 잘 방송해 줄 것 같니?”
“그것도 몰라.”
“그럼 신문사는?”
“그것도 모르고.”
“유튜브에 올릴까?”
“몰라.”
“그럼 뭘 알아?”
“하나도 몰라.”
동준은 해선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디 아프니?”
“몰라.”
동준은 다시 해선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쯧쯧쯧……. 애 다 버렸군.” 동준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나가서 방송국 갖다올게. 같이 갈래?”
해선이 고개를 흔든다.
동준은 오피스텔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려다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애인할까?”
그러자 해선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장으로 대답을 한다.
“피―! 됐네요. 부녀 사이라며?”
7
뉴스마다 방송마다 하루 종일 한 가지 사건으로 도배가 됐다.
그리고 그날 저녁 TV 화면에 긴급속보 자막이 떴다.
신형석 전의원 자택에서 목매달아 자살
[에필로그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