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

by Rudolf

1


인희는 공장 식당의 일이 싫지 않았다. 물론 돈은 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지금 처지에 어디 가서 돈을 받고 일을 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은 잘 대해 주고 있었다. 팔덕이 처음 몇 번은 요란한 몸짓을 하며 찾아왔었으나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 밤중에 공장 밖에서 어둠 속으로 숨는 팔덕의 모습을 본 듯했으나 그 이후에는 아예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사람들 수군거리는 소리에 의하면 사장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인희는 무슨 일인가 궁금했다.

봄날이 시작되려는 어느 날 오후, 빨래를 식당 뒷문 밖에 널고 있는데 저만치서 어떤 남자가 서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인희는 볕이 따사로워서 금방 마르겠네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문득 그 시선을 느낀 것이다. 공장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전에도 몇 번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 안으로 심부름 갔을 때나 사무실 근처까지 올라갔을 때, 또는 공장 문 밖에 나갔을 때 혹 그런 느낌이 몇 번 들지 않았었나……?

전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궁금해졌다. 누구지? 고개를 돌려 빤히 바라볼 수는 없지만 그 윤곽만으로 어딘지 한번 보았던 사람 같기도 했다. 모자를 눌러쓴 모습……. 혹 저번에 팔덕과 어떤 공장에 갔을 때 만났던 사람인가……. 학교 선생님같이 엄숙하고 단정했었지 아마 그분……. 그리고 그때 자기를 빤히 쳐다보았던 것 같은데…….

인희는 서둘러 빨래를 널고 식당 뒷문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막 밤다리 할멈이 나오려 하다가 인희와 마주치고서 말을 한다.

“얘, 너 사장님께 이것 좀 갖다드리고 오너라.” 밤다리 할멈이 깨끗이 빨아서 개어놓은 걸레 한 무더기를 건네준다. “떨어뜨리지 말고 조심해서 갔다와.”

“네, 알았어요.”

밤다리 할멈은 미스 곽이 오늘 사무실 안을 봄맞이 청소하려나 보다고 말했다.

인희는 걸레 더미를 받아서 고개를 까딱하고는 밤다리 할멈이 열어주는 식당 문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 이제는 익숙해져 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상 들려오지 않았던 기계소리가 오늘은 귀를 따갑게 했다.

인희가 계단을 올라 사무실 문 앞에 가서 서자 안에서 누군가가 알아차렸는지 문을 열어준다. 미스 곽 언니였다. 안에는 늘 그렇듯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까지 더해서 그 안은 늘 흐릿하고 탑탑했다.

“응, 왔구나. 이리 줘.” 미스 곽이 말을 한다.

인희는 걸레를 건네주고 잠시 쭈뼛거렸다. 혹 무슨 일을 더 시키지는 않을까 해서.

“그래, 됐어. 가봐.”

문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인희는 안에서 몇몇 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 정 선생은 왜 아직 안 오는겨? 변소깐 간다고 하지 않았어?”

“뭔 신경을 그렇게 써요? 그 친구 올라와도 이런 거 안 해.”

“그 양반한테 양말이래두 좀 슬쩍슬쩍 빼오라구 해봐. 양말공장에 있다면서.”

“이 사람, 정 선생을 몰라두 한참 모르는구먼.”

“그런데 그 양반 요즘 여기 자주 오네. 김 사장은 그 양반 잘 모르지?”

“자자자자, 이거나 받고 빨리 합시다. 여기 대청소한다잖아. 미스 곽, 이번 판 빨리 끝낼게.”

아 그래, 맞아. 저번 그 양말공장!

그런데 그 순간 인희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아니, 그런데 왜……?

사장도 가끔 식당에 와서 무심한 척하면서 자신을 쳐다보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그분은 자기를 받아들이고 밥 주고 재워주는 것이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늘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저분은 왜 그런다지?

“엄마!”

인희는 골똘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다.


2


팔덕은 기분이 아주 나빴다. 미스 곽양을 통해 손 사장이 다시는 공장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손 사장과 마주칠 일 없는 시간, 즉 아침 일찍과 저녁때 몇 번 찾아갔었다. 인희는 밤다리 할멈과 함께 식당에서 일하고 자고 했다. 팔덕은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피해 건물 옆으로 돌아 식당 뒷문 쪽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가끔 공장 사람들과 마주치면 넉살좋게 인사하고 양담배 몇 개비를 건네주면 좋아하며 가곤 했다. 그러나 한번은 팔덕이 찾아갔을 때 인희가 미적거리며 불편해 했다. 밤다리 할멈이 인희에게 야단쳤던 모양이다. 팔덕을 만나지 말라고 했겠지. 그 뒤 팔덕이 또다시 찾아갔을 때 인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더 이상 자기를 찾아오면 야단이 날지도 모른다고 말을 했다.

그 뒤부터 팔덕은 몇 번 저녁 늦은 시각에 공장 근처 멀찌감치에서 혹 인희가 밖으로 나오지는 않을까 지켜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한번은 정말로 인희가 공장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살금살금 쫓아가 말을 걸려 했으나, 그 순간 밤다리 할멈이 쩔뚝거리면서도 급히 뒤따라와 멀리서 인희를 부르는 것이었다. 팔덕은 얼른 어둠으로 숨었다. 아마도 밤다리 할멈이 심부름시키려고 인희를 혼자 내보냈다가 마음이 안 놓여 함께 가기로 하고서 쫓아나온 듯 헉헉거리며 인희에게 다가가서는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인희가 할멈을 돌아보는 순간, 팔덕은 인희가 자신의 모습도 알아차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희가 할멈과 함께 저쪽으로 걸어가면서 뒤를 흘끔 돌아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팔덕 자신은 어둠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팔덕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공장 근처를 서성거렸으나 인희를 볼 수 없었다. 팔덕은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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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희는 가끔 공장 밖에 나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거나 오후에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을 보면 멀거니 쳐다보곤 했다. 부러운 걸까? 아니, 그런 감정과는 달랐다. 동화나 옛날이야기 속 장면. 그렇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를 밖에서 안을, 아니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그 장면에서 나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자신과는 무관한 세상이 저렇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와 인국도 다른 세상에 가 있다. 자신이 사는 이 지상이 아니라, 이제는 상상이 되어버린 머나먼 다른 세상. 혹시 자기 자신이 다른 세상으로 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알던 사람들에게서 떠나 전혀 존재하지 않을 듯한 상상의 어떤 세계로. 그렇다고 인희가 이러한 생각들을 직접 해 나간 것은 아니다. 망연히 서서 남들을 바라보는 인희의 감정을 글로 나타내자면 이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인희는 얼굴에 살이 붙고 햇볕에 탄 기운도 사라져 화사하게 보였다. 아리하던 몸도 좀 나아졌다. 몇 달 만에 아주 약간이지만 키도 좀 커진 것 같고. 아무튼 보기 좋았다. 처음에는 서먹했던 공장 직원들과도 친해졌고, 공장 안팎을 스스럼없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말은 거의 없었다.

요즘 인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왔다. 팔덕이 자신에게 약속한 것은 이게 아니다. 자신 하나 잘 먹자고 할머니와 인국을 버리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집 소식도 궁금했다. 잘 있는지. 정말 잘 있는 건지……. 그 생각만 하면 인희의 가슴에 묵직한 것이 올라온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아, 지금 죽을 수 있다면…….

밤다리 할멈과 인희는 많은 말은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로 잘 알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밤다리 할멈이 아무 말 없이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면 인희는 그 마음 다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인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온 할멈의 인생이 다 보이는 듯했다. 인희가 울고 있을 때 할멈이 등을 쓰다듬어 주면 자신의 마음이 다 할멈에게 건너가는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 나 돈 벌어야 해요. 우리 할머니에게 돈 보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돈 벌 수 있어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인희가 할멈에게 물었다.

할멈은 그냥 가만히 바라다보기만 한다.

“할머니…….”

인희는 말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뚝 떨어뜨리고는 눈을 훔쳤다.


팔덕이 밤다리 할멈을 통해 인희에게 연락을 해왔다. 팔덕을 만나면 안 된다고 펄펄 뛰던 할멈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미제 물건 한 다발 쥐어주었을 테지. 그게 가장 팔덕다운 짓이니까. 아무튼 인희는 밤 9시 넘어 인쇄소에서 밖으로 나가 야채가게 뒤로 돌아가서 주변을 살폈다. 날도 그리 춥지 않고 보름달이어서 주변은 잘 보였다.

“이쪽이야, 인희야.”

한쪽 골목에서 살짝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인희는 전봇대를 끼고 돌아 들어갔다. 담배 냄새가 확 풍겨온다.

“팔뜩이 오빠.”

“잘 지냈니? 살 좀 찐 것 같은데?”

인희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한편으로는 겁도 난 것이다.

팔덕이 골목 바깥쪽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나 빨리 들어가야 돼. 안 그러면 쫓겨나.”

인희가 쭈뼛거리듯 말했다. 그때 팔덕이 갑자기 뛰듯이 다가와서 인희의 팔을 붙잡는다.

“지금 나하고 가야 돼.”

인희는 팔을 빼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팔덕이 힘을 더 주며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긴다.

“어디를? 나 빨리 들어가야 한다니까.”

“내 말 잘 들어. 너 거기 백날 있어 봐야 헛거야. 그 노랭이 사장놈이 너 일만 죽어라 시키고 돈은 한 푼도 안 줄 거라고. 너 할머니한테 돈 보내야 된다고 했잖아. 내 말 맞지? 내가 너 돈 벌 수 있게 해줄게. 너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잖아.”

팔덕은 인희의 팔을 잡아끌며 골목 반대편으로 향했다. 인희는 울상을 지으면서 저항했으나 그리 필사적은 아니었다. 돈……. 할머니……. 인희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이대로 끌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몸은 나약하게 버티는 것이었다.

팔덕은 억셌다. 게다가 사람의 심리를 기막히게 꿰뚫는 본능도 있었다. 인희가 결국에는 따라올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와 인국의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인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다.

팔덕은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어 인희 눈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내일 할머니에게 보내자. 나하고 우체국 가서 보내면 돼. 여기 있으면 이런 거 생전 만져보지도 못해.”

“나 들어가서 가져올 것도 있는데…….”

인희는 무너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 11시 가까이 되어 왕십리 그 헛간에 도착했다. 인희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짚을 깔아놓은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숨도 차고 다리도 아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 옳은 일인지 판단할 수도 없었다.

“나 공장에 다시 갈래.”

인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는 소리로 말을 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밤다리 할머니가 기다린단 말이야.”

팔덕은 아무 말 없이 초콜릿을 내준다.

인희는 고개를 저었다.


인희는 헛간 판자에 기대어 무릎을 세운 채 손으로 깍지 끼고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어느 틈엔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났을 때는 모로 누운 상태에서 담요가 덮여 있었다. 마른 짚 냄새. 싸늘한 공기.

인희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판자들 틈으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주변, 어색하기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여기가 어디인지 순간적으로 혼돈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밤다리 할머니! 나를 찾을 텐데…….

인희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한번 와서 잤던 곳. 팔덕의 공기가 배어 있는 곳. 침침하고 어질러진 주변. 가마니와 짚을 깔아놓아서 마치 방앗간이나 광 같은 곳. 그러나 크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해곶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었다.

팔덕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세상에서 떨어져 혼자만 남은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곳. 버려진 곳.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자기 혼자만 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했다. 인희는 바닥에 다시 주저앉아 눈물을 훔쳤다. 자신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 뒤이어 판자를 옮기는 소리. 삐거덕, 턱, 탁탁탁. 그 소리가 몇 번 반복되더니 갑자기 헛간 안이 환해진다. 인희는 앉은 채로 그대로 있었다. 돌아다보고 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았다. 손으로 눈물을 닦고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팔덕이 들어왔다.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팔덕이 서성거리는 소리. 그러다가 인희 앞에 마주앉는다.

“일어났니?”

인희는 가만히 있었다.

“잘 때 춥지 않았어?”

그 목소리는 주변에서 팔덕에 대해 험담하던 그런 사람의 느낌이 아니었다. 못되고 음흉스럽고 간교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팔덕이 자기에게 대하는 모습은 그런 종류와는 너무 달랐다. 인희 자신도 팔덕이 선량하고 유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적어도 인희에게만은 의지할 수 있게 모든 것을 베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해곶에서 팔덕을 따라 여기까지 왔을 리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팔덕에게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상황이 서러웠다. 한없이 서러웠다.

“내가 물 떠왔으니까 나가서 씻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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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덕은 멀리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근처에서 어물거렸다가는 붙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자기와는 완전히 떨어지게 된다고 했다. 인희는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나도 여기 완전히 닫아놓고 갈 거야. 다른 데다 숨어 있을 곳 만들어 놨어.”

인희는 팔덕을 올려다보았다. 팔덕의 모습이 안돼 보였다. 나 때문에 팔덕 오빠가 고생하고 있구나…….

팔덕은 변명하듯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인희를 안심시키려는 것이겠지. 그러나 인희는 그러한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희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팔덕이 서울로 가자고 했고, 양말공장으로 가자고 했으며, 거기에서 또 인쇄소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

어디든지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팔덕이 데려다주겠지.

이른 봄이지만 날은 따스했다. 팔덕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길로 인희를 데리고 갔다. 다리가 아프지만 인희는 말없이 쫓아갔다. 팔덕은 휘파람도 불고 노래도 하며 인희에게 이것저것 자랑도 하며 걸어간다. 자신은 절대로 서울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을 골탕 먹인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인희로서는 그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간 곳, 참으로 멀리멀리 온 것 같았다. 한강 너머 영등포 지나 고불고불 터덜터덜 들어가서 버스에서 내린 허름하고 한적한 동네 철산리라는 곳. 왕십리나 성수동과는 정반대쪽이라고 했다. 철산리는 서울의 남쪽, 구로동 서쪽에 있으며 가내수공업을 하는 곳들이 많았다.

인희는 종이상자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제법 널따란 개천인 목감천을 끼고 한쪽에는 허름하고 규모가 작고 지저분한 건물의 여러 공장이 주욱 늘어서 있었고, 개천 건너편은 논이었다. 그 너머로는 허름한 동네와 학교가 보였다.

공장 건물은 이층이었으며, 일층에 공장이 있었다. 이층에 사무실과 창고, 숙소가 있었는데 여러 짐이 어지럽게 쌓여 있어서 들어가고 나오는 것도 힘들 정도로 비좁았다. 밤이 되면 인희는 이층 숙소에서 여러 여직원들과 함께 잤다. 대개는 인희보다 대여섯 살 많았으며, 쉰이 넘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3개월은 배우는 과정이어서 한 푼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이 숙달되면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인희는 희망이 생겼다. 서울에 올라온 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돈이라고는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조금만 참으면 할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다. 지난번 왕십리에서 나올 때 팔덕과 우체국에 가서 집으로 아주 적은 돈을 보낸 적 있다. 그 돈은 팔덕이 인희를 서울로 데리고 온 책임으로 주는 것이라 했다. 팔덕은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고 했지만 인희는 감격스러웠다. 체신환에 인희의 이름을 적고 해곶 할머니 집 주소를 쓸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지. 할머니가 그 돈을 받으면 인희가 살아 있다는 것도, 자기가 할머니와 인국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도 다 아실 것이다. 그러한 감격을 인희 자신이 몇 달만 지나면 또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매달매달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인희는 처음에는 물 길어오고 연탄 갈고 청소하고 심부름하는 일을 했다. 하루종일 아래위층 종종걸음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 나중에는 종아리가 굳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걸레로 공장 구석구석 닦고 쓰레기 모아서 내다버리고 언니들 일하는 동안에 빨래도 대신 해주었다. 언니들은 인희와는 일이 다르지만 하루종일 똑같은 일 하고 또 하면서 종이먼지 먹고 기침해 대고 나면 목 어깨 팔 다리 허리 어디 한 군데 안 쑤시는 데 없다고 했다. 잘 때는 모두 끙끙거리며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인희가 잔일을 다 해주어 편하기보다는 그 때문에 책임 생산량이 더 많아져 오히려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세상사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으로 정확히 표현은 못 해도 보는 눈 있고 듣는 귀 있으며 눈치는 없더라도 코치라도 좀 있으면 알 것은 다 알게 된다. 한마디로 언니들에게 인희는 오히려 신발 속에 들어 있는 모래알갱이 같은 존재였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걸을 때 늘 신경 곤두세우게 만든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불편하고 두 발자국 뗄 적마다 걸리적거린다. 한마디로 그 상태로는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인희의 크고 작은 실수는 처음에는 어려서 또는 처음이라서 하며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경험 없고 나이 적은데다가 환경 험한 곳이다 보니 소소한 잘못들도 쌓이다 보면 눈덩이가 된다. 그것은 곧 인희에 대한 가차 없는 학대로 이어졌다.

팔덕이 가끔 공장으로 인희를 찾아왔다. 사촌오빠 신분으로. 그때마다 인희가 여기저기 멍든 것을 보고 물었다. 그러나 인희는 대답 없이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는다. 물건 옮기다 넘어지고, 기계에 부딪히고, 문턱 넘어서다 걸려서 팔에 잔뜩 쌓아올렸던 상자들 다 쏟으면서 자빠지고 해서 이래저래 멍들 일은 많다. 계단에서 구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 팔덕도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나, 인희가 눈물짓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뺨에 손자국까지 나 있으니.

팔덕은 공장 안으로 뛰다시피 들어갔다. 30대 초반의 주임이 마주 오면서 인상을 찡그린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씨×, 비켜!”

“뭐? 이 새끼가…….”

주임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팔덕이 주임을 확 밀치고 공원들 작업대로 뛰어간 것이다.

“야, 이 씨××들아, 인희 얼굴 누가 그렇게 해놨어?”

팔덕은 가까이에 쌓아놓은 상자 더미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근처에 있던 여공이 비명을 지른다.

“니들, 한번 더 내가 그 꼴 보면 여기 확 불 질러버릴 거야, 이 씨××들아! 어떤 ×이 그딴 짓 한 거야?”

주임이 뒤쫓아와서 팔덕의 팔을 붙잡는다.

“이 새끼 이거 뭐야?”

주임이 팔덕을 돌려세우고 주먹을 치켜든다. 그러나 늘 그렇듯 팔덕이 한 박자 더 빨랐다. 머리로 주임의 가슴을 들이받은 것이다. 주임은 뒤로 나자빠졌다. 팔덕은 그 옆을 지나 뛰쳐나가면서 쌓여 있던 상자 더미들 몇 개를 손으로 치고 밀고 해서 넘어뜨렸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팔덕은 공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장 건물 옆에 난 이층 계단으로 달려가서 그곳 아래턱에 앉아 있는 인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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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멀리 떨어진 개천가 작은 바위에 앉아서 팔덕과 인희는 느릿하게 흐르는 구정물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봄이 익어가서 햇볕은 따사로웠다. 죽어라 뛰어온 탓에 목과 이마에 난 땀도 이제는 다 식어 있었다. 성깔 사나운 고양이 콧잔등 성할 날이 없다고 했나, 조용하다가도 팔덕이 끼어들면 늘 이런 식으로 끝난다.

팔덕은 피우던 담배를 구정물 속에 던져넣고 여전히 등을 구부린 채 중얼거리듯 말한다.

“씨×, 다 죽여버릴 거야.”

인희는 말없이 구정물을 타고 떠내려가는 담배꽁초를 눈으로 좇았다. 돌멩이에 부딪혀 몇 바퀴 돌더니 뒤이어 밀려오는 구정물에 떠밀려 또다시 흘러간다.

“조까튼 새끼들.”

팔덕은 침을 탁 뱉는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

“가자!”

갑자기 팔덕이 벌떡 일어서면서 말한다. 인희는 고개도 들지 않고 흐르는 구정물만 바라보았다. 팔덕은 뒤로 홱 돌아서서 둑 비탈에 나 있는 풀들을 짓밟고 올라갔다. 그리고는 둑 위로 올라서서 뒤돌아보며 아래를 향해 말한다.

“가자니까!”

인희는 눈을 반쯤 내리깔고 천천히 일어섰다. 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느릿느릿 묵묵히 발을 내디뎠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따라와.”

팔덕이 인희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서서 걸어가며 말을 한다.

인희는 조각구름 몇 덩이 떠 있는 하늘 아래로 팔덕을 따라서 걸어갔다. 해곶에도 이런 개천이 많았지. 그 옆쪽 길을 따라서 많이 걸었었다. 아이들과 어울려서. 동생 인국은 늘 다른 남자애들과 장난치면서 저만치 뒤에서 따라오곤 했지. 그러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싸우고 얻어터지고 울고 하면서 함께 걸었던 그 길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해곶의 그 길들로. 집에 가고 싶어. 마당에 피어나던 봄꽃들. 할머니하고 잔돌 골라내며 흙담장 바깥으로 돌아가면서 심었던 대파. 뒤란 옆 장독대 뒤 거미줄 사이로 핀 무궁화꽃에서 앵앵거리던 날벌레랑 무당벌레나 풍뎅이, 물 빠진 갯벌에서 몽당치마 걷어올리고 요망조망 거닐 때 발가락 사이로 간지럽게 비집고 올라오던 검고 진득한 개펄, 저 멀리 날던 갈매기 쳐다보며 하얗고 파아란 꿈을 꾸던 그곳 넓은 바닷가 돌밭.

인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앞을 바라보고 팔덕의 콧김 오르는 뒷잔등을 뒤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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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간 곳은 서울 서북쪽 구파발 조금 지나서 음습한 산이었다. 버려진 철로 옆을 따라 길게 무허가 목조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진흙 길바닥에 버려진 찌그러진 깡통, 찢어진 신문지, 깨진 술병, 끊어진 철삿줄, 음식찌꺼기, 사발조각, 개똥 등등을 피해서 두 사람은 걸었다. 구파발은 예로부터 특히 중국과 서신을 교류하기 위해 파발이 처음 출발하는 곳이었으며, 그 일대는 야산이 많고 군사시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무허가 건물 촌을 지나 그 길을 한참 걸어가자 나무가 무성한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졌다. 산에 올라가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철조망 쳐진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 또다시 잠시 돌아가자 철조망 쓰러진 곳이 나왔다. 그곳을 넘어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나무들 사이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군용텐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옆에 마치 공중변소처럼 생긴, 낡을 대로 낡은 목조 창고가 쓰러지기 직전처럼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군용텐트 앞은 여러 가지 잡동사니로 어지러웠고, 그곳과 창고 사이에는 크고 넓적한 돌판 몇 개가 놓여 있어서 그것을 밟고 창고로 향했다.

팔덕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창고 문에 달린 작은 자물통에 밀어넣고 돌렸다. 팔덕이 문을 열자 안에서 쾨쾨한 냄새가 확 풍겨나왔다.

“여기가 새 아지트야.”

창고 안은 제법 컸다. 아마 과거에 산지기 움막 같은 것으로 사용되었던 곳인 모양이다.

“여기는 아무도 못 찾아.”

팔덕은 촛불을 켜고서 창고 안에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것들을 대강 정리했다.

지난번 헛간보다는 훨씬 넓었을 뿐만 아니라, 팔덕이 깔끔하게 정돈해 놓았던 덕에 인희는 어딘지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여기에서 이틀 동안만 너 혼자서 지내. 내가 먹을 것 전부 마련해 두었으니까 이 안에서만 있어도 돼. 밖에 나가더라도 철조망 쪽으로는 가지 말고 이 근처에서만 다녀. 알았지?”

팔덕은 낡은 가죽가방, 군용가방, 종이상자 등을 하나하나 열어보고 이것저것 꺼내어 작은 선반에 늘어놓았다.

“이거 통조림, 빵 같은 것들인데 많지는 않지만 이틀 동안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거야.”

팔덕은 군용수통을 몇 개 가지고 오면서 말을 이었다.

“창고 뒤로 몇 발자국 들어가면 작은 우물이 있어. 뚜껑을 덮어놨으니까 열고서 물을 길으면 돼. 여기 수통에다 담아서 가져와. 밥 할 줄 알지? 쌀하고 보리도 좀 있으니까 창고 뒤에 쌓아놓은 장작으로 밥 하면 돼. 거기 솥도 걸려 있고 다 있어.”

인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저기 앉아봐.” 팔덕은 군용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서 자면 돼.” 인희가 가만히 서 있자 팔덕이 재촉한다. “가서 앉으라니까.”

인희는 느릿느릿 그리로 걸어갔다. 앉으려고 했으나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긴장도 하고 너무 많이 걸어 다리가 뻣뻣해진 모양이다.

“여기 잘 둘러봐. 나 지금 나갈 거니까 문 잠그고 조심해서 있어. 절대 멀리 가지 마. 밤에는 촛불 하나만 켜놓고, 가능하면 일찍 자. 무서워하지 말고. 내가 이틀 뒤에 올 테니까 그때까지 꼼짝 말고 여기 있어야 해.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인희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틀만 참아. 모레 아침 일찍 올 거야. 오늘하고 내일만 혼자 있으면 돼. 다른 데 가면 안 된다. 알았지?”

인희는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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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팔덕은 사실 요즈음 상황이 안 좋았다. 미제 물건들을 그전처럼 쉽게 구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지난번 용산에서 도망친 이후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후암동이나 한남동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러나 낯선 곳인데다가 혹 너무 나대면 소문이 나서 용산 사람들 귀에 들어갈까 염려되어 가능한 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려 조심했다. 그러다 보니 팔 물건들이 점차 줄어들어갔다.

팔덕은 심통쟁이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양말공장. 팔덕 자신을 늘 매섭게 노려보며 달갑잖게 생각하는 그 재수 없는 심통쟁이. 팔덕이 가장 잘하는 것은 첫째, 남을 후리는 일, 둘째로는 매수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심통쟁이는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 공장에서 한 짓을 거의 눈치채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 일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은 것만은 천만다행이다. 바로 그거였다.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다면 별 상관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 말은 심통쟁이에게는 자기 자신의 이익이 늘 최우선이라는 뜻이다.

팔덕은 큰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미제 물건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탐내는 것들만 모아서 가방에 넣었다.

어스름한 저녁, 다른 직원이 다 나오고 공장에 불이 하나둘 꺼져갈 때 심통쟁이 아주머니가 혼자서 공장을 나선다. 다른 사람들은 두셋씩 짝을 지어 일찌감치 나왔지만 심통쟁이만은 느지막하게 혼자서 공장 문을 나서서 몸을 구부정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심통쟁이가 큰 길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가는 순간, 팔덕이 뒤따라가며 불렀다.

“아주머니, 저 팔랑입니다.”

심통쟁이가 우뚝 멈춰서서 돌아보며 인상을 쓴다.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너 그 여자애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네? 무슨 말이세요?”

“네놈이 꼬드겨서 저 그 뭐라더라, 그 뭔 인쇄소에서 일 잘하는 애 꼬드겨서 빼돌렸잖아!”

“아, 아녜요, 아녜요. 그 애가 몸이 약해서 인쇄소 같은 데선 일 못해요. 제가 집에 데려다줬어요. 시골에.”

“요놈 봐라? 너 그 소문 여기서 파다해. 날 속이려고 해? 그 인쇄소 영감이 너 잡겠다고 난리쳤어.”

“아니라니까요. 저 잡으려면 벌써 잡았겠죠. 늘 이 근처 맴도는데. 제가 어디 가겠어요?”

심통쟁이는 팔덕의 속셈을 파악하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 음흉한 놈이 이 어스름한 시각에 나한테 일부러 왔겠다?

“뭐 하는 짓이야? 이 시간에 나한테 와서.”

팔덕의 속셈이나 심통쟁이의 속셈이나 그게 그거였다. 배짱만 맞는다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팔덕은 물질을 주고, 심통쟁이는 정보를 주고. 상부상조.

팔덕의 제안은 이러했다. 양말공장에서 나온 불량품을 팔덕이 빼내는 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 양말은 다시 실을 푼다 해도 별 사용가치가 없어서 한곳에 모아 나중에 폐기처분하거나 고아원 같은 데로 보낸다. 팔덕이 그 공장에서 일할 때는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에 대한 정보를 흘려버리고 말았었다. 그러나 불량양말을 빼돌릴 수 있다면 솔솔찮은 재미를 볼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심통쟁이와 그 재미를 나눠갖겠다는 것이고.

심통쟁이는 팔덕이 건네준 미제 물건에도 마음이 흡족했다.

하지만 심통쟁이는 자신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미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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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팔덕이놈이 요즘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 같다는데…….”

심통쟁이는 지나가는 말처럼 슬며시 던졌다. 정 선생과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

“애들이 수군거려. 퇴근길에 저 아래에서 골목 들락날락하는 걸 봤다나 뭐…….”

정 선생이 걸음을 멈춘다.

“그 썩을 놈이 여기 애들 호릴까 걱정이야. 그 저 뭐라나, 그 인쇄소 애처럼.”

심통쟁이는 팔덕과 인희가 양말공장에 다녀간 뒤 정 선생이 전에 없이 부쩍 한성인쇄소로 발걸음이 잦은 것을 흥미 있게 지켜보았었다. 또한 그 두 애가 찾아왔었던 날 비쩍 마른 예쁘장한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두는 것에도 거미줄같이 가느다랗지만 어딘지 끈적한 호기심이 일었었다. 게다가 그 애가 어느 날 밤 (아마도 팔덕과 함께) 도망쳤다는 소문이 돈 뒤에 정 선생이 거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 것을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아무렴 팔덕이 놈 짓이겠지 그럼 누구겠어? 처음부터 여기에도 그놈이 데리고 왔었고, 인쇄소에도 그놈이 데리고 갔더라던데.) 참으로 묘했다. 늘 얌전하고 말없이 일만 하던 정 선생이 그 애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난 뒤로 뻔질나게 인쇄소 영감을 찾아가 경찰에 신고해야 되네 마네 설쳤다는 말도 들었던 것이다. 정 선생이 하도 난리치는 바람에 그곳 미스 곽양이 양말공장에까지 와서 그 애하고 정 선생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기까지 했었으니까. 요즘 세상에 야반도주하는 애가 어디 한둘이야. 그런 거 신고한다고 경찰이 퍽도 찾아나서겠다. (아무튼 그 아이가 도망친 탓에 애꿎은 밤다리 할멈이 사장에게 닦달을 당하고 또 당하고 하도 당하는 바람에 억울하다며 소주 됫병을 그대로 목구멍에 들이부어 거기서도 죽네 사네 꼴불견이었다고 한다.)

심통쟁이는 바지에 묻은 실밥 하나를 떼어내어 탁 던져버리고는 타박타박 걸어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통수가 간지럽긴 하지만 가까스로 돌아보지 않았다. 자기 딴에는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정 선생이 밤 9시 조금 넘어서 공장 문을 모두 잠근다는 것을 심통쟁이는 잘 알고 있었다. 심통쟁이뿐만 아니라 온 공장 사람이 다 아는 것이니까. 그 시간 무렵에 팔덕과 공장 가까운 골목에서 만나 ‘정보’를 건네주기로 약속했다.

다음날 심통쟁이는 이번에도 정 선생과 지나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그놈이 간뎅이가 부었나, 아예 요즘은 밤쾡이처럼 공장 문 근처까지 와서 서성거린다나 봐. 그 맞아뒈질 놈이.”

그것으로 됐다. 이제 팔랑이 놈은 아웃. 불량양말은 몽땅 내 거다, 이놈아.


5


정 선생은 팔덕의 뒤를 멀찌감치에서 계속 쫓아갔다. 그놈을 뒤쫓으면 인희에게 가 닿을 것이라 믿었다.

정 선생은 공장 건너편 골목 그림자 속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팔덕의 꼬리를 잡았다. 낮에 미리 시장에 가서 선글라스와 마스크, 중절모와 등산모 그리고 등산복, 게다가 색이 완전히 다른 윗도리 둘을 샀다. 그리고 혹시 어디선가 밤을 지새울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그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서 배낭에 쑤셔넣었다.

놈은 10시가 넘어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다. 어딘지 낭패감이 있는 모습이었다. 어깨를 숙이고 소리 없이 걸어간다. 가끔 침도 탁 뱉고. 담배도 물었다 금세 던져버리기도 하고.

정 선생은 놈을 뒤쫓아서 길고 긴 밤길을 걸었다. 조심성 많을 놈이지만 어쩐 일인지 주변을 살피거나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무슨 생각엔가 골똘한 것 같았다. 구름이 살짝 끼어 달은 밝지 않았으니 저 멀리 가는 놈의 윤곽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정 선생은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몇 번인가 놓칠 뻔했으나 다행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 뒤따를 수 있었다.

팔덕이 도착한 것은 허름한 헛간이었다. 밤이어도 그 정도는 짐작이 갔다. 팔덕이 헛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정 선생은 급히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아직 통행금지 사이렌은 불지 않았다. 저놈도 통금 때문에 이 밤에 이동하지는 못하리라.

다음날 새벽 아직 사위가 캄캄할 때에 정 선생은 집을 나서서 그 헛간 쪽으로 갔다. 통금이 풀리기 전에 미리 그곳 근처에 있는 방앗간으로 가서 숨어 있기로 한 것이다. 정 선생은 어제 저녁 8시경 사장 집에 전화를 걸어 부인에게 급한 일로 시골에 다녀오겠다고 연락을 해두었다.

팔덕은 일을 재빠르게 처리하는 놈이기에 무슨 일이 있다면 틀림없이 새벽부터 서두를 것이라 생각했다. 정 선생이 볏짚 사이에 숨어서 기다리는 사이에 예상대로 팔덕이 잰 걸음으로 방앗간 앞을 지나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선 것을 보면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멀리 갈 것이라 판단했다.

정 선생은 마스크에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행색이 허름한 노인인 양 구부정한 모습으로 팔덕을 뒤따랐다. 팔덕은 묵직한 가방을 둘러메고 저만치에서 바삐 걸어간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새벽일 나가는 사람들로 버스는 붐볐다. 그 틈에 끼어 정 선생은 팔덕과는 좀 떨어진 곳에서 버스 의자를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 앞쪽을 엿보며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버스가 동대문을 지나자 팔덕이 움직거리는 것이 보였다. 종로5가 좀 미쳐서 팔덕이 앞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정 선생은 사람들 틈에 끼어 뒷문으로 내렸다. 정류장에는 새벽부터 나와서 뜨거운 국수와 어묵, 찐빵을 팔고 있는 포장마차까지 있어서 복잡했다. 팔덕은 버스에서 내려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도 버스를 갈아탈 모양이다.

정 선생은 불 꺼진 상점 그늘로 들어갔다. 팔덕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 한 봉지 사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는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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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덕이 버스에서 내린 곳은 구파발 종점이었다. 정 선생은 불광동을 지날 때 이미 버스 뒤에 앉아 등산모자와 그에 맞는 옷으로 살며시 갈아입었다.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버스 안은 군인, 예비군, 등산객, 봇짐장수, 행상, 허름한 행색의 각종 사람들이 뒤엉켜 제법 붐볐기 때문에 팔덕과 정 선생이 눈길 마주칠 염려는 없었다.

정 선생은 팔덕의 뒤를 따라 판자촌을 지나 야산으로 올라갔다. 마스크를 하고 선글라스와 등산모를 푹 눌러쓰고서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인 채 주변을 기웃거리는 체하며 팔덕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산에 올라서 팔덕의 그림자를 놓쳤다. 하지만 철조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위로 좀 올라가니 저만치에서 팔덕의 옷자락이 눈에 비쳤다. 정 선생은 숨을 죽이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팔덕이 멈춰서서 주변을 살피는 듯했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갔다. 정 선생은 나뭇가지에 부딪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며시 뒤따랐다. 팔덕이 쓰러진 철조망 넘는 것을 보았다.

정 선생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쓰러진 철조망 건너편을 살펴보았다. 숲이 무성해서 그 속이 컴컴하게만 보였다. 잠시 망설이다 조심조심 철조망을 건넜다. 어두운 숲속으로 조금 들어가자 어지럽게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다. 군용텐트. 정 선생은 숨을 죽이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아침 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것이 처음 느껴졌다. 벌써부터 지져댔겠지만 이제야 그 소리들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극도로 긴장한 탓이겠지. 아침 해는 벌써 많이 솟아올라 나뭇가지 사이로 빗살처럼 나뉜 채 비쳐들고 있었다. 정 선생은 수통에서 물을 꺼내어 마시고 시계를 보았다. 이제 겨우 6시 반. 팔덕이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창고로 들어간 지 10여 분 지났다. 분명 저기에 인희가 있을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 해도 팔덕을 계속 좇으면 결국에는 인희에게 이를 것이라 확신했다.

정 선생은 한동안 앉아 있다가 조심조심 일어섰다. 창고 위쪽으로 올라가 볼 요량이었다. 혹 창고 뒤쪽에 창문이 나 있으면 그리로 안을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게 신경 쓰면서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올라갔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정 선생은 몸을 돌이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숨 죽이고 살펴보았다.

팔덕이 나왔다. 뒤돌아보면서 안을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하며 손짓한다. 안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뒤이어 누군가가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아!

찾았다.

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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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팔덕은 구파발 야산에서 인희를 만나고 나오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꼭 해결해야 될 일이 있어. 그리고 나서 내가 정말 잘 아는 사람한테 데리고 갈게. 거긴 진짜 괜찮을 거야. 내 장담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멀리 가지 말고. 알았지. 이번 한 번만 더.”

인희는 시무룩한 얼굴로 쫓아나왔다. 들어가라는 팔덕의 말에도 인희는 철조망 근처까지 따라왔다. 팔덕이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인희는 그곳에 가만히 서서 팔덕이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팔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통쟁이가 왜 안 나온 걸까? 고자질하려는 걸까? 그러나 팔덕의 생각에 심통쟁이는 그런 쪽이 아니다. 팔덕이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눈칫밥만 먹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게다가 팔덕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부류는 곧바로 알아보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팔덕 자신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판단이 틀릴 리 없다고 확신했다.

심통은 절대로 어디 가서 고발할 위인이 아니다. 혹 심통쟁이가 딴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 예를 들면 혼자 독차지하려 든다든지…….

어떻든 어젯밤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알아내야겠다.

팔덕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에 양말공장으로 갔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공장 건너편 골목에 들어가서 심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난번처럼 공장 안의 불이 다 꺼져갈 무렵 심통이 슬금슬금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늘 느지막하게 공장에서 나오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심통이 저만치 멀어져 가자 팔덕은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갔다. 길이 좀 어스름한 곳에 이르자 팔덕이 뛰다시피 다가가 스쳐 지나가면서 말을 했다.

“어이, 심통.”

그 말을 하고 팔덕은 얼른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심통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소스라치듯 놀라는 모습은 느껴졌다. 저렇게까지 놀랄 필요는 없겠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심통이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팔덕이 들어간 골목 쪽을 바라다본다. 팔덕은 고개를 삐죽 내밀고서 손가락을 들어올려 까딱까딱 움직였다. 막내아들뻘도 안 되는 새파란 놈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도 심통은 저항을 못한다. 오히려 호랑이 눈을 본 쥐처럼 몸이 얼어붙는 것이다.

“심통 아줌마, 이리로 좀…….”

팔덕이 어둠 속에서 이빨을 보이며 씩 웃었다.

심통은 자석에 끌리듯 스르르 골목으로 빨려들어간다.

팔덕은 골목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의 팔덕의 등이 심통의 눈에 갑자기 태산처럼 들어왔다. 심통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팔덕은 또 다른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심통은 그 입구에서 멈칫거린다.

팔덕이 뒤돌아보고 손짓했다. 어스름 속에서 그 손이 달빛에 반사되어 황소 눈처럼 번득이는 것 같았다. 심통은 주저하면서 발걸음을 뗀다.

“얼굴 좋으시네요.”

팔덕이 느글거리는 웃음을 띠며 속삭이듯 말한다.

심통은 아무 대꾸도 없이 몇 발자국 다가가더니 멈춰섰다.

팔덕이 심통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는 바쁘셨나 봐요?”

“…….”

“제가 어젯밤하고 오늘 고생 좀 했습니다.”

“…….”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 응, 내가 어제 몸이 좀 안 좋아서……. 감기 기운 때문에…….”

“그러세요? 봄 감기 조심하셔야죠.” 팔덕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제가 오늘 철종이 형 만났거든요. 아시죠, 그 형?”

심통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뭐…….”

“아, 아시는구나. 철종이 형도 아줌마 잘 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자주 만나신다면서요?”

“아니, 나는 그냥…….”

“재미 좋으시다고요? 요새 잘 나가신다던데.”

팔덕이 히죽 웃으며 얼굴을 들이민다.

“저 담배 한 대 태워도 돼요? 어른 앞에서 버릇이 나빠서…….”

팔덕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문다. 그러나 라이터는 꺼내지 않았다.

“경기물산 쪽에도 자주 가시나 보죠?”

아이고. 심통은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왔다.

“거기 제가 모시는 형님 있는 건 모르셨나 봐요? 세상 참 좁죠?”

“…… 저, 나, 나는 그냥 조금만…….”

“아아, 괜찮습니다. 저보다 좀 빠르셨던 건데요 뭐.”

팔덕이 라이터를 꺼내더니 켜는 시늉을 한다.

“불 확 켜서 다 까발리면 안 되겠죠?”

팔덕이 눈을 크게 뜨며 갑자기 표정을 사납게 바꾼다.

“다 태워버릴까요?”

심통의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한테 반을 주셔야 돼요. 다음 주부터. 매주 목요일 이 시간에 이 골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팔덕이 정중한 말투로 바꾸고서 손가락으로 담배를 탁 퉁겨 심통의 얼굴 쪽으로 날린다.

“우리 서로 돕고 사시죠. 상부상조.”

팔덕은 씩 웃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팔덕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골목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음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팔덕은 철종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얼굴도 모른다. 만난 적도 없다. 다만 야매물건 다루는 사람들 속에서는 가끔 등장하는 이름이다. 물건을 몰래 팔려는 사람들이 팔 곳을 잘 모를 때 철종이라는 사람을 찾아간다고 했다. 경기물산 역시 그런 식으로 등장하는 유령회사다. 이 동네에서는 어디선가 빼돌리는 물품, 장물, 밀수품 등등 어둠 속에서 거래되는 온갖 것들은 적어도 열에 한번은 그 회사를 거쳐간다. 이름만 회사일 뿐이지만. 팔덕은 자신은 없지만 이 두 이름 중 하나는 걸릴 것이라 생각하고 슬쩍 던졌을 뿐이다. 거기에 심통은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둘 다에.

팔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먼저 빼먹고 있었으면서 나한테까지 내숭 잘도 떨었지.


다음날 아침 일찍 팔덕은 가벼운 마음으로 구파발로 향했다. 그러나 인희를 어디로 데리고 가면 좋을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팔덕이 비빌 만한 곳은 이미 다 가봤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곳에 데려다줄 수도 없었다. 그러한 탓에 발걸음은 경쾌한 듯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묵직했다.

팔덕이 창고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혹시나 해서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더니 문이 열린다.

“…….”

문 열어놓고 어디 간 건가?

한 발자국 안으로 들여놓는 순간 무엇인가가 팔덕의 눈에 띄었다.

하얀 마스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 어떤 영상이 팔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제 아침 이곳으로 올 때 마스크를 여러 번 보았던 느낌이다. 왕십리에서 종로로 갈 때도, 종로5가에서 인희에게 줄 찐빵을 살 때 저쪽 어딘가 그늘 속에서, 또 구파발까지 오는 동안 버스 안, 그리고 무허가 판자촌을 지날 때 무심코 뒤돌아보았을 때 저만치에서.

누가 쫓아온 건가?

…… 미행?

팔덕의 머리칼이 쭈뼛 섰다.

팔덕은 문을 박차고 나가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도 단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시 창고로 들어간 팔덕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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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 선생은 팔덕과 인희가 철조망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혹 둘이 어디론가 떠나려는 걸까? 마음을 졸이면서 정 선생은 뒤따라갔다. 저대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뛰어나가 가로막을까? 인희를 납치했다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팔덕을 겁주어 볼까? 정 선생은 망설이면서 뒤쫓아가다가 인희가 철조망을 넘지 않고 멈춰서는 것을 보았다. 철조망 너머에서 팔덕이 손짓을 한다. 인희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뒤 팔덕이 철조망을 따라 내려가다 숲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인희는 천천히 돌아서서 창고 쪽으로 올라왔다.

정 선생은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 쳤다. 어떻게 할까……?

인희가 창고 가까이로 다가가자 정 선생은 나무 그늘에서 나와 뛰어갔다.

“인희야!”

인희는 깜짝 놀라 뒤돌아본다.

“잠깐만, 인희야!”

인희는 돌아서서 창고 쪽으로 달아났다.

“잠깐만, 잠깐만. 제발.”

인희가 넘어졌다. 무언가에 발이 걸린 모양이다. 다시 일어나 인희는 창고로 달려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닫으려는 순간 정 선생은 문틈으로 발을 밀어넣었다.

“나 모르겠니? 양말공장에서 만났잖아. 나 알지?”

정 선생은 문을 왈칵 잡아당겨 열었다. 안에서 인희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 선생은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면서 창고 안으로 빛이 몰려 들어가 그 빛의 줄기 속에서 먼지들이 춤을 추며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인희가 쓰러져 있었다.

정 선생은 손을 뻗어서 인희를 일으켜 주려고 어깨를 붙잡았다. 인희는 그 손을 뿌리치고 쓰러진 채 뒤로 물러갔다.

“인희야, 겁내지 마. 나 통일방직 정 선생이야. 나 본 적 있지? 우리 공장에 왔었잖아. 팔덕이와 함께.”

인희는 일어나서 창고 구석으로 도망갔다.

“너 해치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잠깐 얘기만 좀 하면 돼.”

인희는 말이 없었다.

“팔덕이 어디 간 거니?”

인희는 놀란 눈으로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언제 다시 오니?”

여전히 그대로 서 있기만 한 인희.

정 선생은 그 자리에 선 채 창고 안이 눈에 익기를 기다렸다. 잠시 지나자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창고 전체가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희는 저쪽 구석 나무판자들이 세워져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정 선생은 두어 발자국 더 들어간 곳에서 멈춰섰다. 주변을 둘러보며 앉을 거리를 찾다가 다 망가진 나무의자 하나를 발견했다. 정 선생은 그것을 가져다가 먼지를 털고 천천히 앉았다. 그리고는 인희를 바라보고 말했다.

“나 여기에 앉아 있을 테니까 너도 저쪽 판자에 가서 앉을래? 너 거기서 잔 것 같은데, 맞지?”

판자 몇 장을 이어붙여 침대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정 선생은 말했다. 그 위에는 종이상자를 풀어서 펴놓았고, 그곳에 몇 가지 물품이 흩어져 있었다.

정 선생은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인희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정 선생은 잠시 더 기다리다 말을 꺼냈다.

“그럼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해.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아니 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얘기해 줄게. 내 이야기가 길 거야. 아주아주 길지도 몰라. 내 이야기 듣다가 다리 아프면 저기 가서 앉아.”

정 선생은 창고 천장을 한번 쳐다보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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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막상 시작하려니 말이 막히는구나.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다. 내 자랑부터 할게. 나는 온양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

사실은 온양에서 조금 시골로 들어간 곳이야. 온양 알지? 들어봤니?

사람들이 온양온천이라고 하잖아. 너도 들어봤을 거야.

나는 온양에서 공부를 아주 잘했다. 천재라고 소문이 났었거든. 중고등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했어.

항상 일등만 했지. 그럼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나는 법과대학에 들어갔단다. 사법고시를 보려고.

사법고시가 뭐냐 하면 판사, 그러니까 재판하는 사람들 있지, 재판관.

그런 재판관이 되는 시험이야. 그래서 공부도 아주 열심히 했거든. 정말정말 열심히 했지.

그렇게 공부하다 어떤 여자를 만났어. 아주아주 예쁜 여자야. 인희 너만큼 예뻤어.

너도 참 예쁜 거 알지? 내가 만난 그 여자도 너만큼 예뻤어.

우리는 사랑을 했단다. 견우직녀 이야기 알지?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 들어봤니?

이름은 알고 있지? 우리는 그만큼 사랑을 한 거야. 정말 사랑했어.

그래서 아기를 가졌단다. 그 여자가 임신을 한 거야.

그런데 내가 아주 나빴어.

그것 때문에 결국 벌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러니까 싸움을 극심히 했어.

내가 사법시험에서 떨어졌거든.

너무 자만해서 공부 안 한 탓에 시험에 떨어진 것인데,

나는 그 여자 때문이라고 하면서 책임을 모두 떠넘기고 싸웠어.

매일매일 싸웠지. 내가 너무 나빴어. 난 그 일을 지금도 후회한단다.

후회 정도가 아니야. 나는 지금도 매일매일 죽고 싶은 마음이야.

그때 싸우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해졌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단다.

자살하려고 어느 여관에 들어가서 수면제를 이만큼 먹었어.

(정 선생, 아니 송정민은 양손을 모아 손바닥에 약을 잔뜩 올려놓은 모습을 해 보였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니?

그 여자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니까 여관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서 병원에 실려갔지.

그런데 너무 늦은 거야. 병원에서 별별 수단을 다해 치료했는데,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혼수상태가 되어 깨어나지 못했어.

나는 참 나쁜 놈이다. 그 여자가 그렇게 될 때까지 나는 잠만 쿨쿨 잤거든.

나처럼 나쁜 놈도 이 세상에는 없을 거야.

그 벌을 내가 받아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다 받고 말았어. 내가 나쁜 놈인데.

나는 경찰이 연락해 줘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됐어. 그때까지 난 잠만 잤단 말이야.

미안하다. 자꾸 이 말만 되풀이해서. 너무 기가 막히고 후회가 되어서 그래.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이 생기고 말았단다. 그 여자가 임신했다고 그랬지?

아기는 40주 되어야 세상에 나온단다. 알고 있지, 그런 거?

그런데 그 당시가 30주였거든, 그 여자가 혼수상태에 있을 때 말이야.

일이 더 안 좋게 되려고 그런 거겠지만, 그때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었어.

아기가 나오려고 한 거야.

그 바람에 그 여자가 정신이 돌아왔단다. 진통 때문에.

그것은 그때로 봐서는 다행이었어.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지.

그런데 너도 생각해 보렴.

40주가 되어서 나와야 하는데 30주에 나왔으니 아기가 어떻게 됐겠니?

눈 코 입 귀 다 아직 덜 생겼을 때야. 모든 장기들도.

그 중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눈이었단다.

내가 책을 찾아봤는데 눈이 제일 나중에 발달한다더라.

그래서 아기가 나중에 눈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의사가 그러는 거야.

눈에 하얀 백태가 끼어서 못 보게 되는 거래.

그 말대로 우리 아기 눈에도 두꺼운 백태가 끼어 있었어.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어. 나는 우리 아기가 눈이 안 보여도 살아 있기만 바랐거든.

그런데 너무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온몸의 장기가 다 약해서 오래 살지 못하게 된 거야.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죽고 말았단다. 난 그날 정말 기가 막혔었어.

내가 죽어야 하는데 아기가 죽다니. 나쁜 놈은 난데 나 대신 아기가 죽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니? 나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어.

잘못은 내가 했잖아. 그런데 왜 아기가 죽는 거야? 나 대신.

그리고 그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또 발생했어.

무슨 일이냐 하면, 아기가 죽는 순간, 그때까지도 의식이 멀쩡하던 그 여자,

그래 이제는 내 아내라고 부를게. 비록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 우린 부부였으니까.

결혼 안 하고 사는 부부를 법률적으로는 동거 또는 사실혼이라고 불러.

어떻든 내 아내는 그 아기가 죽는 순간 또다시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어. 바로 그 순간에.

아내와 아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아기가 죽자 그 충격으로 아내는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만 거지.

나는 그날 밤 죽기로 결심했단다. 집에 돌아와서 방에다 연탄 피워놓고 자살하려고 했지.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구더기가 내 온몸을 갉아먹는 환상을 보았어.

그러다가 몸부림치면서 나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모양이야. 그래서 살았지.

그때 그대로 죽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쉬워.

그때 나는 정말로 죽었어야 해. 그게 내가 지은 죄를 갚는 길이었거든.

그런데 나는 살아났어. 못나게도 우리 세 가족 중에서 나만 멀쩡히 살아남은 거야.

그 뒤에 내 아내는 친정으로 실려갔단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할 게 없었어.

몸에는 하나도 이상 없고 정신만 나간 상태니까.

아, 내가 그 말을 안 했구나.

처음에 병원에 실려갈 때부터 아내는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어.

몸의 반을 못 쓰게 된 거야. 수면제를 많이 먹은 것 때문에 부작용이 발생한 거지.

아기도 그것 때문에 그런 거고.

나는 말이다, 아내에게 사죄하고 싶었어.

그런데 처갓집에서는 나를 못 오게 했단다. 집에 발도 못 들여놓게 했지.

당연한 거야. 나 같았어도 그랬을 거야.

자기 딸을 그렇게 만들어 놨는데 어느 부모인들 가만히 있겠니?

그런 사위 두드려 팼어도 시원찮았을 텐데.

그 집에 몇 번 찾아갔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 결국 나는 포기하고 말았단다.

그때부터 나는 폐인이 되고 말았어. 공부도 포기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방황한 거야.

사실 여러 번 죽으려고 했는데 용기가 없었는지 모두 다 실패하고 말았지.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사람 소개로 지금 일하는 양말공장에 들어가게 된 거야.

나는 사람들에게 내 과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 있어. 그냥 묵묵히 일만 했어.

나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거든.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죽으면 그대로 끝나는 거야. 나는 그렇게 지냈단다.

그러다가 누굴 만났는지 아니?

바로 너 인희를 만난 거야.

내가 한 가지 비밀을 이야기해 줄게.

나는 아기가 죽고 자살하려다 실패한 날 밤에 편지를 썼단다.

아기에게 보내는 편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피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불쌍한 내 아기에게.

편지를 보낼 데가 없어서 하늘로 부치려고 했지.

그 편지를 다 쓰고는 봉투에 넣어서 깊은 곳에 보관해 놨단다.

언젠가 내가 하늘나라로 갈 때 함께 가지고 가려고.

하늘에 가서 아기에게 그 편지 전해 주려고.

양말공장에서 너를 만난 날 밤, 나는 그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었단다.

나는 너를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늘에서 너를 보내준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너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내 말.

사람들이 나를 정 선생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내 성은 정씨가 아니야.

내가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니까

한자로 바를 정자를 붙여서 정 선생이라고 부른 거지.

내 진짜 성은 송씨란다. 내 이름은 송정민이야.

그리고 아기 이름을 내가 뭐라고 붙여줬는지 아니?

나를 용서해 달라는 뜻으로 참을 인자를 붙여서 인희라고 이름을 지었단다.

송인희.

팔덕이하고 네가 나한테 찾아왔을 때 내가 네 이름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마치 내 아기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어.

그 아기가 살아 있었다면 틀림없어 너처럼 곱고 예뻤을 거야. 분명해.

엄마가 그렇게 예뻤으니 아기도 예뻤을 테지.

네가 팔덕이하고 돌아가고 난 다음 나는 그 편지를 꺼내어 읽었단다.

이게 그 편지야. (정 선생은 편지봉투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나중에 읽어보게 해줄게.

그리고 결심했지. 너를 찾자고.

네가 그 인쇄소에 간 것을 그곳 송 사장님 전화를 통해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너를 보려고 그곳에 여러 번 갔었지.

네가 식당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가서 너를 훔쳐보기도 했어.

한번은 네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었는데, 네가 나를 알아보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어떻게 하면 너를 데려올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봤어.

나는 말이다, 너를 죽은 내 딸처럼 키우고 싶어.

너를 다시 학교에 보내고 내 밑에서 살게 하고 싶단다.

나는 아무하고도 만나지도 않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아.

그동안 일하면서 모아놓은 돈도 있어. 그것으로 너를 공부시키고 싶어.

너 해곶에서 왔다고 했지? 인쇄소 미스 곽양을 통해 너에 대한 이야기 다 들었다.

시골에 할머니하고 남동생도 있다고 하더라.

내가 다 서울에 모셔올게.

네 할머니는 내 할머니처럼 모시고, 네 동생은 내 아들처럼 내가 공부시킬게.

네 할머니, 네 동생, 너 그리고 나, 이렇게 서울에서 함께 사는 거야.

혹시 팔덕이를 걱정하는지 모르겠다만, 그건 나한테 맡겨둬.

팔덕이 그놈 아주 나쁜 애다. 너도 짐작할 거야.

어디 가서 못된 짓만 하고 다니는 놈이야. 그 애와 다니면 너도 나중에 똑같이 돼.

그놈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놈은 이제 만나지 말아야 해. 내가 막아줄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에게 부탁이 있다.

내 아내는 지금도 누워 있어.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로.

나는 너를 아내에게 데리고 가고 싶어.

아내를 만나서 우리 딸 인희가 돌아왔다고 말하고 싶어.

아내가 의식은 없지만 너를 보면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아내도 너처럼 예쁜 딸이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고 생각할 거야.

너를 꼭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어.

혹시 아내가 네 목소리라도 들으면 다시 깨어날지도 모르지 않겠니.

나를 도와주겠니, 인희야?

오늘 나하고 내 아내에게 가자.

가서 인사를 하고, 너를 보여주고, 아내하고 너하고 손을 잡는 모습도 보고 싶어.

만일 이 모든 게 부담스럽다면 그냥 한번 가서 보기만 해도 돼.

그러고 나서 서울에 올라오자.

그런 다음 너하고 나하고 함께 해곶에 가서 할머니하고 네 동생을 데려올게.

꼭 부탁한다.

너는 이제부터 내 딸이야. 친딸.

네 동생은 내 아들이고, 네 할머니는 내 할머니가 되는 거야.

알겠니?


정 선생, 아니 송정민은 참으로 오랜 시간 이 이야기를 다 했다.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인희는 그대로 판자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 선생은 의자에서 일어나 인희 앞으로 조금 나아가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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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 선생과 인희는 버스를 타고 가서 온양 읍내에서 내렸다. 저녁 어둠이 짙게 내려서 그 근처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여관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신창으로 향하는 버스에 두 사람은 몸을 실었다. 따스한 봄날 햇볕을 받아 들판과 산은 온통 푸른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버스가 신창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권 부자, 즉 연선네 집으로 걸어갔다. 마을의 모습이 어딘지 부산해 보였다. 공기에서는 제상(祭床) 향내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연선의 집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예상치 못한 광경이 보였다. 대문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가 있었고, 여러 색의 깃발, 즉 만장이 보였다.

아…….

정 선생, 아니 송정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뛰어갔다. 인희는 영문을 몰라 어물어물하다가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좇았다.

정민은 사람들을 헤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에는 상여가 놓여 있었고 그 주변에서 여러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니, 저놈이 여길 왜 왔어!”

대청에 앉아 있던 상주 완장을 찬 연선의 오빠 연준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일어난다.

뒤이어 여러 사람이 얼굴을 돌리고 정민을 쳐다보았다.

“야, 이놈아!”

연준이 목발도 짚지 않은 채 절뚝거리며 정민 쪽으로 오면서 외친다.

“이놈 죽여버려!”

그와 동시에 연준이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나무막대를 집어들고 정민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

나무막대가 정민의 머리로 어깨로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너 때문에 우리 연선이가 죽었어! 이 새끼야, 죽어! 죽어버려!”

그 말에 여러 장정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리고는 정민을 발로 차고 짓이기고 했다.

정민은 머리를 감싸쥐고 그 자리에서 뒹굴었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소란에 안쪽 방에서 권 부자가 절름거리며 나왔다. 아들과 조카들이 한 남자를 패대기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정민은 몽둥이와 발길질 세례를 받으면서도 권 부자가 대청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정민은 등과 엉덩이, 다리를 두드려 맞으면서도 엉금엉금 기어 권 부자 쪽으로 갔다.

“아버님, 저도 죽여주십시오. 저도 죽겠습니다. 저도 죽…….”

정민은 입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여전히 발길질은 계속되었다.

“아버님……. 연선이, 연선이……. 보게 해주십시오.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정민은 엉금엉금 기면서 몸을 돌려 상여 쪽으로 향했다.

연준이 정민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이 새끼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죽고 싶어! 죽여줄까? 우리 연선이와 함께 죽여줄까, 이 새끼야!”

연준이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정민을 얼굴을 감쌌다.

“니 쌍판, 오늘 아주 짓뭉개줄 테다, 이 새끼!”

연준이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올렸다.

“그만해라!”

권 부자가 지붕이 무너질 듯한 소리로 호령했다.

연준이 들어올렸던 손을 멈추었다.

“그놈을 놔줘.”

연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버지 권 부자를 쳐다본다.

“그냥 놔줘라.”

연준이 콧김을 내뿜으며 멱살 잡은 손을 놓는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발로 정민의 가슴을 걷어찼다. 정민은 두 손으로 가슴을 잡고 옆으로 뒹굴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권 부자가 절뚝거리며 몇 발자국 걸어 대청 끝으로 왔다.

“이놈!”

정민은 한 손으로는 가슴을 쥐어잡고 몸을 엉금엉금 돌려서 권 부자 쪽으로 향했다. 상체를 일으켜 권 부자를 올려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상여 쪽으로 향한다.

“아, 아버님, 연선이, 연선이가…….”

그때 마름인 김 영감이 달려왔다. 정민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 양반이…….”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한다.

정민이 김 영감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연선이 어떻게 이렇게 된 겁니까, 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정민이 김 영감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연선이 어떻게 된 거냐고요!”

정민이 울부짖었다. 입속에서 피거품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연선이, 연선이……, 연선이 살려주세요, 네.”

김 영감이 망연한 눈길로 정민을 내려다본다.

“연선이 살려내란 말야!”

정민이 갑자기 고함치듯 악을 쓰며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정민은 대청 쪽으로 향해 몸을 돌렸다.

“연선아, 연선아…….”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정민은 대청 가까이 가서 댓돌에 발을 올린다. 대청으로 올라갈 기세였다.

“연선이 방이 어디입니까?”

정민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권 부자에게 묻는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대청으로 올라갔다.

뒤쪽에서 여러 사람이 깜짝 놀라 뛰어오며 정민을 붙잡으려 했다.

“내버려둬라.”

권 영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목소리엔 표현 못할 비통이 어려 있었다.

정민이 비틀비틀 권 부자 앞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더니 곧 이어 정민은 대청으로 돌아와 마당으로 내려가서 미친 사람처럼 집 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문들을 활락활락 밀쳐 열었다. 방 안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중에 어느 방에선지 무엇인가 마구 뒤지는 소리가 나고는, 뒤이어 어떻게 뒤져서 가져왔는지 정민이 연선의 연분홍색 재킷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연선이 살아생전에 가장 아끼던 옷이었다. 그 옷을 입었을 때 연선은 가장 화사하고 사랑스러웠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정민을 가로막고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때도 권 부자가 손을 들어 막았다.

“놔두라. 복을 하려는 걸 게다.”

그리고는 권 부자는 눈을 감았다.

정민은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지 그 재킷을 들고 허겁지겁 저택 뒤로 돌아들어간다. 이어서 어떻게 구해 왔는지 사다리를 들고 나타나서 저택 옆 벽에 세우더니, 그것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기왓장을 우직우직 밟고서 정민은 용마루 끝까지 가서 올라섰다.

정민은 초혼(招魂)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망자, 즉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이는 것으로서, 망자의 옷을 왼손으로는 저고리 깃을, 오른손으로는 허리께를 붙잡고 높이 쳐들고서 흔들며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복(復)이라 하는데, 이렇게 해도 망자의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발상(發喪)을 하게 된다. 즉, 상여가 나가게 되는 것이다.

정민은 용마루에 올라서서 두 손으로 옷을 잡고 툭 늘어뜨리더니 잠시 흔든다. 그러더니 곧 이어 연분홍 재킷을 높이 치켜들고 크게 펄럭이면서 소리질렀다.


연선아아아아아아!

연선아아아아아아!


목이 터져라 쩌렁쩌렁 울려나오는 소리.


권연선――――――!


이렇게 소리지르고 나서 그대로 잠시 더 옷을 펄럭이더니 팔을 툭 떨어뜨린다. 정민은 그 자세로 잠시 서서 저 멀리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마치 떠나간 혼이 저 멀리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목격이나 하듯이.

그리고는 잠시 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으으으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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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희는 정 선생을 부축하며 걸었다. 인희는 권 부자 댁에서 일어난 광경을 바로 옆에서 모두 보았다. 무서움에 비명 지르고 처참함에 눈물 흘리면서. 정 선생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인희에게 간신히 의지하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저 건너 푸른 논밭 평야 옆으로 난 길에는 상여가 나가고 있었다. 상여머리 잡은 선소리꾼이 방울종, 즉 요령을 울리며 선창하면 그 아래에 있는 상두꾼들이 가락에 맞추어 후창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날아와 정 선생의 마음을 후빈다. 상여 앞에서는 곡비(哭婢)가 하염없이 설움을 뿌리며 허청허청 걷고 있었다.


어허 노어 어허

어이 가자 넘차 너와 너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하고

어느 누가 가려는가

북망산을 어이어이 가랴

황천이 없다더니 건너 인산이 황천이로다

어허 노어 어허

어이 가자 넘차 너와 너


해로가(薤露歌)가 끊임없이 바람을 타고 논두렁 밭두렁을 넘어 정 선생의 귀에 파고든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천 머다더니

북망산천 머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선소리꾼이 매기는 서글픈 가락에 이어지는 상두꾼들 후창이 더 애닯게 따스한 봄의 대기 속으로 퍼져간다.


에헤에헤 에헤에헤

에헤에헤 에헤에헤


정 선생은 몸을 가누기 힘들어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물도 말랐는지 처연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상여를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옆에 선 인희는 혼란과 충격으로 아직까지 머릿속이 하얬다. 그러나 맥없이 앉아 있는 정 선생의 모습과 저 멀리서 방울종 울리며 야산 옆으로 돌아 사라져 가는 상여를 바라볼 때 아직 어리지만 인희는 사람살이의 허망함에 가슴이 아렸다.


10


정 선생과 인희는 어제 묵었던 온양의 그 여관에 또다시 들어갔다. 여관 주인은 정 선생이 아침에 나갈 때와는 달리 얼굴이 처참하게 뭉개지고 옷 여기저기 피가 묻고 찢긴 채 절뚝거리며 부축을 받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나갔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가자 인정 많은 여관 주인아주머니가 따스한 물과 수건, 붕대, 탈지면, 소독약, 옥도정기, 아까징끼(붉은 팅크, 머큐로크롬액) 등을 가지고 달려왔다.

인희는 정 선생의 상처를 닦으면서 눈물만 흘렸다. 입술과 얼굴 곳곳이 찢어지고 멍들었으며, 머리카락 속에도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게다가 온몸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으며 옷도 여기저기 찢어지고 뜯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또한 가슴을 쥐어짜는 앓는 소리가 피투성이가 된 정 선생의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나와서 인희는 상처를 닦는 것보다 자기 눈물 훔치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정 선생은 끙끙 앓으면서도 인희에게 여관집 주인에게 가서 편지봉투가 있는지 물어보고 두어 장만 받아오라고 시켰다. 만일 없으면 문방구에 가서 사오라고 했다. 그러나 여관 주인은 자신이 사오겠다며 서둘러 나갔다 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 선생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병원에라도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근심 어린 얼굴로 말한다. 그러나 정 선생은 고개를 흔들며 좀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정 선생은 인희에게 잠시 나갔다 오라고 했다. 인희가 그 뜻을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정 선생은 10여 분만 여관 밖에 나가 거닐든지 쉬든지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인희가 방을 나가서 여관 사무실 쪽으로 가자 주인아주머니가 걱정스런 얼굴을 내밀며 묻는다.

“아이고, 아가. 어찌된 거여?”

그 말에 인희는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터져나왔다.

“아니, 왜 그려? 뭔 일이 있었는데 그 모냥여, 그 냥반?”

인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가, 왜 그려? 아이고, 시상에…….”

주인아주머니는 난감한 얼굴로 인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뒤 인희는 주인아주머니가 주는 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인희의 등을 두드려 준 뒤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물 한 잔을 갖다준다. 인희는 몇 모금 마시고 나서 천천히 일어났다. 주인아주머니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인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인희는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입을 연다.

“저도 잘 몰라요…….”

인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그러자 주인아주머니가 다시 인희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한다.

“그려, 그려. 괜찮어, 괜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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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지나자 인희는 주저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정 선생이 돌아다보고 힘없이 손을 들어 들어오라는 시늉을 한다. 인희가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도 역시 힘없는 손짓으로 가까이 와서 앉으라고 표시한다.

인희가 멀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 정 선생은 봉투를 두 개 내밀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정 선생은 입을 여는 것도 힘겨운 듯 띄엄띄엄 말을 잇는다.

“여기 이 봉투에는 편지가 들어 있다. 한성인쇄 손 사장님에게 보내는 거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안 된다. 반드시 그분에게 드려야 해. 그리고 나면 손 사장님이 알아서 다 해주실 거다. 알았지?”

각각 다른 이름이 적혀 있는 두 개의 편지봉투. 하나에는 한성인쇄 손 사장에게 인희를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신과 인희가 연결된 경위도 간단히 적고, 뒤이어 정 선생 사무실에 있는 작은 손금고에 현금 약간과 통장, 그리고 도장이 있다고 썼다. 그 통장에서 돈을 찾아 인희를 도와주라고 했다. 즉, 손 사장이 직접 인희를 데리고 해곶으로 가서 할머니와 동생이 제대로 살 길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혹 가능하다면 인희 식구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손 사장이 가까이 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손금고 다이얼 번호는 통일방직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어놓았으니, 그분에게 부탁해서 금고를 열라고 했다.

정 선생은 또 한 봉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이 편지는 통일방직 사장님께 드리는 거다. 너는 이 봉투 둘을 그냥 손 사장님에게 모두 드리면 돼. 그러면 그분이 양말공장에 갖다드릴 거야. 내가 그 공장에서 몇 년간 일을 잘 했으니, 아무리 꼴이 이래도 인사는 하고 떠나야지. 이제 더 이상 나는 서울에 올라가지 않을 거다. 내 말 알아들었지? 이 두 봉투 모두 손 사장님 갖다드리는 거야. 그러면 그분이 알아서 다 하실 거야. 알았지?”

인희는 눈을 들어 정 선생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을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정 선생은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리더니 말을 잇는다. “너 말이다, 절대로 팔덕이에게 이 편지가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된다. 그거 아주 못된 놈이다.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온갖 곳 돌아다니면서 나쁜 짓은 다 하는 놈이니까.”

정 선생은 단호한 말투로 그렇게 이르고 또다시 말을 잇는다.

“내가 여기 이 종이에 네가 서울 올라가는 방법과, 서울에 가서 한성인쇄소로 갈 때 타야 하는 버스 번호와 정류장 이름을 적어놨다.” 정 선생은 종이 한 장을 따로 인희에게 건네주었다. “공장을 찾아가는 약도도 그려놨으니 잘 보고 찾아가거라. 만일 길을 잃으면 꼭 파출소에 가서 물어봐야 한다.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물어봤다간 큰일 나. 알겠니?”

정 선생은 인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한다.

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그리고 나서 눈을 들고 잠시 벽 위쪽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정 선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인희에게 눈을 돌린다.

“나는 오늘 아내 묘에 갈 거다.”

그곳에서 아내 껴안고 죽을 거야. 나는 더 살 곳이 없어. 내 아내 연선의 묘에 가서 죽을 것이다. 묘를 껴안고 죽으리라.

정 선생은 이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남겼다.


먼 후일 인희의 행적을 쫓던 중 어렵사리 권 부자 선산 묘지기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연선의 장례에 대해 논란이 많았던 듯하다. 연선이 비록 혼인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지아비가 있었고 자식도 낳은 적 있었으니 당연히 시가로 보내어 한 가정의 며느리에 대한 예를 갖추게 하는 것이 도리이긴 하나, 저쪽에서는 자기 아들 망친 년이라고 험담하고 다닌다 하니 제대로 된 상례를 갖추고 장사지낼 것 같지도 않고, 또한 그렇다 저렇다를 떠나서 권 부자 자신이 그쪽으로 딸의 시신을 맡길 수 없다 하여 자신이 직접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했다 한다.

또한 결혼 못한 처녀의 장례를 치를 경우 고인의 장조카가 상주가 되어야 하는데, 일가친척 가운데에서는 연선의 장조카에 해당하는 이의 연령이 너무 낮아 그 역할을 맡기기가 어렵고, 굳이 찾자면 아주 먼 인척 중에 장조카뻘 되는 이가 있기는 하나 매우 연로한 분이어서 격에 맞지도 않았기에 이래저래 정상적인 절차를 밟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게다가 연선의 딸이 비록 핏덩이 때 죽기는 했어도 엄연히 자식이 있었으니, 죽은 아이 대신 적당한 처녀를 골라 상주 삼으면 어떠냐는 말도 나왔으나, 이 역시 개화된 이십세기 백주에 무슨 상고적 생각이냐고 해서 거부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례를 앞두고 갑론을박 시끄럽자 권 부자가 단안을 내려 아들 연준에게 상주가 되라고 했으며, 처녀가 죽으면 화장하거나 사람 많이 왕래하는 산길 등에 묻는 관례가 있다마는 연선의 경우에는 선산에 제대로 묘를 써서 장례하라고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부모보다 먼저 죽었으니 악상이 되겠지만, 모든 것을 호상에 준해서 진행하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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