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 참없을것이오

by Rud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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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덕은 반은 미쳐 있었다. 자신이 미행당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하게 당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그놈은 누구지? 무슨 이유로? 아니, 인희가 없어진 것을 보니 목적이 인희였단 말인가? 왜? 어떤 놈이지? 어떤 놈이 인희를 노린 거냐고?

단순히 어린 여자애 납치범이라면 변장까지 하고서 이렇게 거창하게 일을 벌일 리 없다.

변장? 무엇 때문에? 혹 내가 아는 사람?

팔덕은 자신의 주변 사람 중에서 인희와 연결될 만한 인물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일단 인희가 거쳐간 곳을 떠올려 보았다.


한성인쇄소

광명제작소


인희가 일한 곳은 이 둘뿐이다. 두 곳 모두 사람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변장까지 하고서 팔덕을 미행하고 인희를 납치한다면 인희와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여자애 하나 납치하려고 미행까지 하면서 복잡하게 일을 꾸밀 리는 없다.

목적이 무엇일까?

돈? 어린애? 여자?

일단 돈은 아닐 것이다. 인희에게서는 돈이 나올 리 없으니까.

어린애? 글쎄다. 요즘 납치사건이 심심찮게 있다는 소문은 여러 번 들었다. 어린애 데려다 무엇 하려는 거지?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자식 없는 집에 판다는 말도 있지만 인희처럼 다 큰 애가 남의 집에 가서 고분고분 자식노릇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혹 여자라서, 예쁘장한 여자애라서 탐이 난 것인가? 인희처럼 나이가 어린 여자애들은 일을 시키기보다는 다른 욕심에서 데려갈 수도 있겠다. 팔덕은 머리칼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팔덕은 안절부절못하고 창고 안을 왔다갔다 했다. 발로 물건들을 걷어차기도 하고 주먹으로 나무판자를 치기도 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무슨 목적이냐고?

한참을 서성이며 담배도 피우고 발로 차고 집어던지고 주먹으로 쳐봐도 여전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혹 위의 두 공장에서 어떤 놈이 흑심을 품고 벌인 짓은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그러나 어제 새벽부터 미행하며 일을 벌이려면 일다 말단직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차!

새벽 첫 버스. 왕십리. 종로5가. 또다시 버스. 구파발.

이게 뭐지? 내가 왕십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잖아! 이 미행은 왕십리에서부터 시작된 거야. 말도 안 된다. 팔덕 자신이 그 근방에서 어물거린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럴…… 까……?

자신이 왕십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팔덕은 자신과 연관된 미제 야매꾼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무도 없어.

그밖에 팔덕은 모르고 있었지만 혹 누군가 끈질기게 자신을 쫓는 인간이 있다면……. 그야 따져보면 꽤 있을 것이다. 자기를 잡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여럿 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인희냐고?

어떻든 그 중 하나가 어떤 이유로든 이 일을 벌였다? 팔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팔덕은 혹시나 해서 창고 안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나 무엇을 짐작케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없어진 물건도 없었다. 아무것도…….

창고 안에는 제법 미제 물건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그것 중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납치범은 그런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오직 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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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지나 팔덕은 창고를 나섰다. 납치범이 그 장소를 안 이상 그곳은 더 이상 안전한 아지트가 아니다. 팔덕은 미련 없이 그곳을 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그곳에 놔두었던 가방 두 개에 담을 만큼 가득 여러 물건을 쑤셔넣고 창고를 나선 것이다. 떠나기 전에 주변을 다시 한번 샅샅이 뒤지며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무엇인가를 짐작케 할 만한 어떠한 것도 없었다.

팔덕은 그곳을 떠나면서 자신에게서 어떤 큰 것이 떨어져 나가는 허전함을 느꼈다. 은신처 하나 찾아내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 서울 근교 으슥하고 허름한 곳을 다 뒤져 겨우겨우 마련한 곳이다. 또다시 어디 가서 그런 곳을 찾는단 말인가. 은신처에서 내려가는 팔덕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패배감이었다.

게다가 팔덕은 괜스레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길을 가면서나 차 안에 있을 때도 늘 유리창 같은 데를 비쳐보면서 뒤를 살폈고, 누군가에게 감시당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계속 불안하기만 했다. 씨×, 내가 무슨 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팔덕은 서서 타고 가던 버스 바닥에 저도 모르게 침을 탁 뱉었다.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선다. 팔덕은 그 다음 정류장에서 서둘러 내렸다. 버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팔덕이 버스에서 내린 곳은 종로2가였다. 그곳에서부터 아무 의식 없이 걸었다. 동대문 쪽으로. 머릿속은 이것저것 복잡했다. 인희를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어디선가 놈이 나를 또다시 미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왕십리 은신처는 안전한 걸까? 만일 또 다른 은신처를 찾아야 한다면 어디에서?

마스크, 마스크 쓴 놈……. 기억을 더듬어 보자. 모자를 썼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겠지?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여자라면 좀 달랐을 텐데. 뭐가? 글쎄,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남자와 여자……. 나이는? 그것도 모르겠다. 생각나는 것은 오직 마스크였다. 그것도 의식적으로 본 것이 아니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어딘지 여기저기에서 마스크 쓴 사람이 자기 주변에 있었던 것 같았다. 오늘 아침 내내. 어디에서부터 따라왔는지도 모르겠고, 어느 순간에 자기 주변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오직 마스크만 머릿속에서 왔다갔다 맴돌았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복잡하게 머릿속이 얽혀 있는 가운데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보니 종로5가 버스정류장 가까이에 와 있었다. 팔덕은 눈을 들어 건너편 정류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새벽 저곳에서 내렸다. 처음에는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린 곳에서 서성이다가 문득 인희 생각이 나서 찐빵을 샀다. 그때 저쪽 상점 옆 약간 움푹 들어간 곳에서 마스크 쓴 사람이 얼비치는 듯해서 흘끗 눈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뿐이었다. 더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키가 컸나? 남자겠지? 분명 그럴 거야. 왜 마스크를 썼을까? 아침이라 추워서? 감기 걸렸나? 아니면……, 나를 아주아주 잘 알아서 얼굴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 그럴 가능성이 아주 많겠지…….

일단 생각을 집중해서 사흘 전 자신이 행패를 부린 광명제작소 사람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그곳 사장, 상무라는 술주정뱅이, 1층 공장에서 자기한테 당한 주임……. 그 중에서 인희를 처음 보고서 호감을 나타내며 받아준 사장이 의심스러웠다. 다른 이들은 오늘 새벽에 왕십리까지 와서 자기를 미행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지만 설마……. 팔덕은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 속이야 알 수 없지만 그 사장은 그런 종류하곤 다르다. 더군다나 체격이 크고 몸도 뚱뚱해서 그런 사람이 아무리 변장을 하고 마스크를 썼다 해도 금방 눈에 띄었을 것이다. 아니야, 그 사장은.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팔덕은 단정했다.

그 다음 한성인쇄소. 아, 왕십리 가는 버스가 왔다. 팔덕은 잠시 망설이다 올라탔다. 무엇을 어쩌려는 생각은 없이 그냥 탄 것이다. 일단 버스에 타고 나니 혹 그 헛간은 온전한 건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누군가가 침입한 것은 아니겠지?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어떻든 지금은 버스 안이다. 이따가 버스에서 내려야지만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이다. 팔덕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마스크로 생각을 옮겼다.

한성인쇄소. 그곳 역시 직원들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혹 공장을 그만둔 사람들 중에 있다면 모를까. 그렇게 된다면 광명제작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 새벽에 왕십리에서 구파발까지 자기를 미행할 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팔덕은 이 가능성은 털어버리자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한성인쇄소에서 누가 남을까? 직급이 높은 사람들 중에 혹시 최근에 그곳에서 나간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팔덕은 요즈음 그 근처는 가지도 않았고, 또 갈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 일대에서는 지난번 팔덕이 인희를 빼돌린 것 때문에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테니까.

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내가 아는 한성인쇄소 사람 중 마스크 가능성이 가장 많은 인간은 누굴까? 사장 할아버지? 글쎄다, 그 노인이 꼭두새벽부터 마스크 쓰고 자기를 미행한다? 어딘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소문에 의하면 인희를 끔찍이 아꼈다고는 해도 설마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마스크까지야……. 팔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밤다리 할멈? 팔덕은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자기가 준 미제물건들 때문에 인희를 내게 보내고 나서 억울하다고 소주를 입에 들이부었다는 그 할멈. 팔덕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야. 젊은 사람일 거야. 분명해. 새벽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그 먼 거리까지 미행해서 산에도 거침없이 올라가려면 적어도 체력이 좋아야 하는 거니까.

문득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 납치범은 인희를 데리고 나갔다. 설마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이것만은 제외시키자. 그래야만 이 일을 풀어나갈 수 있으니까.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인희가 따라나섰다. 순순하게 따라갔든 억지로 끌려갔든 가긴 간 것이다. 만일 인희가 거부할 생각이 있었으면 따라가다가도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붙잡혔나? 혹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서 숨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되었으면 다행이겠으나, 인희의 성격이나 체격으로 보아 가능성이 많지는 않아 보였다.

다시 생각해 보자.

첫째, 인희는 죽지 않았다.

둘째, 납치범에게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납치범과 사이좋게 나갔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이상해지니까.

팔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덧 버스는 팔덕이 내려야 할 곳에 이르고 있었다. 팔덕은 갑자기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그 헛간.

팔덕은 거의 숨이 찬 상태에서 헛간에 도착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도 혹시나 해서 뒤를 조심했지만 마음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헛간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려다가 팔덕은 멈칫했다. 우선 주변부터 살펴봐야지. 그래서 헛간 주위를 빙 돌며 수상한 흔적이나 발자국 등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했다. 아냐, 없는 듯한 것은 안 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번에는 더욱 세심히 세 바퀴나 돌며, 더군다나 좀 멀리까지 세밀히 돌아보았다. 흠, 확실히 이상 없음. 자기 자신에게 확실하다는 도장을 받았다.

그제야 팔덕은 안으로 들어갔다.

팔덕은 그 안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선서를 받을 정도로 확신을 가질 때까지 조사하고 조사했다. 깨끗했다. 아니, 안전했다. 그래,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자. 다른 은신처를 찾을 때까지.

팔덕은 담요를 깔아놓고 그 위에 누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번처럼 혼란스럽고 자신 없었던 때가 없었다. 늘 자신이 주인공이었고, 또 자기가 이겼다. 어느 누구도 자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 나이이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보다 몇 수 위의 인간.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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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덕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얼른 일어나서 시계를 보았다. 5시 조금 넘었다. 판자 틈으로 내다보니 아직 밖은 환했다. 다시 누웠다. 팔덕은 아무런 생각 없이 잠시 누운 채로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인희!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게 뭐야?

팔덕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갓난아기 때는 분명 울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맞고 하다가도 틀림없이 울었을 테지.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외삼촌 밑에서 자라면서 말썽도 무지 부렸으니 매도 많이 맞았을 것이고, 이제는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찔끔찔끔 눈물깨나 흘렸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팔덕은 독종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된 것은 아니다. 본성이 그랬는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는지 모르지만 어느 때부터 팔덕은 울지 않게 되었다. 모든 일에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나이 열 살도 안 되어서. 어른들은 그런 팔덕에게 고집이 세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겉면과는 달리 팔덕의 내면에서는 영악이 자라고 있었다. 외삼촌이 죽고 외숙모는 서울 어디론가 간다고 하며 집을 나갔다. 남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팔덕은 외숙모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 해곶을 떠나던 열세 살까지 듣지 못했다. 물론 그 후에도 듣지 못했지만. 외삼촌은 자식이 없었다. 팔덕은 생각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외삼촌 집으로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막 자랐다. 사실 그 당시 그런 시골에서는 모두가 다 막 자랐다. 그러니 팔덕 혼자만 서럽다고 할 수는 없는 처지다. 어떻든 외삼촌은 죽고 외숙모는 행방불명된 이후 2년간 이집 저집 떠돌며 살았다. 고아원에 보내자거나 어느 집 양자로 들이자거나 하며 수군거리는 말들을 팔덕은 다 듣고 있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더 이상 학교는 구경도 못했다. 밭일, 논일, 들일, 산일, 갯벌일 죽어라 하며 동네 구박덩이로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멋지게 탈출했다. 이 이야기를 글로 쓰면 눈물 없이는 못 읽는다. 팔덕이 고향을 떠나는 날 부엉이가 울었는지는 몰라도 하늘이 울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엄청난 바람과 함께 태풍 비가 억수로 쏟아졌으니까. 거기다 그날 마침 만조여서 바닷물도 한껏 올라와 있었고, 태풍 비바람으로 개울마다 다 물이 불어나다 못해 넘쳐서 몇몇 집이 떠내려가기도 했는데 그런 집 중 하나가 팔덕의 빈집이었다. 팔덕은 그 직전까지 이집 저집 떠돌며 일해 주고 밥 얻어먹고 하다가 열세 살이 되니 사람들이 모여서 자립심을 기르려면 혼자서 살아 버릇해야 한다며 몇 해 동안 아무도 안 살아 귀신 나올 것같이 썩어 문들어진 집으로 팔덕을 쫓아보냈다. 그렇게 해서 그 으슥오싹한 폐가로 팔덕이 들어간 첫 날, 그렇잖아도 장대처럼 쏟아지던 태풍 비가 그날 밤 하필 하늘이 구멍 뚫리고 은하수 둑이 터졌는지 폭포수같이 들이부어댔다. 사람들 말로는 거의 앞도 안 보일 정도라고 했지만, 팔덕은 그날 미래가 안 보였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떨어져 그 폐가를 싹 쓸어간 것이다. 여기에서 왜 팔덕이 미래가 안 보였다는 표현을 썼느냐 하면, 이를 설명하자면 매우 길어지지만 간단히 말해서 이러하다. 그 당시 남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니까 여기서도 그렇게 표현해야겠다. 글자 그대로 남몰래,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즉 감쪽같이 팔덕은 도망친 것이었다 그 말이다. 그곳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즉, 미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 위에서 팔덕이 미래가 안 보였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이 경우 팔덕에게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그때 그 집에 들어가 있었으면 틀림없이 물에 떠내려갔을 것이다. 실제로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시체도 못 찾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로 한 오막살이와 그리고 한 가난하고 불쌍한 어린 천사가 한꺼번에 저 멀리, 아주아주 먼 바다로 떠내려가 버렸다고. 그리고 나서 마을사람들은 손을 탁탁 털어버렸다. 마을의 골칫덩이 떠돌이를 보내버렸으니까. 아, 그런데 그렇게 해곶에서 지워버린 아이가 어느 날 ‘가다마이’ 쫙 빼입고 양담배 빨면서 나타났으니 마을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시라. (‘가다마이’는 양복 윗도리, 즉 재킷을 말하며 ‘가타마에’라는 일본말에서 잘못 전해진 것 같다.) 누구 하나 어린 놈이 어른들 앞에서 담배 입에 꼬나무느냐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고, 거꾸로 그동안 어디 가서 부모형제 없는 천애고아로 고생하며 지냈느냐, 그 험한 풍찬노숙도 너한테는 사치였을 정도로 고생에 고생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렇게 멀쩡하게, 아니 금의환향 당당하게 돌아왔으니 장하고 장할시고 하며 비위맞추는 사람조차 없었다.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두려웠던 것이다. 그놈이 자기를 학대하고 그 태풍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흉가에 버려서 집째 떠내려가라고 의도한 것 아니었느냐고 패악질이라도 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눈치를 보고 피했지만 팔덕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처음에는 노름꾼들 속에 들어가 심부름이나 하겠다며 기웃거리더니 차츰 어른들 속에 들어가 (누가 버릇없다는 소리도 못하는 걸 알고서) 개평이나 뜯겠다고 고개 삐죽 들이밀더니만 나중에는 아예 한 자리 꿰차고 들어앉아 본격적으로 화투 잡고 요상괴상한 짓거리 다하며 돈을 쓸어담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러모은 돈 배포 좋게 술값 담뱃값 하시라고 다시 툭 던지고 가니 괘씸 반 인심 반 얻어 온 동네 맘껏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주머니도 차츰 허전해지고 서울서 온갖 잡짓 다한 재미가 생각나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밋거리 많은 서울의 음침한 곳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 도중 팔덕의 눈에 인희가 띄었는데 고거 삼삼하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여 여러 날 생각하다가 할머니 걱정하는 척하고 은근슬쩍 찔러보니 생각 외로 쉽게 넘어오더란 말씀이지. (인희가 자기 사정이 절박해서 그랬겠지만.) 그래서 반은 요상한 생각, 반은 안됐다는 마음으로 살살 구슬려 서울로 데리고 오게 되었다. 허나 막상 일이 그렇게 되니 처음 생각과는 달리 난생 처음으로 책임감 비슷한 감정도 생기고 해서 일단 모든 추잡한 생각은 다음으로 미루어 두고 인희 먹고 살 형편을 만들어 주려고 글자 그대로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헌데 다른 일들은 팔덕이 마음먹은 대로 대부분 되어가는데 요상케도 인희와 연관된 일은 하나같이 옹이가 생기고 어긋나고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지난날들이 한 순간에 팔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편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일 전체가 갑자기 한스럽고 서럽게 느껴져 낮잠 깨고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번 이전에 언제 눈물을 보였는지는 팔덕 자신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팔덕이 자의식을 지니게 된 뒤로는 첫 눈물이라 할 수 있겠다.

팔덕은 아무도 없는데도 혹 누군가가 볼까 얼른 눈물을 훔치고 일어섰다.

인희를 찾아야 해.

팔덕이 깜빡 잠들기 전까지 자신이 이리저리 추궁한 논리들이 머릿속에 한 줄로 주욱 늘어서서 지나갔다. 그러나 일단 인희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팔덕은 자기 문제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선 자신은 이 왕십리 쪽에 자주 나타나면 안 된다. 심통에게서 수금하는 것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이곳에 와야 하지만 그것도 아주 조심해야 한다. 한성인쇄를 비롯해서 자기를 벼르고 있는 사람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마 인희 문제로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랬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알았을 것이다. 지난번 심통을 만났을 때도 그런 언질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곳에 자기 얼굴이 자꾸 비치는 것은 좋지 않다. 이곳 은신처도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인희.

아니, 잠깐.

심통!

팔덕은 심통이라는 이름이 한번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에 화살이 꽂혔다.

심통이라…….

심통 그 아줌씨는 어쩌면 자신에게 여러모로 쓸모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화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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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덕은 요즘 자신이 양말공장 주변에 자주 나타내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번 주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저녁 어스름에 그곳 근처로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선물도 준비했다. 마음을 담은 선물. 회색빛 선물.

심통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팔덕을 맞았다. 아직 팔덕이 올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팔덕이 내미는 마음의 선물을 받고는 기분이 좀 풀리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심통은 궁금하다는 듯이 팔덕을 바라보았다.

“요즘 공장에 별일 없죠?”

“뭐 있겠어? 늘 그 타령이지.”

“오늘 사무실에 불빛이 일찍 꺼지는데요?”

“응, 정 선생이 시골 내려갔다나 봐. 급한 일이 있대. 그런데 왜 온 거야? 이거 주려고?”

“그럼요. 동업자인데. 좋은 거 생기면 또 드릴게요.”

심통의 눈빛이 바뀐다.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이랄까. 뭔가가 있기는 있는데…….

팔덕은 마음이 답답했다. 확실한 목적도 없이 심통을 만난데다가 만나고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시답잖은 말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 심통과 헤어지고 나서 팔덕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런 느낌과 상황은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팔덕은 심통에게서 물론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별 소득 없이 터덜터덜 헛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팔덕은 문득 정류장으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오늘 새벽 종로행 버스를 탄 그곳. 특별한 기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스크가 처음 미행을 시작한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다가 오늘 새벽 자신이 처음 버스 탈 때부터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 일단 가보는 거야.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정류장. 한밤에 가까워서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면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겠지. 그중에서 우연히 마스크 쓴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팔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내리고 타는 사람들 물끄러미 쳐다본 것 말고는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는 뜻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마스크가 자신을 미행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은신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은신처와 버스정류장 사이? 그렇다면 팔덕의 정체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혹 심통과 관련된 인간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심통은 잔재주는 지니고 있을지 몰라도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아니다. 누구하고 손잡고 일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일단 심통은 제외. 탈락하셨습니다.

마스크, 마스크……. 왜 마스크일까? 물론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겠지. 팔덕이 알아차리면 안 될 사람. 이 근방에서 팔덕과 잘 아는 사람은 누굴까? 미제물건 똘마니들은 이곳 자체를 모른다. 그렇다면……. 이 버스정류장을 중심으로 크고 둥그렇게 원을 그려보자.

그 안에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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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날 아침 팔덕은 일찍 잠에서 깼다. 그리고 본능처럼 떠오른 어떤 이름. 어제 자신이 만난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그 대화 중에서 등장한 사람.

정 선생.

왜 하필 정 선생?

시골에 급한 일이 있어서 내려갔다?

어제 갑자기?

인희가 납치당한 날 정 선생도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단어를 집어넣으니 아주 그럴듯해졌다.

미행……, 남자…….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인희와 정 선생은 한번 만났다. 양말공장 마당에서.

그리고 그날 정 선생에게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 있었지.

늘 차분하고 기계와 같이 행동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인희를 쳐다보던 그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었다.

실은 그때 그 장면은 어딘지 어색하다고 느끼긴 했었지만 일부러 마음에 담아둘 의미가 없다고 여겼기에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것이다.

만일……, 만일에 정 선생과 인희 사이에 팔덕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면…….

그 두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그 이전에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러한 것 말고 팔덕이 모르는 어떠한 것이 있어서 두 사람을 연결시켰다면?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이어진다.

팔덕은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팔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태까지 이리저리 짜맞추어 본 모든 가능성은 다 가치 없고 오직 이 경우만 가장 그럴듯하게 남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뒷배경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것만이 가장 가능성 있다. 아니, 이것은 진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희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팔덕의 본능에 불이 켜졌다.

팔덕의 머리는 정교한 시계 톱니바퀴처럼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했다.


3


인희는 정 선생이 알려준 방법대로 서울로 올라왔다. 또한 정 선생이 적어준 버스를 타고 성수동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이었다. 한번 와본 곳이긴 하지만 낯설게 느껴졌다. 주변이 어둑해지고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어제오늘 겪은 모든 일이 꿈만 같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탓이리라.


4


팔덕은 정 선생과 인희가 만나는 접점을 한성인쇄소로 잡았다. 양말공장은 아니다. 인희가 한성인쇄소에서 지내게 되자 정 선생이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다는 것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팔덕은 일단 그 이유를 인희라고 판단하고 길을 열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뭐라도 나오겠지.

팔덕은 정 선생 입장에서 납치를 정리했다.


― 정 선생은 인희를 보기 위해 한성인쇄소에 자주 들렀다.

― 어느 날 인희가 사라졌다.

― 다른 사람들은 물론 정 선생 역시 인희를 팔덕이 데리고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 정 선생은 팔덕을 찾으려 했으나 팔덕은 한동안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팔덕은 그 이후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으니까.)

― 그런데 어떤 연유로 팔덕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정 선생이 알아차렸다. 어떻게? 이 부분은 잠시 미뤄두자.

― 어제 새벽 정 선생은 팔덕이 왕십리 버스정류장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도 잠시 미뤄두자.)

― 정 선생은 팔덕을 미행해서 구파발 창고까지 따라왔다. 창고 근처에 숨어 있다가 팔덕이 나간 뒤에 창고로 가서 인희를 납치했다. (어디에 숨겨두었는지도 미뤄두자.)

― 정 선생이 공장에는 시골에 급히 내려간다고 말했다고 했으니 적어도 하루이틀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인희가 얼마 전에 팔덕과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인희가 그날 납치당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 정 선생은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곧 다시 공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공장 비우는 시간이 길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 좋아. 어떤 방법을 쓰든지 정 선생을 잡는 거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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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생은 빠르면 오늘을 포함해서 반드시 며칠 안에 돌아온다. 사람들은 정 선생과 인희를 절대로 연결시키지 못할 테니 정 선생으로서는 입만 닫고 있으면 된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하지만 정 선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한 소행을 알기 때문에 자격지심으로라도 한성인쇄 근방을 어슬렁거리며 혹 인희 이야기가 돌지는 않는지 귀를 기울여 보지 않을까? 이것은 사실이다. 팔덕 역시 그러한 경험을 여러 번 했으니까. 따라서 팔덕은 통일방직과 한성인쇄 두 곳 모두 감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루는 이쪽, 다음날은 저쪽을 번갈아 가면서.

또한 정 선생이 돌아온다면 어디에 먼저 들르게 될까? 정상이라면 자신의 공장으로 가겠지. 그러나 혹 부나방이 불빛을 외면하지 못하듯 본능적으로 한성인쇄로 먼저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을까? 이 부분은 자신이 없었다. 팔덕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동전을 던져서 숫자가 나오면 통일방직, 뒷면이 나오면 한성인쇄.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았던 것이다. 팔덕은 동전을 위로 던지고 왼손으로 받고는 오른손으로 덮었다. 운에 맡기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팔덕으로선 하루종일 감시할 수는 없었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택해야 한다. 낮에는 사실 위험하다. 게다가 낮 동안에는 자신이 할 일이 따로 있었다. 비록 심통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수금하겠지만 금액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언제까지 그 일이 이어질지 장담할 수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 자신과 같은 그늘 속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어둠을 택한다. 정 선생도 그늘 속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러하리라.

팔덕은 오늘 낮 동안은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왕십리 헛간에 더 이상 들락거렸다간 위험한 일이 또 생길 수도 있다. 이제 가능하면 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 좋다.


팔덕은 땅거미가 지기 한 시간 전부터 성수동 한성인쇄 근처 버스정류장 건너편에서 잠복했다. 잠복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이렇게 그늘 속에서 사람을 기다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와 각오가 남달랐다. 철저히 몸을 숨기고 눈 똑바로 뜨고서 살펴야 한다. 정 선생이 한성인쇄로 가려면 택시를 타지 않는 이상 이 정류장에서 내릴 테니까. 정 선생으로서는 아무도 납치 사실을 짐작도 못할 테니 느긋한 마음으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러나 팔덕은 마음이 느긋할 수 없었다. 혹 자신의 선택이 틀려 정 선생이 양말공장으로 간다면 오늘 이 잠복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오늘 정 선생이 시골이라는 데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도 역시 헛수고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팔덕은 운에 맡기자고 자신을 여러 번 다독였다.

버스가 몇 번 지나간 뒤, 저녁노을로 인해 버스정류장 근처 상점 창문들이 붉게 물든 것이 차츰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려 할 때 버스가 또 한 대 도착했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내리면서 마지막으로 자그마한 그림자가 내려서는 것을 보는 순간, 벽에 기대어 있던 팔덕은 펄쩍 뛸 정도로 놀라 몸을 세우고 앞으로 내밀었다.

인희!

아니, 저 저건 인희 아냐?

팔덕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납치당했잖아? 아니, 납치당했다고 자신이 생각했지. 그래도 어떻게 이런 일이?

팔덕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운은 아직까지는 자신 편이었다.

팔덕은 그늘 속에서 인희를 뒤따라갔다.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인희의 뒷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당장 달려가서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팔덕은 뒤따라가면서도 주변을 계속 살폈다. 누군가가 뒤를 미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벌써 한 번 그런 경험이 있었지 않은가. 팔덕은 극도로 조심하면서 멀찌감치 뒤떨어져 인희와 보조를 맞추어 따라갔다.

인쇄소 동네 입구 쪽으로 인희가 들어가자 주변에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팔덕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인희를 스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따라와.”

인희가 소스라치듯 놀라 얼어붙는 모습이 느껴졌다.

팔덕은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서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또다시 말했다.

“이리 와.”

그러나 인희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팔덕은 골목에서 나와 인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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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희는 기진맥진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팔덕이 인희를 거의 부축하다시피 해서 왕십리 헛간으로 데려가 무엇을 먹이려 했으나 인희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도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팔덕은 인희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무엇인가 어색했다. 옷은 어제 입은 그대로인데 인희의 행동에서는 보일락 말락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풍겨나왔다. 팔덕은 더 이상 묻지는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어딘지 달라져 있었다. 평소 인희의 모습이 아니었다. 표정도 그랬고,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웠으며, 무엇보다도 손동작이 이상했다. 손가락을 자꾸만 꼬무락거리며 들키지 않으려는 듯 옷 어느 부위를 살짝살짝 매만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팔덕은 인희가 자기를 보았을 때 반가워하고 안심해 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인희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낮게 신음소리도 내는 듯했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팔덕은 이해할 수 없었다. 팔덕이 반가운 마음에 그동안 어떻게 된 거냐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걱정하는 말도 해주었지만 인희는 입을 다물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왕십리로 와서 헛간까지 데리고 올 때도 겁먹은 표정으로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몸을 자꾸 뒤로 빼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팔덕은 처음에는 납치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이 간단치 않다는 생각을 곧 하게 되었다.

팔덕은 헛간 밖에 나가 물을 길어와서 버너에 데웠다. 봄 날씨지만 어제오늘 험한 일을 겪어 그 충격으로 혹 추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팔덕은 따끈한 물을 군용 컵에 따라서 인희에게 내밀었다. 인희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괜찮아. 이거 마셔.”

인희는 바닥에 앉은 채 아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마시면 몸이 따뜻해질 거야.”

인희가 고개를 살짝 들더니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컵을 받았다. 그리고는 호호 불며 조금 마셨다. 그리고 또 한 모금. 잠시 지나서 또다시 호호 불며 여러 번 홀짝거린다.

팔덕은 건빵을 꺼내어 내밀었다. 인희는 고개를 흔든다.

“인희야, 나한테 다 말해. 괜찮아. 여기는 아무도 못 찾아. 안전해.”

인희는 멀뚱한 눈을 크게 뜨고 팔덕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여기 있잖아. 나만 믿어. 어제오늘 내가 너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너 보호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여기는 안전하니까 마음 편하게 있어.”

인희의 표정은 여전히 망연했다. 그 눈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너 어제 정 선생 만났지?”

인희의 표정이 변했다.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온다. 인희는 다리를 세운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울었다.


팔덕은 인희를 가까스로 달래서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다. 인희가 감추려는 편지도 강제로 꺼냈다. 윗도리 안쪽에 바느질해서 붙여놓았던 것이다.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 나만 믿어. 그 사람들은 다 남이야. 너하고 나는 같은 마을에서 자랐잖아.”

팔덕은 인희 옆에 나란히 앉아 등을 톡톡 두드려 주며 말을 이었다. 인희가 몸을 피하는 시늉을 한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다 너를 이용해 먹고 말 거야.”

팔덕은 자리를 옮겨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희 앞에 앉았다.

“이 편지 내용 너 아니?”

팔덕이 편지를 인희 얼굴 밑으로 살짝 들이밀었다. 인희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사람이 너를 많이 걱정하더라.”

인희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야. 걱정하는 거 그냥 말뿐이라고. 그 사람들 믿으면 안 돼. 처음에는 잘 대해 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귀찮아지는 거야. 세상이 다 그래.”

인희는 표정이 다소 굳은 채 팔덕을 바라본다.

“읽어볼래?”

팔덕이 편지를 쑥 들이밀었다. 인희가 몸을 움직거리더니 손을 내밀려 한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내일 읽어봐. 별 내용 없어. 내가 말한 게 다야.”

팔덕은 얼른 편지를 물리고 나서 일어났다.

“지금 구파발로 갈 거야. 힘들어도 일단 거기에 가서 자자.”

인희의 관심을 돌릴 다른 구실을 찾던 팔덕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구파발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자, 어서 일어나.”


그 밤 파김치가 다 된 인희를 끌고 팔덕이 구파발 은신처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막차 버스를 타고 구파발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을 때 저 너머 먼 곳에서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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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팔덕은 새벽 3시경에 일어나서 창고를 빠져나와 구파발로 향했다.

어제 저녁 팔덕은 정 선생의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우연의 일치가 일어나기도 하는구나. 팔덕도 가슴이 아렸다. 정 선생이 준 봉투 속에는 ‘나의 천사 인희에게’라고 겉봉에 쓴 편지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밀봉되어 있지 않아서 내용물을 꺼냈다가 읽지는 않고 도로 집어넣었다. 이 일이 좀 정리된 뒤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팔덕은 어젯밤 인희가 잠들기 전에 자신이 새벽에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나갔다 올 테니, 혹 잠에서 깨어 자기가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두었다. 늦어도 아침 7시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둘러서 통금이 해제되기 전에 출발한 것이다.

구파발 버스 종점에는 택시 몇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중 일부에는 벌써 손님이 타서 앉아 있기도 했고, 택시 주변에 서성이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봄이긴 하지만 새벽이라 다소 추운 탓에 한쪽에서는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둘러서 있기도 했다. 새벽일 나가거나 급한 일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택시에 합승하여 총알처럼 달려서 시내로 들어간다. 택시는 운전사 빼고 4명이 정원이었으나 보통 손님만 5~6명이 끼어서 타곤 했다.

택시 안에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사정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합승택시를 거의 새벽마다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사이에 손님들은 한 번씩 팔덕을 호기심 있게 훔쳐본다. 아직 앳된 얼굴인데 까까머리가 아니라 머리칼이 텁수룩한 것이다. 고등학생 나이일 텐데…….

팔덕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으나 얼굴을 들지 않고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 승객이 참다못해 묻는다.

“학교 다니니?”

팔덕은 고개를 더 숙이고 울상을 지었다.

“무슨 일 있니?”

팔덕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 그래, 어디 가는데?”

팔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다.

“중앙…… 의료원에요.”

앞좌석에 앉은 승객이 갑자기 돌아다보며 묻는다.

“거긴 왜? 누가 다쳤니?”

“…….”

“많이 다쳤어?”

“아뇨. 다친 게 아니라…….” 뒷좌석 한 승객이 앞 승객의 팔을 손가락으로 찌른다. 더 묻지 말라는 표시 같았다. “엄마가 위독하다고 오늘 아침에 빨리 오랬어요.” 팔덕은 울음기가 가득한 얼굴을 들고서 모기 소리로 더듬거리듯 대답했다.

“에고…….”

택시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국립중앙의료원은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에서 의료진과 의료장비를 지원받아 설립되었다. 동대문 가까운 을지로6가에 있으며, 주로 저소득층 환자들이 이용을 하고 있었다.


팔덕은 동대문에서 또 다른 택시를 탔다. 사실 택시는 생전 처음 타보는 팔덕이었다. 시간이 급했던 것이다. 동대문 포목점 등에서 물건을 잔뜩 떼어와 지게꾼에게 지어서 트렁크에도 쑤셔넣고 뒷좌석에도 밀어 싣는 뚱뚱한 아주머니에 뒤이어 팔덕도 택시에 올랐다. 팔덕 뒤로도 한 사람이 커다란 보따리를 안은 채 택시에 올랐다.

팔덕은 왕십리 버스정류장 조금 지나서 내렸다. 그때까지도 다른 승객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팔덕은 그곳에서 양말공장으로 걸어갔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았으나 여명이 비치고 있어서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양말공장은 희뿌연 하늘 밑에서 고대의 폐허처럼 음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이 신새벽 마치 생명이라곤 맞은 적 없는 저주의 성 같은 괴기스런 윤곽으로 팔덕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팔덕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공장 뒤쪽으로 돌아갔다. 담을 살짝 넘어 들어가서 앞마당 쪽으로 나왔다. 거기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서.

문은 쉽게 딸 수 있었다. 간단한 도구만 있어도 열 수 있는 잠금장치였다. 그 정도는 팔덕에게는 아무 문제도 안 된다. 안으로 들어가 서류철을 들어서 가리고 라이터를 켰다. 책상 옆쪽에서 작은 손금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 선생의 편지 속에 써 있는 대로 다이얼을 돌리자 손금고는 금방 열렸다. 통장과 도장, 그리고 현금 약간. 다른 것은 손대지 않고 그것만 챙겼다.

팔덕이 택시를 타고 구파발 은신처로 돌아오자 인희는 깨어서 앉아 있었다. 겨우 6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팔덕은 잊지 않고 종로5가에서 찐빵도 사왔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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