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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덕, 한성인쇄소 손 사장은 방 안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일요일 낮에 인쇄소에 들러 잔업을 하고 있는 직원들을 잠깐 둘러보고 기원에 갔었다. 마침 그곳에 와 있는 치과의사 한상진 원장과 마주쳤던 것이다.
“손 사장, 오랜만이오. 신수 괜찮소?”
손 사장은 한 원장이 자신보다 두어 살 아래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늘 하오 식으로 말을 걸어 마치 자신을 하대하는 것 같아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상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부산 피난시절에 왜정 때 잠시 얼치기로 배운 치공 기술을 뻥튀기해서 피난민들 치아를 마구잡이로 뽑고 때워주고 하여 돈 번 것을 어디에서 주워들어 알고 있어서 멸시하는 게 아닌가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그 치과쟁이와 자신은 나란히 달리는 선분 a와 선분 b처럼 도무지 어디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설사 치아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해도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조선반도에서만 살았고, 저놈 치과쟁이는 왜놈 땅에 가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남들 입 냄새나 맡다가 육이오 이후에 서울에 왔으나 주변머리가 변변치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이곳 변두리까지 왔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는 터였으니 제놈하고 나하고는 이빨로도 연결될 수 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자신은 부산에서 올라와 적당한 사업거리를 찾고 있을 때 위암으로 오늘내일하던 육촌 이종동생에게서 한성인쇄소를 거저다 싶게 인수하여 여기에 자리 잡았으니 저놈하고 자신하고는 원수질 일도 없었다. 이뿐이랴. 자신은 대한제국 광무황제 연간에 출생신고를 정리할 때 잘못해서 호적에 두 살 적게 올라갔다고 뻥치고 다녔으니 (남들도 또래 모임에서 지기 싫을 땐 그러잖느냐고) 지놈도 나처럼 나이를 속였다 쳐도 외형상 적어도 댓 살이나 아래인 거다. 그런데도 고놈이 치과쟁이랍시고 자신을 공장바닥에서 굴러먹는다 멸시하는 것인지 만날 때마다 깐족깐족하는 것이었다.
저 위에 대한제국이니 광무황제니 하고 좀 튀게 말을 꺼낸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보통들 구한말이나 고종이라고 하지만, 흔히 왜놈들 얘기할 때는 대일본제국이니 천황이니 하지 않느냐고. 손 사장은 이 점에서는 남다른 고집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왜놈에게 잠시 먹혔다고 오천년 역사가 사라지냔 말이다. 지들이 대일본제국이면 우리는 대한제국이고, 알고 보면 백제 핏줄 섞였다는 천황을 들먹이면 우리는 고종 대신 광무황제, 순종 대신 융희황제, 그리고 민비는 명성황후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늘 생각해서 틈만 나면 손 사장은 핏대를 올리고 손가락 접었다 폈다 하며 대한제국 짧은 역사를 짚어가면서 열을 올리는 것이었다. 뭐 그리 못할 것도 없잖아!
“남 신수 걱정 마시고 거 이빨이나 똑바로 뽑으셔. 동경치과 갔다 온 사람마다 잇몸이 퉁퉁 부어 밥숟가락도 못 뜨고 죄다들 빼빼 마른다니까.”
“내 손 사장 고물 이빨은 안 뽑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 오늘 한 수 가르쳐 드릴까.”
손 사장은 약이 바짝 올랐다. 이 이빨쟁이는 어떻게 응수하고 아무리 심기를 건드려 놓으려 해도 요리조리 잘도 받아넘기는 것이었다. 생겨먹기는 꼭 왜놈 닮아 잔나비 상인데 하는 짓거리는 영락없는 능구렁이다.
“좋수다. 오늘은 나한데 진땀 좀 흘릴걸.”
이렇게 해서 마주 앉은 바둑은 손 사장 말대로 한수 한수 땀나게 하는 접전이었다. 사실 그동안 손 사장이 번번이 져온 탓에 표현은 안 했지만 늘 벼르고 있던 차였다. 손 사장은 이 근방에서는 제법 고수여서 주변 사람들을 모두 아래로 보고 있었는데, 요 이빨쟁이는 영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기 하수들이 죄다 이빨쟁이에게 한두 점 깔게 하면서 두지 않느냐 말이다. 자기에게 말 놓듯이 대하지, 자기보다 하수인 것이 뻔한데도 막상 붙었다 하면 자신이 망신당하지, 이러니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일본 기보 구해다 몇 날 며칠 눈곱 떼어가며 공부에 공부를 한 터였다. 이렇게 해서 실상 오늘 이빨쟁이와 마주치기를 기대하고 기원에 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패싸움으로 두 사람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있을 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손 사장은 한편으로는 화를 풀지 못해, 또 한편으로는 자책하느라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만 폭폭 쉬고 있었다. 그깟 패 하나 잘못 떨어뜨린 게 뭔 큰 죄냔 말이다. 손 사장은 지루한 패싸움 끝에 마지막 승부수라고 생각하고 멋지게 돌을 놓으려는 순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에서 돌이 미끄러져 나와 다른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빨쟁이는 얼른 패를 해소해 버렸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실눈 뜨고 있던 놈의 눈알이 순간 희번득 떠지면서 번들거리는 흰 돌을 꽝 내리박듯이 쑤셔넣고서 손 사장의 피 같은 검은 돌들을 냉큼냉큼 집어올려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승리의 팡파르가 이빨쟁이의 콧속에서 흥흥거리며 흘러나오면서.
“아니, 이건 돌이 미끄러져 떨어진 건데…….”
“허허, 일수불퇴올시다.”
허허벌판 백집 한가운데 덩그머니 떨어진 흑돌 하나. 뭐, 일수불퇴라고? 아니, 그게 잘못 떨어진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손 사장은 분노로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여기까지였으면 평소 털털하기로 소문난 손 사장으로선 분하긴 했지만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아주 작지만.) 오히려 이빨쟁이를 남의 실수를 이용하는 소갈딱지라고 소문내고 다닐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순간 능구렁이 아닌 비열한 늑대로 변한 이빨쟁이가 한 다음 말이 역사를 뒤집고 말았다.
“아니, 왜 손을 딸딸 떠는 게요? 딸딸이 할아범이라서 그런가!”
아! 분노의 완성. 이는 곧 삼차대전을 의미했다.
손 사장은 바둑판을 뒤엎어 버렸다. 바둑돌이 저 멀리까지 튀는 것이 손 사장 눈에 보였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난장판이었다. 옆에 둘러앉아서 심각하게 지켜보던 관중들까지 비명을 지르고 뒤로 나자빠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기원에 눌러앉아 내기바둑 개평 뜯으며 지내던 절뚝발이 정 총무는 저쪽 출입구 카운터에 앉아 있었는데, 아 글쎄 바둑돌이 거기까지 날아가 콧구멍에 박혔다고 두고두고 떠벌이고 다니는 거였다. 그것 때문에 다 나아가던 축농증이 다시 도졌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아무튼 그 뒤로 이 바둑판 사건으로 손 사장에게 손가락질 안 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구시렁 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손 사장은 불끈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섰다. 아니, 니들은 일생 살면서 그래 지금껏 바둑판 한번, 장기판 한번, 화투판 한번, 술판 한번, 엿판 한번, 밥상 한번, 책상 한번, 사업 한번, 인생 한번 엎은 적 없다더냐? 그렇게 못해 본 네 놈들이 ×알 두 쪽 떼고 행주치마 걸쳐야 할 위인들이지. 안 그래? 왁! 왁왁!
손 사장은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이마를 벽에 박아가며 이렇게 풀풀 성깔을 냈지만, 실은 그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여간 낯부끄러운 게 아니다.
아니, 잠깐. 딸딸이 할아범이란 말이 어때서 이 지경이 된 거지?
사실인즉 손 사장은 딸만 다섯이었다. (환장하게도 이빨쟁이는 아들만 셋 있었는데, 틈만 나면 손 사장 들으라는 듯 저 멀리서도 딸딸이 할아범 어쩌구 하면서 히죽대곤 했었다.) 게다가 그 딸 다섯에게서 난 자식들이 아들은 없이 모두 딸, 그러니까 손녀가 도합 열다섯이었다. (이빨쟁이는 요 대목이 제일 신난다는 듯 자기는 손주, 그러니까 손자만 일곱이라고 낄낄거리며 대꾸질했다.)
기실 오늘이 바로 부인인 선우영 여사의 생일이라서 어제 토요일에 딸들이 손 사장 집에 와 있었다. 아이들을 죄다 데리고서. 아이들이라야 봤자 몽땅 딸들이지 뭐! 아무튼 제일 큰 (외)손녀가 열다섯 살, 그리고 딸들이 모여서 서로 의논했는지 그 아래로 차례대로 한 살씩 내려가면서 열네 살, 열세 살, 열두 살……. 한 살까지 내리 열다섯. (아이구야.) 사위가 다섯인데 그 중 넷은 이번 주말에 일들이 있다나 뭐라 하면서 오지 않았고, 다만 대전 사는 막내딸만은 오늘 출산한다 해서 사위까지 산부인과에 붙어 있느라 오지 못했다. 그 대신 둘째 딸이 대전에 내려가서 두 살배기 딸을 데리고 왔다. 그런 연유로 이르면 오늘 오정 지나서 출산 소식이 오리라 목하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손 사장은 딸들이 출산한다 할 때마다 긴장 긴장하다가 늘 손발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아서, 이번에는 집 안에서 희망 없이 어슬렁거리는 대신 요 며칠 갈고 닦았던 바둑 검을 휘두를 겸 기원으로 행차를 했던 것이다.
손 사장은 스스로를 달래고 달랬다. 이도 부드득 갈고 머리통도 벽에 찧고 손끝 세우고 더부룩한 머리칼 속을 북북 긁어대고 별짓 다했지만 분노인지 분뇨인지 아무튼 뒤엎어진 분뇨통 아니면 활화산처럼 마구 솟구치고 뒤범벅된 마음속 응어리인지 그런 것들이 풀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 근처만 바득바득 더 갈리고 있는 것이었다.
방 밖은 손녀들 울고 웃고 싸우고 떠드는 소리로 소란스러웠고, 부엌에서도 이것저것 부치고 지지고 하하호호 부산했다. 모두가 즐거운 시간. 벽에 이마를 대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위로하고 포기하는 것을 반복하는 자신과는 영 다른 세상이었다. 조금 전에 손녀 둘이 할아버지의 미닫이 방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오려다 벽과 씨름하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았는지 쭈뼛쭈뼛하더니 도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저들끼리 할아버지 이상하다는 둥 어쩌고 하는 말소리가 웅얼웅얼 방문 밖에서 들리더니 조금 지나니까 그 소리도 사라지고, 그 이후에는 아이들이 아예 할아버지 방 근처에는 오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막내딸 출산 소식은 어찌 되었누 하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대청에 놓인 전화통이 요란하게 울린다.
따르르르르릉!
아차, 대전에서 온 전화인 모양이다.
손 사장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막 나가려는 순간 건넌방에서 문이 벌컥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며 전화 왔다고 소리치며 소동이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부엌문도 열리며 “내가 받을게” 하고 둘째 딸애가 나서는 소리. 그 애가 마루 쿵쿵거리며 전화통으로 다가오는 것 같더니 이층에서 바삐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며 셋째 딸이 소리친다.
“언니, 내 전화일 거야. 홍 서방이 부대에서 돌아오는 대로 전화한다고 했거든. 이 시간에.”
“아, 그래? 받아 봐.”
“어, 아빠다, 아빠.”
아마 셋째 딸의 아이들일 테지. 몇 아이가 전화통 쪽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난다.
그 뒤로는 야단법석. 엄마가 전화를 받자마자 아이들은 아빠 아빠 하며 통통 뛰고, 엄마 나 바꿔 줘, 나도 나도……. 두세 아이가 엉켜서 엄마 붙잡고 조르고 하는 소리가 요란스레 대청을 울린다. 결론인즉 군부대에 장교로 복무하는 셋째 사위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런 소란함도 전에는 즐거움이었지만 오늘은 만사에 심사가 뒤틀린다.
뭔 집안에 계집애 소리들만 요란하니, 쯧쯧.
손 사장은 다시 대전 소식은 어떻게 됐나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순산해야 할 텐데……. 갑자기 막내딸 모습이 떠올랐다. 혹 이번에 아들이라도 낳았으면……. 그렇게만 되면 손 사장은 그 위로 몽땅 딸인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손자 하나면 이빨쟁이 안 부러울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어제 딸애들이 제 어미와 나누던 대화 한 토막이 떠올랐다.
“얘, 배가 앞으로 뾰족하면 딸이고 양쪽으로 퍼져 나오면 아들이라던데, 영선이 그 애 배가 옆으로 펑퍼짐하지 않든?”
“맞아. 굉장히 나왔었어. 옆으로. 그것 때문에 그 애가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우리 아이들 때도 배가 앞으로만 나왔었잖아…….”
그래 맞다. 영선이 그 애 배는 옆으로 아주 많이 퍼져 있었다. 옳다구나. 아들 맞지, 맞아. 아주 우람한 손주가 나올 걸세. 떡두꺼비 같은 천하장사가 나오는 게지, 암.
천하제일 대장군 납시오! 이놈들!
손 사장은 금세 마음이 들떴다. 갑자기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흠, 그래……. 이름은 뭐라 짓지? 귀하고 귀한 손자에게는 뭔 자를 넣어야 하는 거야……?
그러다가 아차 내 친자손이 아니지 하는 생각에 미치자 또다시 풀이 죽는다.
에이, 그까짓 이름 아무려면 어떠냐, 제 애비 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긴 그래도 이름이 좋아야지.
손 사장은 갑자기 저쪽 방에서 마루에서 마당에서 이리저리 왁자하며 뛰어다니는 손녀들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가만있자. 큰딸 아이들에서부터 더듬어 볼까.
진영 진주 진애……. 맞나? 그 다음 진……, 진……, 아 그래, 진선.
둘째 애들 이름이……. 흠, 지영, 화, 화, 화……, 화영.
셋째 애들은 명, 명, 그래 명자. 아차차, 둘째 애들에서 막내가 빠졌네. 그 애 이름이, 흠, 은영. 운영이었나? 아니, 맞아. 은영.
하, 그 다음이 명숙, 선, 선, 선주…….
손 사장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이름도 헷갈릴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셋째 딸 쪽인지 넷째 딸 쪽인지 알쏭달쏭했다. 손 사장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탁탁 털고 다시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시작하면 진영, 진주……, 진, 진, 진…….
어떻게 된 거야? 도무지 이름들이 이어지지 않는다. 안 되겠다 싶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얼굴을 떠올리고, 얼굴도 헷갈리면 제 어미들 이름을 들어가며 하나하나 세었다. 가선이 첫째 애, 둘째 애, 가인이 첫째…….
이렇게 세어가다 보니 어, 열넷밖에 안 된다. 하나가 빠졌네.
손 사장은 다시 손가락을 꼭꼭 짚어가며 하나하나 세어나갔다.
…… 미희, 영은, 선주, 은지…….
어랍쇼, 열여섯일세! 말이 안 된다. 누구를 중복해서 센 건가? 아니, 혹시 열여섯이 맞는 거야? 원래가 그랬었나?
손 사장은 이번에는 나이순으로 세어보기로 했다. 제일 큰 애가 열다섯 살 진영이고, 그 다음이 지영, 진주, 그 다음이 화영인가……, 명자……? 손 사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손 사장은 안 되겠다 싶어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마당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 지른다.
“할아버지!”
“잠깐, 잠깐만. 너희들 한번 세어보자.”
손 사장은 장독대 옆에 있는 손녀부터 하나하나 세어갔다.
하나, 둘, 셋, 아냐 얘야, 움직이지 마! 넷, 다……. 아, 가만 좀 있으라고.
갑자기 건넌방에 있던 아이들이 방문을 열고 까르르 웃으며 몰려나온다.
“할아버지다!”
아냐, 거기 거기 가만히 있어! 가만, 가만. 가만히 있으라니까! 아니, 숫자 세는데 왜 왔다갔다하는겨. 사람 헷갈리게.
손 사장은 숫자를 세다가 잊어버렸다.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댓돌 위에 있던 신발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한마디로 난리였다. 손 사장은 멍한 눈으로 그 혼잡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다잡고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다시 하나하나 세어나갔다.
…… 일곱…… 여덟……. (저 애 아까 저쪽에 있지 않았었나? 센 것 같기도 한데…….)
엣다 모르겠다 하고 계속 세어나가 보니, 이번에는 열다섯을 세고도 세 아이가 남아돌았다.
뭔 일이래! 원래 애들이 이렇게 많았어? 그전에 수도 없이 세어봤을 때는 틀림없이 마누라까지 합해서 정확히 스물하나였다. 딸 다섯, 손녀 열다섯. 첫째한테서 넷, 둘째한테서 셋, 셋째한테서 넷, 넷째한테서 셋, 다섯째한테서 하나. 이러면 도합 열다섯 맞는 거지? 아, 맞잖아, 열다섯. 여기에 딸 다섯 하면 스물이요, 마지막으로 마누라 집어넣으면 스물하나로구나. (얼싸) 뭐야, 노래하는 거야, 시방?
손 사장은 손가락을 풀고 딸 다섯인 것은 틀림없는 거겠지 하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자 그 순간까지 왁자했을 부엌 안에 갑자기 적막이 감돌고 여덟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손 사장은 아무런 설명 없이 하나하나 세었다. 큰애부터 시작해서 저 애는 가영이, 이쪽 문 가까이 있는 애가 둘째 가희, 선우 여사 옆에서 막 냄비 들어올리는 애, 즉 이제 겨우 돌 지난 막내손녀 선주를 들쳐업고 있는 애가 넷째 가인이 맞을 거고, 프라이팬에서 쇳주걱 번쩍 치켜들고 마치 이쪽으로 집어던지려다 동작이 멈춘 듯한 노파는 틀림없이 자기 마누라 선우영 여사일 게다.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여기에서도 손 사장은 혼란스러웠다. 하나, 둘, 셋, 넷. 다 합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스물 몇이나 되는 거야, 도대체? 그때 뒤쪽에서 소리가 난다.
“아빠, 나오셨어요? 거기 서서 뭐하세요?”
아차, 이층에 올라가 있던 넷째, 아니 셋째가 어느 틈엔가 내려와 있었다.
셋째 딸에게 돌아선 손 사장의 머리칼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으며,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때 대청의 전화통이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울렸다.
따르르르르릉. (이 장면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는 손 사장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홍 서방이 또 전화했을 거예요. 아까 다시 건다고 했거든.”
셋째 딸 가선이 쪼르르 전화통으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올린다.
“여보세요……. 어머, 김 서방! 그래 어떻게 됐어요? 가혜가……. 에? 뭐, 뭐라고요? …… 에그머니나.”
부엌에 있던 선우 여사와 딸들이 허겁지겁 한꺼번에 몰려나오는 바람에 손 서방은 떼밀리듯 저만치로 물러났다.
“그래, 어떻게 됐대? 왜 그래? 가혜 그 애는 어떻대? 뭐래?”
셋째 딸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망연한 모습으로 돌아다본다.
“싸, 싸, 쌍둥이래요. 세 쌍둥이……. 모두 딸.”
손 사장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이고.
아무튼 자손 다복한 손 사장 댁 손녀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우선 큰딸, 둘째 딸, 셋째 딸 순으로 하면 이러하다. 진영, 진주, 진애, 진선, 지영, 화영, 은영, 명자, 명숙, 명경, 명희, 미희, 영은, 선주, 은지.
이것을 나이순으로 하면 다음과 같다. 제일 위부터 진영(첫), 지영(둘), 진주(첫), 화영(둘), 명자(셋), 진애(첫), 미희(넷), 명숙(셋), 진선(첫), 명경(셋), 영은(넷), 은영(둘), 명희(셋), 은지(다섯), 선주(넷). (여기에서 첫은 첫째, 둘은 둘째……, 등등)
이러하니 천하의 손 사장이라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그런 중에도 부인 되시는 선우영 여사는 조금도 헷갈리지 않고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딸 순서대로는 물론이고, 나이순에다 어떤 사위의 딸들인지도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손 사장은 단 한 번도 다섯 사위, 다섯 딸하고 열다섯 손녀들을 제대로 연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선우 여사님은 하품 나오는 것 억지로 참아가며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밤 10시 라디오 연속극 끝나고 11시에 세레피아 신경안정제, 즉 수면제 선전이 나오기 시작하면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써놓은 종이를 끄집어내어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공부한 덕을 본 것이다. 그 이전에 영감은 벌써부터 코를 곯고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첫째 사위 최씨 집은 딸 가영과 네 손녀 진영(15), 진주(13), 진애(10), 진주(7)
둘째 사위 문씨 집은 딸 기희와 세 손녀 지영(14), 화영(12), 은영(4)
셋째 사위 홍씨 집은 딸 가선과 네 손녀 명자(11), 명숙(8), 명경(6), 명희(3)
넷째 사위 박씨 집은 딸 가인과 세 손녀 미희(9), 영은(5), 선주(1)
다섯째 사위 김씨 집은 딸 가혜와 손녀 은지(2)
(여기에서 괄호 속 숫자는 나이)
선우 여사는 아직도 총기가 넘쳤다. 다섯 딸이 15년 동안 1년마다 차례로 출산할 때마다 쫓아다니며 몸조리해 주느라 비록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밤이나 낮이나 약을 달고 살면서 일어날 때나 앉을 때나 에고고고 소리를 냈지만, 혹 선우 여사가 잠시 잠깐이라도 정신 줄을 놓았다간 집안 결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시가나 친가나 할 것 없이 죄다 다산다복이라 선우 여사가 잊지 않고 챙겨야 할 어르신들 생신을 비롯해서 제사나 이사는 물론 동기간이나 자손들 생일, 백일, 돌, 입학, 졸업, 입대, 제대 등등이 해마다 60가지가 넘었다. 1년 365일 중 평균 닷새마다 한번씩 행사가 있는 것이다. 손 사장이 밖에 나다니면서 사업입네 하고 있지만 집안에서 선우 여사가 버텨주지 않았다면 자기 친자손뿐만 아니라 주변 친척들에게서 벌써 패륜이니 배은망덕이니 하며 내놓은 사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육이오 난리통에 인명이 많이 희생되었다 하니, 선우 여사는 이렇게 다산다손하여 아들딸 구별 없이 자손들 불리는 일도 다 나라 위한 일이려니 했다. 게다가 김일성 그 공산당인지 불한당인지 하는 인간에 맞서려면 쪽수라도 많아야 되는 것 아닌감. 그게 참말 애국이여, 안 그려?
각설하고, 손 사장 댁에 손녀딸이 왕창 불어났다는 소식은 인근에서 초대형 뉴스가 되어 퍼져나갔다. 이빨쟁이, 아니 동경치과 한상진 원장은 자신의 자손이 출생한 것도 아닌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거나하게 한잔 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이렇게 돈 것은 소문뿐만 아니다. 손 사장은 그야말로 완전히 돌아버렸다. 마나님, 딸 다섯, 손녀 열여덟, 합해서 스물넷. 차라리 하나 더 낳아서 스물다섯 채워랏! 하긴, 손 사장 자신을 포함하면 스물다섯이 되기는 한다. 어떻든 지금 손 사장 심정은 어떠하랴. 말로는 표현 못 한다. 그 마음 누가 위로할꼬.
사무실에 나와 앉은 손 사장은 손님이 왔다 가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공연히 다 지난 장부들 죄다 펼쳐가면서 거래처나 숫자는 보지 않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는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면 우리 진주 나이인가? 아니, 열두 살이라니까 화영이하고 동갑이겠구먼. 애는 퍽 어려 보이는데 그래도 나이는 꽤 됐어. 여기 와서 얼굴이 좀 펴지긴 했는데 애가 너무 야들해. 심성은 고운 것 같더만…….
손 사장은 요즘 공장 식당에 가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직원들 식사가 어떤가 찬찬히 살피듯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눈길은 자꾸만 그 아이 쪽으로 향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인희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서 저만치 달아나듯 걸음을 재게 옮긴다.
에고, 우리 화영이는 여기 서울에서 호강하고 살고 있고만 저 아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해곶에서 왔다는데 대체 거기가 어디야? 허 참, 애는 고운데 이거 영 걱정이구만…….
손 사장은 둘째 딸 가희의 둘째 손녀인 화영을 떠올리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인희를 이곳에 두고 밥일 심부름시킨다면야 저 배 곯지는 않겠지만 부모도 없이 저리 굴러다니면 나중에 무엇이 될꼬. 이리저리 심상을 옮기다가 문득 양녀로 들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대체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거지? 사위들은 그러잖아도 딸 천지인데 양녀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한다면야 내 밑으로 넣을 수밖에 없으렷다. 그렇게 되면……. 막내딸 밑으로 여섯째가 되는데, 아니 그러면 화영이 이모뻘 되는 겐가? 이거 촌수 맞게 계산한 거야? 음……. 허, 맞네. 이모뻘이야. 아이구야, 그게 말이 되는 거야? 허……. 게다가 마누라 펄펄 뛰겠지. 그렇잖아도 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 거기다 딸을 또 얹을 거냐고 난리칠 게 뻔하다.
조거 여기에서 얼마나 버틸까? 밥 주고 재워주면 당장 지내기야 하겠지만 좀 철들기 시작하면 사정이 달라질 텐데, 그때는 어떡한다…….
더군다나 지난번 양말공장 정 선생하고 통화했을 때 들은 말이 영 개운치 않았다. 팔랑이란 놈이 두어 해 전에 그곳에 있을 때 요상한 짓을 많이 한 것은 분명한데 확실한 꼬리를 잡지 못해서 어떻게 해볼 요량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일은 꽤 솜씨 있게 해서 불량도 거의 나지 않고 수량도 족히 잘 채워서 손해 본 것 같지는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도 그쪽 공장 내에서는 소문이 영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놈이 하도 영악해서 꼬리를 밟히지 않은 게지. 게다가 공장 그만두고 나서는 어디에서 굴러먹었는지 가끔 미제 물건 잔뜩 들고 나타날 때마다 사람이 변해 갔다고 한다. 종로통 같은 데 쏘다니면서 쓰리질 한 걸 테지만 그거야 보지 않았으니 뭐라 할 수 없고 아무튼 신수가 조금씩 나아져 갔다는 게다. 그런데 그런 놈이 갑자기 시골에 가서 예쁘장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다짜고짜 일을 시켜 달라 했다? 대체 뭔 짓을 꾸미는 거야…….
손 사장은 머리를 흔들며 식당을 나섰다.
절대 안 돼. 그놈한테 저 애를 맡겼다간 별 짓거리 다 할 게 분명해. 순진한 여자아이 꼬드겨서 할 짓이 뻔하잖아.
이노옴!
손 사장은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밀고서 휘저었다. 직원 한 명이 저 앞에서 나타났다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듯 황급히 옆으로 사라진다. 손 사장은 손녀딸 화영과 인희가 자꾸 겹쳐져 떠오르면서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내 이놈이 그 아이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할 테다! 음숭스런 놈.
사무실에 올라간 손 사장은 미스 곽을 불러 밤다리 할멈 잠자리 불편하지 않게 해드리라고 지나가듯이 말했다. 인희 이름은 일부러 지우고서. 그리고 나서 의자를 빼고 뒤로 길게 눕다시피 하니 갑자기 엊그제 기원 난장판 만들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확 붉어진다.
아이구야, 지금 밤다리 할멈이 문제냐. 내 일이 걱정인데. 식당이야 미스 곽이 알아서 잘 하겠지 뭐.
사실 지금 손 사장에게 제일 큰 문제는 바둑판 엎은 일대 사변을 어떻게 무마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인근 사람들 마주치면 무상무심하듯 험 하고 지나쳤지만, 이런 상태로 언제까지 뻣대고 있어야 할지 자신도 걱정이었다.
2
정 선생은 한성인쇄소 손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서 마음이 설렜다. 아, 팔덕이 놈이 그 아이를 데리고 거기에 갔었구나. 아까 낮에 잠깐 본 그 여자애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저녁 늦게까지 공장 일을 마무리한 정 선생은 사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는 매일 정해진 일이어서 일종의 일일보고 같은 것이었다. 사장은 아침 10시 넘어서 공장에 나와 장부 대강 훑어보고는 미군에게서 불하받은 지프를 타고 나가버리곤 했다. 그가 가는 곳은 주로 골프장이었다. 군 장교와 미군들을 만나서 놀아주고 시중들고 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기 때문이다. 양말공장을 확장해서 군복까지 제작해 볼까 하는 심사였던 것이다. 사장은 오후에 잠깐 공장에 들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딘지 남들 모르는 곳에 처박혀 있다가 저녁 술대접 없으면 그대로 집에 들어간다. 이 때문에 정 선생은 거의 매일 밤 9시경 사장 집에 전화를 걸어 낮에 있었던 일을 대강 보고했다. 혹 그 시간에 사장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부인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하루일과가 끝난다.
정 선생은 사장의 양해를 얻어 공장 이층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사무실 옆 조그만 창고에 자신의 짐과 군용 야전침대를 들여놓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정 선생은 법대 졸업 후 사법고시를 한 차례 더 치르고 나서 사람이 망가졌다. 그는 중고등학교 때 충남 온양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 때문에 원하는 대학보다는 등급이 좀 낮은 대학에 학비와 생활비 전부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입학했다. 재학 중 한번 사법고시를 치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서 늘 자신만만했다. 대학 졸업하고 군 문제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때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 선생, 즉 송정민은 간질을 앓고 있었다. 온양에 있을 때도 아주 가끔 발작했지만 주로 집에 있을 때여서 집안사람 말고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학 때도 아주 드물게 증상이 나타나 주변에서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대학원 들어가서 만만하게 생각했던 두 번째 사법고시에 실패하고 나서부터였다.
정 선생이 고향에 있을 때 수재라는 것이 소문나자 온양 근처 신창의 한 농지부호 권진성이 탐을 냈다. 권진성은 조상 대대로 부자였는데 육이오 때 일가친척 모두 인민군에게 끌려가고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권 부자만 살아남았다. 권 부자는 몸은 불구였으나 나름대로 공부도 하여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사회에 진출하지는 못했다. 딸 둘에 아들 둘을 두었으나 아들 하나 딸 하나는 육이오 때 죽었다. 터키군과 인민군이 신창 근처에서 전투를 벌일 때 썰매 타겠다고 나간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다 전투 장면을 보고 급히 피신한 어느 초가집에서 인민군의 공격을 맞아 그 자리에서 희생당하고 말았다. 당시 일곱 아이가 그곳에 숨어 있었는데, 인민군은 그 아이들이 터키군에 협조했다고 집 안에 가둬놓고 밖에서 총을 쏘고 불 질렀던 것이다. 그때 권 부자의 맏아들과 맏딸이 불에 타죽었고, 둘째 아들은 다리에 총을 맞아 그로 인해 불구가 되었다. 막내딸만은 마침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었던 덕에 온전했다. 불구가 된 둘째 아들은 그 이후에 두고두고 집안의 근심거리가 된 골칫덩이였으며, 막내딸 연선만은 별 탈 없이 얌전히 자랐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그 당시 추운 겨울 밤 따따따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나서 아침에 나가 보면 얼어붙은 도랑에 터키 군인들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터키군은 육이오가 나던 해 10월 중순에 부산에 도착하고 나서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초반기에는 한국 추위와 지형에 익숙지 못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알려져 있다.
권 부자는 송정민에 대한 소문을 진작부터 듣고 있었기에 사람을 시켜 주시하게 했다. 송정민이 서울에 올라간다 하자 권 부자는 마음을 굳혔다. 자기 딸을 송정민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
송정민이 서울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 권 부자가 다리를 놓아 정민의 부모를 만났다. 정민은 이 사실을 몰랐다. 권 부자는 정민이 공부하는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늘 주변을 살피게 했다. 공부에만 매달려 있는 정민이 첫 번 사법고시에 실패하자 권 부자는 조바심이 났다. 혹 정민이 낙담해서 다른 길로 갈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권 부자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직접 올라가 정민과 만났다. 이때서야 정민은 두 부모가 진작에 만나 정민 없이 혼인 약조를 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러나 정민은 특별한 거부감도 기대감도 없었다. 모든 게 자신만만했지만 아직 미래가 열린 것은 아니다. 돈이 오간 것도 아니고 서류가 오간 것도 아니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조한 것도 아니다. 정민은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는 거부하는 느낌이 들게 하지 않았다. 일종의 보험이었으므로.
정민이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권연선, 즉 권 부자 막내딸이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소문으로는 대학 측에 많은 기부금을 전했다고 한다. 연선은 학업이나 외모가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성품은 퍽 얌전했다. 아니, 속이 없을 정도로 맹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연선은 어찌어찌하여 정민과 자신에 대한 부모들의 약조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정민은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처음 연선이 자신의 하숙집에 찾아왔던 날을 정민은 두고두고 후회한다. 어쩌자고 시퍼런 처녀총각이 객지에서 방문 닫고 한 자리에 앉았느냔 말이다. 처음에는 내외하듯 하나는 방문 곁에, 또 하나는 작은 다락문 옆 이부자리 집어넣은 미닫이문 앞에 앉아 서로들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연선이 사와서 잘게 썰어놓은 수박 쟁반이 있었고, 연선 앞에는 끝에 다 닳아 해어진 부채 하나가 부끄럼 타듯 옆으로 누워 있었다. 때는 해가 길어서 저녁 8시인데도 창호지 문으로 서쪽 해가 직접 비쳐들어 방 안은 전구를 켜지 않아도 어둡지 않았다. 아직 복 중은 아니어서 방문을 닫아놓아도 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 안 공기는 묵직했다. 대신 반쯤 열린 벽 위쪽의 덧창에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연선은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서 시골에 내려갈 참에 잠시 들렀노라고 말을 했다. 정민에 대한 이야기와 이곳 하숙집 주소는 신창 집 마름 겸 권 부자 심부름꾼인 김 영감에게 부탁에 부탁을 해서 듣고 얻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연선이 이날 찾아온 것에는 다른 뜻은 없고 이번에 시골에 내려가면, 학업이 몸에 좀 부치는 듯해서 부친에게 한두 학기 대학을 쉬겠노라고 졸라댈 생각에 또다시 일부러 서울 올라오기가 좀 뭣해서 귀향하기 전에 인사나 하러 왔다는 말을 근 10분에 걸쳐 모기만 한 소리로 끊어질듯 이어질듯 풀어놓았다.
그런데 왜 빨리 일어나질 않는 거냐고. 정민은 사법고시를 앞두고 있어서 일분일초가 아쉬웠다. 벌건 대낮은 아니지만 남은 햇빛이 아직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으니 백주대낮과 무엇이 다르랴. 하숙집 주인 할머니에게서는 돌아앉아 있는 방이지만 혹여나 이쪽 창고에 소쿠리라도 찾으러 왔다가 댓돌에 요상한 하이힐이 놓여 있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어쩌랴 싶어 정민은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다행한 것은 이곳에 하숙한 이후 저녁 지나서는 단 한 번도 할머니가 이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행여 고시 학생이 공부하는 데 방해라도 될까 조심한 배려이리라.
이제 창호지 문으로 비쳐드는 붉은 빛도 아스라이 사라지려 할 때, 정민은 전등을 켜야 할지 말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사달이 나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 겁탈이었다. 여인네에 의한.
어색한 침묵이 길게 이어지자 이제는 일어서야겠다고 단정이라도 한 듯 연선은 옆으로 돌려놓은 다리 한쪽을 살며시 푸는 듯이 하면서 “시간이 너무 지나서…….” 하고 모기만 한 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조신한 자세로 단정히 일어서려는 듯하다가 그만 몸 중심이 안 맞았는지 약간 비틀거린다. 그런데 어쩌자고 정민 쪽으로 기울어지냔 말이다. 정민은 바로 앞도 아니고 비스듬히 옆쪽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막 마주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순간이었는데.
정민은 어정쩡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팔을 내밀어 연선의 몸을 받았다. 왼손으로는 연선의 팔을 붙잡고, 그러나 경황 중에 오른손이 그만 연선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가고 말았다. 갑자기 축축하고 물컹한 느낌이 와서 움찔하며 손을 뺀다는 것이 연선의 가슴을 툭 치고 그 바람에 화들짝 손을 아래로 내린 것이 허리에서 미끄러져 하필 엉덩이 뒤쪽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연선의 몸 왼쪽 반이 앞으로 쏠려나오는 탓에 그리된 것도 있지만, 정민의 몸도 중심이 안 맞아 앞으로 약간 넘어가고 있었던 원인도 있었다. 아무려면 누구를 탓하랴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옆으로 쓰러졌는데, 그러한 마지막 순간까지 정민은 연선이 충격을 덜 받게 해주려는 의사에서 손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이는 티끌도 허물도 없는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던 것이다.
“공부가 너무 힘들었나 봐요. 시험은 어렵고. 그래서…….”
연선은 비스듬히 쓰러진 자세에서 묘한 동작으로 손등을 이마에 갖다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아, 이 말은 이 상황을 완성시켜 주는 언어였다.
공부는……. 힘들었……. 시험은……. 어렵…….
정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정민이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던 숨겨둔 말을 연선이 대신 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이는 두 사람을 아주 강하게 이어주는 공통분모가 되었다. 맹하게도 보이는 연선의 지적 갈망과 사법고시에 목매고 있는 정민의 처절한 미래적 욕망이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하숙집 대나무 돗자리 위에서 합집합을 이룬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 이 상황을 의도했느냐는 중요치 않다. 청춘남녀의 한여름 밤 꿈이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는 사실 그 이상의 의미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로 인해 두 사람 앞에 험하고 비련적인 미래가 펼쳐질 줄을 어느 누가 알았으랴.
다음날 아침, 아니 연중 가장 짧은 밤이 지난 신새벽 연선은 살며시 일어나 주섬주섬 단장을 하고 미끄러지듯 방문을 빠져나갔다.
이틀 뒤, 시골에 내려간다던 연선이 또 정민을 찾아왔다.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하숙집 여주인 방에서는 이해연의 노래가 아주 나지막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시 공부하는 학생 탓에 북에 끌려갔다는 영감 추모곡과 같은 구슬픈 음정을 한낮이라도 시원스레 듣지 못하는 주인 할머니의 마음이 낮게 흐르는 그 노래에 애련하게 실려오는 듯했다. 연선은 신창에 내려가기 전에 아무래도 몇몇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귀향을 며칠 미뤘노라고 했다.
그 사흘 뒤에 연선은 또 찾아왔다.
아유, 일들이 연신 생기네요.
다음번에는 뜸을 들여 열흘 뒤에 연선은 지게꾼까지 동반하여 또 찾아왔다. 가죽으로 된 대자, 중자 트렁크 각 하나, 노끈으로 묶은 종이상자(그 안에는 책이 들어 있노라고 했다), 그리고 의사 왕진용 같은 고급 가죽가방이 하나 더 실려 있었고, 연선 자신은 한 손에는 앙증맞은 상앗빛 핸드백, 다른 손에는 해바라기 꽃이 한 다발 들려 있었다.
“요 앞 신작로 꽃집에 너무 환하게 피어 있어서요…….”
연선은 하숙집 기일이 다 차서 나와야 했는데, 아직 귀향을 좀 미룰 일이 있어서 동무네 방에 가서 묵으려 한 차에 마침 형편이 꼬이려는지 동무의 시골에서 급히 전보가 와서 어머니가 며칠 다니러 오신다고 기별했다지 뭐예요 하고 길게 변명을 한다. “아 글쎄 고 깍정이가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고…….” 하며 동무가 야속하고 속상하다고 늘어놓는 것이다. 사실 그 깍정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아유, 이 허술한 짐들은 그냥 며칠만 툇마루 한 켠에라두 버려두면 되시겠어요. 미안해서 어쩌죠.”
그러나 툇마루가 너무 좁아 그 짐들을 다 쌓았다간 방문도 못 연다는 사실은 연선이 원래 맹한 탓에 모르고 있었으리라.
정말 며칠 뒤에 이번에도 지게꾼을 대동하고 연선이 다시 찾아왔다. 예쁘장한 앉은뱅이 화장대가 실려 있었다.
청춘을 이길 자 그 누구인가.
짙푸른 여름날 짧은 밤들은 촌각같이 지나갔다.
연선은 결국 자기 말대로 신창으로 내려가긴 했다. 그리고 8월말에 다시 올라와 공부가 벅차다는 이유로 휴학을 단행했다. 하지만 집에다는 휴학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학교에 낼 등록금과 미리 받아온 책값 등등을 합치고 그동안 꼼꼼히 모아두었던 돈을 더해서 방 두 칸짜리 넓은 집을 전세로 얻어 이사했다. 물론 정민과 함께. 매달 시골에서 우체국을 통해 부쳐오는 돈은 두 사람의 생활비로는 많이 모자랐다. 연선은 씀씀이가 컸기 때문이다. 정민은 여러 생각 끝에 주인집 아들에게 영어 한 과목만 가르치기로 했다.
그 다음해 봄 정민은 사법고시에서 낙방했다. 아주아주 아슬아슬한 점수 차로. 정민은 거의 미칠 정도였다. 자책과 타책이 어둠의 늪을 만들어 지옥의 날들을 보냈다. 밤은 괴로움 그 자체였고, 낮은 낮대로 한숨과 원망의 탑이었다. 연선이 오지만 않았어도……. 아니, 자신이 김유신 말 목 베듯 단호하기만 했더라도……. 영어과외만 안 했어도…….
연선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정민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자신이 온갖 일들 감당했다고 여긴 것이다. 보약에 보양식은 물론 낮에는 정민이 공부에만 집중하게 하려고 해바라기 꽃 사왔던 화원에 여러 날 부탁해서 모종 가꾸고 가지치기 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시골에서 마름인 김 영감을 자주 쫓아다닌 덕에 그런 일은 눈에 설지 않았던 것이다. 점심때면 집에 가서 설거지까지 마쳐놓고 다시 화원으로 갔다. 저녁이면 시장에 들러 싱싱한 것들로만 바구니를 채웠다. 그러한 연선의 손에는 늘 꽃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민이 공부하는 방을 어떻게 해서든지 밝고 명랑하게 꾸며주고 싶었다. 지난번 하숙집의 어둠침침하고 쾨쾨하던 그 분위기에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둘은 싸우기 시작했다. 극심하게. 악에 바쳐서.
이때쯤 연선의 배는 꽤 불러오른 상태였다.
정민이 요란한 초인종 소리와 대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은 통금 사이렌이 불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연선이 집을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악몽 속에서 육이오 때처럼 폭탄이 여기저기 터지는 소리가 뒤엉켜 머릿속을 울렸다. 정민이 잠에서 깨긴 했으나 아직 반은 꿈속이었다. 마당에선 개가 요란하게 짖고 주인아저씨가 우탕탕거리며 현관문을 여닫고 나가는 소리도 꿈속이지만 분명하게 들려왔다.
조금 있으면 자신의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겠지……. 정민은 꿈 반 현실 반 상태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탕탕탕!
“송 선생, 송 선생. 일어나 봐요. 여기, 여기…….”
정민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 속옷 바람인 것도 의식치 못하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주인아저씨는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저, 저, 현관에 나가 봐요. 파출소에서 순경이 왔는데…….”
연선이 발견된 것은 여관에서였다. 여자가 밤늦게 방을 달라고 하면서 들어왔는데 다음날 점심 때가 되도록 기척이 없어서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문을 두드려 봤다는 것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뒤쪽 들창문을 강제로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는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머리맡엔 약봉지와 종이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여관주인은 직감을 하고 파출소에 연락을 한 뒤 창문을 깼다.
수면제 과다복용. 병원에서 위세척을 하고 응급처치를 한 덕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으나 의식은 회복하지 못했다. 순경이 소지품을 뒤져 연락처를 찾았으나 주소나 전화번호는 없었다. 단지 학생증이 발견되어 학교에 연락을 했다.
학교에서는 연선이 휴학상태라 서울의 연락처는 알 수 없어서 신창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권 부자 댁은 발칵 뒤집혔다. 연선의 어머니가 쓰러졌다. 권 부자는 김 영감을 먼저 서울의 병원으로 올라가라 하고 자신은 아내가 안정되는 대로 쫓아가겠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연선의 친구들에게 수소문해서 연선의 서울 거주지에 대해 수소문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한 친구를 통해 주소를 알아내어 파출소 순경이 정민의 집에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정민이 병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였다. 정민이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로 병실에 들어가자 마침 당직의사가 와 있었다. 연선은 아직 혼수상태였는데 의사는 시간이 좀 지나봐야 예후를 알 수 있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골에서 사람이 올라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하고 있는데 마침 병실 문이 열리면서 예전에 보았던 마름인 김 영감이 들어왔다. 정민이 김 영감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문이 또 열리고 목발을 잡은 청년이 퍼덕퍼덕 튀듯이 들어와 정민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 죽여버릴 거야!”
주먹이 날아오려는 순간 김 영감이 뒤에서 청년의 팔과 허리를 붙잡았다. 김 영감의 기운이 더 셌는지 청년은 문 밖으로 끌려나가고 말았다. 아마 김 영감이 없었다면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아까 그 순경이 병실로 들어와서 의사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정민에게 의자에 앉게 하고 자신도 마주 앉았다. 순경은 조서라도 작성하려는지 연선과 정민의 관계, 최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을 세세히 묻고는 간단하게 메모를 했다. 그 사이 의사는 밖으로 나가고 대신 간호원이 들어와 환자의 상태를 이것저것 살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정민은 병실을 지켰다.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민에게는 혼란과 혼돈, 그 두 단어밖에 없었다. 망연히 앉아 있는 것. 인생의 종착역에 와 닿은 느낌. 허망과 후회, 절망. 그뿐이었다.
밤사이에 당직의사와 간호원을 통해 태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태아에게 아직 아무런 이상은 없는 것 같지만, 연선이 먹은 수면제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정민이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하자 아침이 되면 산부인과 의사가 와서 상세히 알려줄 것이라 했다.
아침, 악몽 중에도 날은 밝았다. 김 영감이 병실로 찾아왔다. 정민은 그때서야 비로소 연선의 어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또 다른 악몽이었다. 정민은 낭떠러지 아래로 깊이 깊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정민의 사고는 마비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민의 절망적인 상태와는 아랑곳없이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산부인과 의사가 들어와서 정민과 눈인사만 나누고 연선의 상태를 진찰하다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환자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랫배에서 통증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통증이라니……?
의사가 간호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자 간호원이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런 뒤에 의사는 정민을 마주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출산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상태로 보아 임신 30주 정도 되는데, 잘못하면 문제가 커지겠습니다.”
정민은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본능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정민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쫘악 솟게 했다.
그런데 이때 연선의 의식이 갑자기 돌아왔다. 통증 때문이었다. 출산의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선이 분만실로 들어간 지 30분 만에 의사가 나왔다. 정상보다 10주 빨리 조숙아가 태어났으며, 산모와 아기 모두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특히 산모는 다시 혼수상태가 되었는데, 깨어난다 해도 뇌에 이상이 생기거나 하반신 불수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신생아 또한 거의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뒤 소아과 의사가 와서 아기의 생명에는 이상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단지 일부 장기에 손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예를 들어 눈이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산모 역시 의식이 돌아왔지만 정상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두 달 뒤 연선과 아기 모두 퇴원했다. 병원 근처에 방을 얻어 연선과 아기 모두 그리로 옮겼다. 급한 경우 병원으로 빨리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연선은 의식은 완전히 돌아왔으나 말이 무척 어눌했으며, 몸의 왼쪽을 움직일 수 없는 반신불수 상태였다. 아기는 정상보다 발육상태가 몹시 안 좋았고, 특히 양쪽 눈 모두 백태가 두껍게 끼어 있어서 시력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연선과 아기를 옮긴 집에는 신창에서 사람을 보내어 병간구와 잡일을 하게 맡겼고, 김 영감이 자주 신창과 서울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정민은 그곳에 갈 수 없었다. 권 부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나 연선의 오빠가 아예 상경하여 함께 거주하며 정민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정민은 연선의 집 근처를 자주 배회하며 김 영감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영감이 급한 걸음으로 연선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저……, 영감님, 저 좀 보시죠.”
김 영감은 무심한 얼굴로 뒤돌아본다.
“…….”
“죄송합니다만, 제 사정을 잘 아실 테니 잠시 소식 좀 알려주시지요. 애 엄마는 어떻습니까? 아기는요?”
김 영감은 멈춰서서 무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표정만으로는 언제나처럼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정민이 다가가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죽을 지경입니다. 그냥 연선이 상태만이라도…….”
정민은 갑자기 눈물이 돌았다. 김 영감은 천천히 담배를 꺼내어 물고 정민에게도 한 개비 건네준다. 정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정민은 담배도 피울 수 없을 정도였다. 입속이 다 헐고 혓바닥은 갈가리 갈라져서 무엇이 닿건 칼에 베인 듯 쓰라렸다.
김 영감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충혈된 정민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오늘 저녁에 오시지요. 연준 도련님은 오후에 신창 댁으로 내려갈 게요.”
김 영감은 곧바로 돌아서서 아무 일 없었던 듯 걸어갔다.
정민이 김 영감 말대로 그 집에 찾아가 보니 연선은 별 차도 없이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말은 계속 어눌했으나 정신은 온전해 보였다.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돌보는 아주머니가 목욕시켜 주고 대소변도 받아냈다. 그러나 아기는 계속 병원을 들락거렸다. 눈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들도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입원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정민이 찾아갔을 때 연선은 고개를 외면하고 쳐다보지 않았다. 정민이 손을 내밀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몸을 세차게 흔들어 거부했다. 연선의 몸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그로부터 보름 뒤 김 영감이 정민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정민은 혼이 나간 채 달려갔다. 아기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했다. 하루이틀 사이에 큰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무심하게 말을 한다.
정민은 병원에 그대로 머물렀다. 얼마 뒤 연선의 오빠가 나타났다. 정민을 한번 흘끗 본 뒤 별 반응 없이 의사를 찾아서 나갔다.
그날 밤 신창에서 권 부자가 올라왔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이 움푹 들어간 모습으로 말없이 병원으로 들어왔다. 정민은 땅속으로 꺼져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권 부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기는 다음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급성 하기도감염이었다. 그 몇 분 뒤 연선의 집에서 병원으로 전화가 왔다. 연선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연선의 오빠 연준이 병원 사무실로 달려가 앰뷸런스를 요청해서 함께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연선이 병원에 실려왔을 때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몸을 비틀더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시간을 따져보니 아기가 숨질 때와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으나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이틀 뒤 정민은 전셋집에서 다시 이사한 허름한 하숙방으로 돌아왔다. 아기의 간단한 장례를 끝내기까지 정민은 허공을 떠돈 것만 같았다. 온양에서 정민의 부모님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연선의 식구와는 수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병원에서 주선해 준 간단한 장례절차 동안 그저 말없이 서로들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장례 후 양가가 따로따로 연선의 병실에 잠시 들렀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연선은 그때까지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민은 다시는 연선의 병실에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민은 전셋집에서 지금의 하숙집으로 이사 올 때 풀지 않은 채 놔둔 종이상자를 가져왔다. 그 안에서 오랫동안 펼쳐보지 않은 성경책을 꺼내어 아무 곳이나 펼쳤다. 한 구절에 눈이 가서 멈추었다.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욥기 24장 20절. 하……. 정민은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대로 방바닥에 누웠다. 천장은 저만치 위에 있었는데도 끊임없이 정민 위로 반복해서 쏟아지듯 무너져 내렸다. 정민은 가위눌리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방바닥도 한없이 깊은 구덩이로 꺼져들어가는 듯했다. 온 사방에서 구더기가 기오나오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구더기. 구더기가 나를 먹으러 온다.
그날 정민은 하숙방에서 한밤중이 되도록 구더기에 먹히는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사방이, 입속이, 눈 속이, 콧속이, 귓속이, 내장 전체가 구더기 천지였다. 구더기는 뇌 속까지 파고들어 갈근갈근 갉아먹고 있었다. 구더기가 더 먹을 것이 없어 영혼까지 파먹기 위해 정민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을 때 정민은 눈물을 흘렸다. 구더기를 위해서. 구더기에게 제공할 먹거리가 거기에는 없었던 것이다. 허기를 다 채우지 못한 구더기는 의식 속에서 하나하나 죽어가기 시작했다. 불쌍한 구더기. 곧이어 구더기 썩어가는 냄새가 의식 속을 채웠다. 냄새가 의식 밖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 곳을 잃은 냄새는 혼돈 속을 떠돌고 있었다. 맴돌고 있었다.
의식……. 내 의식…….
정민은 기를 쓰고 몸을 돌려서 엉금엉금 기었다. 팔을 뻗어, 구더기에게 먹혀서 사라졌을 손끝으로 가까스로 방문을 밀어 열었다. 정민은 구더기처럼 문지방을 넘어 마당으로 굴러떨어져서 토했다. 그때서야 방 안에 피워두었던 연탄 냄새가 정민을 따라나와 콧속을 자극했다. 주인집 할머니가 방에서 뛰쳐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새벽 5시경 정민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와 잉크를 꺼내어 편지를 썼다. 죽은 아이에게. 이 세상에 왔으나 피어보지 못하고 지고 만 가여운 그 아이, 자신의 생명의 연장이었어야 할 또 다른 자신의 생명에게.
정 선생은 군용양말 공장의 하루 일을 끝내고 이층의 군용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기가 죽고 나서 허름한 하숙집에 돌아와 힘없이 누웠던 그때 그날처럼.
정 선생은 이리저리 어지러운 생각에 시달리다 벌떡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서 사무실로 나가 책상 제일 아래 서랍을 열고 꼭꼭 싸매둔 서류다발을 뒤져 편지 하나를 꺼냈다. 아기가 죽고 나서 이 땅에서는 보낼 곳 없어 하늘에다 부쳤던 그 편지. 영원 속으로 보낸 편지.
정 선생은 편지를 꺼내어 봉투에 적힌 글자를 한자 한자 짚어가며 읽었다.
나의 천사 인희에게
3
벌써 5년이 흘렀다. 딸 인희가 죽고 나서 정 선생, 즉 송정민의 간질은 갑자기 극심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해서 위험한 순간도 수없이 많았다. 그 탓에 군대도 면제되었다.
정민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공부는 물론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다. 고향 온양에서는 부모자식의 연을 끊겠다고 했고, 연선의 신창 집과는 아예 연락 자체가 되지 않았다. 연선을 보기 위해 병원에 여러 번 찾아갔으나 번번이 거절되었고, 나중에는 퇴원했다고 하는데 그 거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신창 집으로도 찾아갔었다. 그러나 만날 수 없었다. 김 영감은 미련을 갖지 말라고 했다. 연선은 살았어도 산목숨이 아니고, 죽었다 해도 권씨 가문의 일일 뿐 남이 끼어들 형국이 아니라고 했다.
정민은 신창 집 근처 야산에 올라 몇 번 목을 매려다 결행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연선의 부모에게 사죄한다는 의미로 산에서 그 집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또한 연선과는 부부의 예식은 올리지 못했으나 이승을 떠나서라도 둘이 합일하겠다고 맹세하는 의미로 냉수를 떠놓고 그 앞에서 혼자 혼인례를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정민은 그림자처럼 살았다. 자신의 모든 미래를 지우고 속죄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하숙집을 정리하고 나온 다음 절에도 들어갔다 기도원에도 갔다 하며 떠돌았다. 그러나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혹 어느 날 어느 바람결에라도 연선이 소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그때는 달려가리라. 그곳에서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니를 품에 안으리라. 이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한 가여운 아기 인희의 이름을 함께 불러보고 죽으리라…….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