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아주아주 어렸을 때,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공군비행장 뒤편 시골에서 살던 시절 내게는 누이와 누나가 있었다. 그러나 내 가족은 아니고 동네 누이들이었지. 남자만 4형제 가운데서 커온 내게는 그때의 누이들에 대한 기억이 참으로 아련하다. 누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누나는 대여섯 살 많았던 것 같다. 병약해서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는 나는 늘 나무 밑이나 볏짚 단 옆에 오도카니 앉아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었지. 중2 때에야 질병에서 간신히 벗어났으나 사실 그 당시에는 내가 병자인지도 모르고 자랐다. 늘 먼 산 바라보기, 남들 노는 것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 옆집 누이들 바라보기가 전부였다. 내게 말을 붙이는 누이도, 내가 말을 거는 누나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한 것이다. 그런데도 옆집 누이와 누나는 내 기억 속에 오래 오래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이나 누나라는 말은 어떤 신비한 대상처럼 내 흐리고 아련한 기억과 눈 속에서 늘 떠돈다. 그 단어들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어딘지 슬프기도 하고. . .
지금 생각하면 까막머리, 깡똥머리, 단발머리였을 텐데 지금 내 머릿속에서는 마치 은하수 곁을 흐르는 혜성처럼 귓바퀴 뒤로 흩날리는 긴머리 소녀 같은 모습이다. 얼굴이야 시골 흙바닥의 날선 햇볕에 그을리고 찬바람에 피부 터지고 제대로 못 먹어 검고 해쓱한 모습이었을 텐데도 왜 기억 속에서는 화사하고 앳되고 갸름하고 새하얀 피부, 곱디고운 눈동자, 깜찍하고 동그란 귀에 윤기 나는 머리칼을 지닌 소녀처럼 생각되는 것일까. . . (그리고 그 누이 중 하나의 이름은 '순이'였다. 또 하나의 이름에는 '순'자만 들어갔고.)
그니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 .
關關雎鳩(관관저구) | 물수리 꾸룩꾸룩 울며
在河之洲(재하지주) | 모래톱에 노니는 모습
窈窕淑女(요조숙녀) | 요조 숙녀 그대야말로
君子好逑(군자호구) |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 《시경(詩經)》 국풍, 주남편 (國風, 周南篇)
나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고운 내 누이》라는 단편을 썼다. 그러나 그 어렸을 적 그니들에 대한 내 아련한 마음과는 달리 그 소설은 너무 슬프다. 나는 참 나빴다. 그니들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애틋한데 소설은 왜 그리도 비극적으로 썼는지. 그런 고로 나는 그니들에 대해 늘 죄스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니들이 이 지구 별 어느 땅 어느 곳에선가 맑고 고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혹 그니들은 병약하고 해쓱하고 초췌한 얼굴의 그 시골 아이를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해도.
感愚(감우) | 어느 날 문득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89) |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의 손윗누이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枝葉何芬芬(지엽하분분)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淸香終不斃(정향종조췌)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 창가에 피어난 난초 하늘하늘
| 가지마다 잎마다 향기 어리고
| 하늬바람 한번 스쳐 지나가자
| 가을서리에 시든 모습 서글퍼
| 아리따운 그 모습은 시들어도
| 맑은 향기만은 없어지지 않아
| 그모습 바라보는 마음이 아려
| 눈물 흘러 옷깃을 적시는구나
[感愚(감우)] 한시에서 특별히 제목을 붙이지 않고 느낀 대로 읊을 때 다는 제목으로, 요즘의 ‘무제(無題)’와 비슷하다.
나는 지난 2017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어리 광장(St. Mary’s Square)에서 열린 위안부 기림비 개막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한국, 중국, 필리핀에서 붙잡혀 간 소녀 셋이 서로 뒤로 손을 마주잡고 선 동상. 그 행사 몇 년 전에는 위안부의 처절한 삶을 증언한 이용수 할머니와 만나서 길고 긴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 내 누이들. . . 남태평양, 인도양, 어느 섬, 어느 밀림, 어느 대륙에서 절규하는 그니들. . .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왜 그렇게 아련한 시에 순이를, 내 누이들을 남겨놓았을까?
눈 오는 지도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우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소 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 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은 어린다
사랑의 전당(殿堂)
순(順)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든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殿堂)은
고풍(古風)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殿堂)
순(順)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 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청춘!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
순(順)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엄한 산맥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추억하는 순이들, 내 잃어버린 기억 속의 누이들. . .
인도양 그 음울음습한 대륙에서 갈바람 꽃잎처럼 흩어져 간 내 조국의 아름다운 누이들. . .
가슴이, 마음이, 여기 이 한복판이 아리다. 많이, 너무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