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ba volant, Scripta manent
말은 날아가지만 글은 남는다
이 말은 로마 제국의 카이우스 티투스(Caius Titus) 상원의원이 로마 원로원에 한 연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명구(名句)는 이 글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이 문구는 차라리 브런치 사이트 전체를 대변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내건다면 어울리겠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도입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이 글의 주요 목적과 소재는 사전이다. 그중에서도 국어사전.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림 형제부터 소환한다. 대개의 경우 그림 형제는 동화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림 형제의 형은 야코프 그림(Jacob Grimm, 1785~1863), 동생은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 1786~1859). 연령생인 두 형제는 모두 언어학자였다.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도서관에서 근무하다 괴팅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언어학 분야에서는 형이 보다 큰 업적을 남겼고, 동화 부문에서는 동생이 더 큰 기여를 했다.
그림 형제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동화가 더 연상되겠지만, 실제로는 독일 민족에게 언어학적으로 큰 선물을 남긴 인물이다. 두 형제는 언어학자답게 《독일어대사전(Deutsches Wörterbuch)》을 편찬했는데, 그 분량이 어마어마해서 100권에 달한다. 물론 이 전체를 그림 형제가 완성한 것은 아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어수선하던 독일어를 통일시키기 위해 그림 형제가 1854년에 사전 편찬작업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들이 타계한 이후에 여러 독일 학자들이 편찬작업을 이어서 한 결과, 그림 형제가 세상을 떠난 뒤 거의 100년이 지난 1961년에야 전체 분량이 완성되어 출간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20권, 《일본어대사전》이 20권, 《중국어대사전》이 24권인 것에 비해 그림 형제의 《독일어대사전》이 100권인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분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림 형제는 언어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인도유럽어의 파열음과 고대 게르만어와의 관계를 밝혀내어 이를 ‘그림의 법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해서 비교언어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중요한 업적이었던 것 같다.
그림 형제는 독일어의 형성과 발달, 변천 및 각종 방언 등을 조사하는 동시에 독일(당시의 프로이센 지방)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전설과 민담 등을 수집했다. 그리고 사전 편찬작업을 하면서 힘이 들면 잠시 쉬면서 틈틈이 그동안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들을 모아 전래동화집을 만들어 1812년에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를 발간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그림 동화집’의 첫 번째 책인 것이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그림 형제는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라 불리기도 하며, 유로화가 사용되기 이전 독일 마르크화의 최고액권인 1천 마르크에 들어간 초상 인물이 바로 그림 형제인 것을 보면 독일에서 그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책덮고 창을여니 강호에 배떠있다
往來 白鷗는 무슨뜻 먹었는고
앗구려 공명도말고 너를좇아 놀리라
- 정온(鄭蘊, 1569~1641) | 조선 중기 이괄의 난 때 이조참의로 임금을 공주로 피난시키고,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을 지내면서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가 항복하자 덕유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흙집을 지어 살다가 5년 만에 눈을 감았다.
- 往來 白鷗 | 갈매기 오락가락 나는 모습
- 앗구려 | 감탄사로 ‘아서라’의 뜻
개항기(開港期), 즉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한국이 서구에 문호를 열어 통상하기 시작한 시기에 일부 지식인들이 외국문물의 영향을 받아 국어사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특히 주시경 선생 등이 이 부분을 강조하며 1910년에 일간지인 ‘대한민보(大韓民報)’에 무려 95회나 국어사전의 필요성에 대한 글을 실었다고 한다. 또한 최남선 선생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을 비롯한 여러 지식인이 모여 《말모이》라는 국어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던 중 주시경이 타계하자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현재 그 사전의 제1권만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만들어지고 1936년에 들어서서 조선어학회가 이를 맡아 작업을 하기 시작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모든 작업이 중단되었다.
그 뒤 1938년에 배제고등보통학교 교사이며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인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최초로 간행되었으며, 광복 이듬해에 다시 출간되었다. 하지만 이 사전은 고유명사까지 수록해서 약간은 백과사전과 같은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그 뒤 감리교 목사인 김병제가 광복 후에 수정증보판인 《표준조선말사전》(1947)을 출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북이 나뉘면서 남쪽에서는 문세영, 북에서는 김병제의 사전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7년에 이르러 비로소 《조선말큰사전》의 첫 번째 권이 나온 이후, 육이오 전쟁 뒤인 1957년이 되자 한글학회에서 《큰사전》 전체 6권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전에는 총 164,125개의 표제어가 실렸으며, 표준어 외에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고유명사나 관용구에 대한 것도 수록했다.
그 뒤 《표준국어사전》(1958), 《국어새사전》(1958), 《새사전》(1959), 《국어대사전》(1961), 《새우리말큰사전》(1975) 등이 계속 간행되었으나 이들은 어느 정도 백과사전의 성격이 가미된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 1991년에 국립국어연구원이 발족하면서 그 다음 해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1999년 10월 9일 드디어 《표준국어대사전》 전3권이 간행되었다. 이 사전은 전체 7,308쪽이며 48만 어휘가 수록되어 있다. 그 뒤 2008년에 51만 어휘가 수록된 개정판이 발행되었다. 이 사전은 과거의 사전에 비해 좀더 다양한 언어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표제어에 대한 여러 예문이나 그에 대응하는 북한어를 삽입하기도 했다. 그 이후 이 사전의 개정증보판이 만들어져 2008년부터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2019년 3월에 또다시 정식 개편되었다.
Historia est Magistra Vitae
역사는 인생의 스승
-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 BC 106~43
- 로마 공화정의 원칙을 지키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당시 가장 위대한 로마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국어사전이 나오기도 전인 1874년에 노한사전(露韓事典)이 먼저 발간되었다. 이것은 한글이 들어간 최초의 외국어 사전인 셈이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위쪽에 푸칠로프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러시아의 고려인들이 모여사는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1869년에 조성된 이 마을은 그러나 1937년에 러시아 정부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하게 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함경도에서 건너온 이주민들로 당시 지주나 관리들의 횡포를 못 이겨 1800년경부터 국경을 몰래 넘어서 온 조선인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1만6천 명이 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그 지역의 푸칠로프카라는 러시아인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는데, 고려인이라 불리는 조선인들과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의사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 한글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결국 《노한사전》까지 펴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앞쪽에 러시아어, 그 뒤쪽에 한글을 배열하고 러시아어 발음기호까지 덧붙여 놓은 제대로 된 사전이었다. 이 사전에는 7,300개의 러시아 단어가 실려 있으며, 한글은 함경도 육진지방의 어휘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한국어와 외국어를 대역한 최초의 사전이자, 최초의 한국어 사전인 셈이다.
이밖에 조선의 영정조 시대 전후 무렵에 중국과 교역하는 이들과 역관을 교육하기 위해 한자 옆에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달아놓은 서책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사전은 아니지만 한자와 한글을 대치시켰다는 점에서 초보적인 사전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 지난 2021년 11월 경상남도 의회에서 ‘국립국어사전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하는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는 경남 의령 출신 인사들이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것을 기리는 한편,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선열들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1921년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들이 세운 조선어연구회는 10년 뒤인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 이후 1949년에 또다시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人而人吾 則可喜也
인이인오 즉가희야
不人而不人吾 則亦可喜也
불인이불인오 즉역가희야
| 선인이 나를 선인이라 하면 의당 기뻐할 것이요
| 악인이 나를 악인이라 해도 기꺼이 받을 것이라
- 고려말 문신 이달충(李達衷) | ?~1385
국어사전의 규모를 보면 그 나라의 국력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한때는 어휘의 수로 문화의 척도를 삼기도 했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용어, 은어, 약어, 파생어, 외래어, 외국어, 과학기술문화용어가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기에 단순하게 어휘로만 문화를 평가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가 발달하면 어휘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문화의 발달은 어느 정도 국력의 크기와도 비례되는 것이 아닐까.
도서관에 가서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과사전과 각종 전문용어사전이 서가에 잔뜩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약간 주눅이 들기도 한다. 특히 외국의 저명한 도서관에 가면 (이따만큼 두꺼운데다 고풍스러운 가죽으로 장정한) 각종 사전이 질릴 정도로 (거의 위압될 정도로)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책들을 누가 언제 다 보나. . . 그와 동시에 저러한 사전들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은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이라고 한다. 이는 BC 7세기경 신 아시리아(Assyria) 제국의 아슈르바니팔(Assurbanipal, BC 685(?)~627(?)) 왕이 수도인 니네베(Nineveh)의 왕궁 내부에 왕 소유의 도서를 소장하고 개인적으로 명상도 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점토판으로 된) 길가메시 서사시도 이곳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도서관에는 약 3만 개의 점토판에 1,500종의 문학작품이 기록되어 있고, 그밖에 수많은 역사와 역대 왕들의 전기를 비롯해서 각종 상거래 계약과 법적 증서, 의학, 수학, 생물학, 천문학, 수학, 자연, 점성술, 신화, 전설 등에 대한 자료가 들어 있다.
지금이야 컴퓨터에 입력하면 모든 자료가 나오지만, 그 자료를 찾고 모으고 분석하고 체계화하며 또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실력과 소양과 열의와 소명감을 갖춘 사람(들). 여기에 상당한 시일에 걸쳐 끈질기고 지루한 작업을 거쳐야만 한 나라의 국어사전이 탄생할 수 있다. 즉, 그에 맞는 경제력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앞쪽에서 언급한 '국어사전을 보면 그 나라 국력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물론 국어사전에 들어 있는 어휘를 그 나라 국민이 모두 사용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국어사전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가 얼마나 다양하고 심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이 글 제일 앞에 소개한 라틴어 명구를 다시 한 번 소개한다. 장구한 세월이 지나가면 결국 기록된 것만 남는다는 의미로. (한 민족이나 국가뿐 아니라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인생과 열정을 다 바친 분들께 머리 숙인다.)
Verba volant, Scripta manent
말은 날아가지만 글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