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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01.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5)

제1장 | 가을정원 (5)

택시는 홍은동 유진상가 옆으로 돌아 잠시 들어가서 5층짜리 허름한 건물 앞에서 섰다. 택시요금은 물론 주원이 지불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힘들게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죄송합니다. 원래 가진 게 없어서.”

    상관없으니까 어서 올라가기나 해.

    주원은 한마디 쏘아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5층에 도착했다. 다리가 아프긴 했다.

    가만두라 봐라.

    색 바랜 낡은 철제문. 온갖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녹도 조금 슬어 있고.

    그리고 웬 스티커 종류는 그렇게 많은지. 중국집이나 튀김, 설렁탕, 칼국수 같은 음식점은 물론이고 열쇠, 일수, 신용회복, 임대문의, 미장원 등등…….

    일부러 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좀 신기한 느낌이 들어서 주원은 주욱 한번 훑어본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좀 야릇한 것도 있었다. 룸살롱, 마사지, 결혼정보, 외로워요…….

    여러 가지네.

    편가는 스티커에는 눈길도 안 주고 철제문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린다.  



주원이 뒤따라 들어가 보니 예상한 대로 혼잡스러웠다. 그러나 전등을 켜지 않아도 안은 환할 것 같았다.

    문 반대편은 넓은 유리창인데 그 밖으로 아파트 단지와 삼각산이 보였다. 사무실은 북향이었다.

    겨울엔 춥겠네.

    웬 남 걱정……. 주원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주원은 벽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원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주원이 궁금한 표정으로 편가를 쳐다보았다.

    편가가 한쪽 벽면에 기대어 세워둔 커다란 스티로폼 패널 뒤쪽으로 가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온다.

    그것을 주욱 폈다.

    아, 거의 실물 크기의 주원 사진.

    주원은 숨이 탁 막혔다.

    핸드폰으로 볼 때보다 사진이 더 멋진 것이었다.

    솜씨 좋네.

    “이렇게 몰래 찍으면 문제 되는 거 아녜요?”

    “문제 되죠.”

    주원은 편가를 돌아다보았다.

    그래서……?

    “그냥 다 드리겠습니다. 원본 파일까지.”

    주원은 편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셈이 뭐지?

    “다른 뜻 없습니다. 저는 그냥 여기저기에 가서 사진 찍습니다. 대부분은 의미 없어서 나중에 대충 살펴보고 다 없애버리죠. 그런데 주원 씨가 저에게 전화한 바람에 저 사진에 의미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물하려고 인화한 겁니다. 저거 말고 몇 컷 더 있습니다. 그것도 다 드릴게요.”

    “명함엔 바디아트로 되어 있던데……?”

    편가는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장황하게 설명해 나간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벤트 사업가란다. 명함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필요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바디아트에서부터 결혼과 환갑, 칠순, 돌과 같은 가족행사, 운동회나 각종 체육행사 및 송년회와 같은 실내외 행사, 여기에 데코레이션을 포함한 각종 행사나 이벤트의 장식, 퍼레이드나 밴드. 그리고 치어리더를 포함한 응원단 조직, 미술관이나 음악회 장소 섭외, 마술쇼 등등.

    “마술도 해요? 직접?”

    “프로급입니다.”

    “사진도 찍고요?”

    “당연하죠. 각종 행사를 하다 보면 사진은 필수인걸요.”

    “팔방미인이시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을 여기서 다 해요?”

    “여기는 주로 사진이나 포스터 작업, 그리고 바디아트를 하는 곳입니다.”

    “바디아트……. 참 저번에 제 행사 날 무척 추웠을 텐데…….”

    주원은 연주회 날 장면이 갑자기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지금 남 걱정해 줄 여유가 있는 거니, 주원아? 정신 차려!

    주원은 보이지 않게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 표범 외투를 가지고 다니면서 살짝살짝 입죠. 안 그러면 우리 다 얼어죽어요. 한겨울에도 행사를 하거든요.”

    “그럼 외투가 많아야겠네요. 각종 동물이랑…….”

    그래도 주원은 또 맞장구를 친다.

    한심해…….

    “그것 말고도 돈 들어가는 게 장난 아닙니다. 페인트 값도 엄청나고, 또 혼자서 칠하는 게 아니라서 전문가 불러야 돼요.”

    “전문가……?”

    하긴 요즘은 무엇이든지 세분화되어 있고 그 분야마다 남달리 열정을 쏟는 사람들이 많다.

    “바디페인팅 아티스트가 따로 있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돈 더 잘 법니다. 저도 직업 바꿔 그거나 해볼까 늘 생각 중이라니까요.”

    편가가 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지워요?”

    “꽤 궁금하신 모양이네. 한번 해보고 싶으세요? 우리 행사 때 같이 해보시면…….”

    “됐네요. 그런데 저번 제 연주회 때 여러 분이 오셨잖아요? 같이 일하시는 거예요?”

    “우리 팀이 있습니다. 많이 동원하면 수십 명도 돼요. 행사 규모에 따라 인원 조절하는 거죠.”

    “힘드시겠네.”

    그만 좀 나대, 주원아!

    아차.

    “힘들기만 합니다. 돈도 안 되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편가. 연기해도 되겠네.

    “그럼 왜 하세요?”

    주원이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벤트 사업 하려면 고객이 원하는 건 다 해줘야 돼요. 요즘 아이들 행사에 가려면 바디페인팅은 기본이자 필수입니다.”

    “페인트 많이 들 텐데…….”

    “다 돈이죠. 칠할 때도 돈, 지울 때도 돈, 아티스트에게도 돈……. 아, 지우는 거 물어봤죠? 손이나 팔 같은 데 하는 것은 간단하게 물이나 비누로 씻어도 되지만, 얼굴이나 몸에 할 때는 전용 클렌징폼 같은 것으로 지워야 해요.”



편가는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나갔다. 처음에 좀 덜렁덜렁해 보인 것과는 아주 달랐다. 게다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 장발이 좀 지저분하게도 보였지만 어딘지 표범을 닮은 것도 같았다. 지난번 연주회 때 모습을 보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요즘 한국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바디페인팅 같은 것도 다 하고…….”

    주원은 어딘지 자신이 끌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허, 모르시는 말씀.”

    뭐야? 말투 봐라…….

    그러면서도 주원은 궁금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여자분들 화장하는 것도 그거 다 바디페인팅이라고요. 페이스 페인팅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게 그거예요.”

    피―.

    “정말입니다. 얼굴 완전히 딴판으로 만들고 다니는 사람 많아요.”

    편가가 주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듯 쳐다본다.

    주원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얼굴을 뒤로 물렸다.

    “흠……, 주원 씨는 본 얼굴 맞는 거죠?”

    “왜 이래요?”

    주원의 목소리 톤이 좀 높아졌다.

    “헤헤……. 지난번 연주회 때하고 좀 다른가 해서요.”

    주원은 편가를 노려보았다.

    “아아, 뭐 그건 그렇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제가 또 이 방면에는 전문가 뺨…….”

    “됐고요. 이젠 가봐야겠어요.”

    주원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허리도 꼿꼿이 세우고.

    “아니, 아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원 씨 사진 잘 챙겨드려야 하니까.”



주원은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사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편가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러면서 저 혼자 말하듯 중얼거린다.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그리고 우리나라 신라시대 화랑들이 진하게 화장했던 것 그거 다 바디페인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깊어요…….”

    아이고, 유식해서 좋겠다. 그 정도는 다 아네요.

    편가는 싱글싱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한마디 덧붙인다.

    “다음에 여기 한 번 더 오시면 제가 바디페인팅 직접 보여드리죠. 이 사무실 말고도 다른 데도 있는데 거기도 보여드리고요.”

    사무실이 그렇게 많아? 돈도 없다면서.

    “그럼, 수송동엔 뭐가 있는 거예요?”

    주원은 문득 명함이 생각나서 이렇게 물었다.

    “아, 거기는 주로 행사주문만 받는 곳인데, 친구 사무실을 빌려쓰고 있습니다. 이름만 걸어놓고.”

    “직원은 있나요?”

    “아니……, 직원은 나 혼자…….”

    그럴 줄 알았다.

    “아, 저 체육관도 있습니다.”

    “……?”

    “태권도 도장을 하거든요.”

    “태권도도 하세요?”



주원은 호기심이 생겼다. 진심.

    “그럼요. 4단입니다.”

    “직접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거기가 제 메인 아지트입니다. 거기에 사범들도 있고 직원도 있죠. 파트타임이긴 하지만.”

    “그럼 여기는……?”

    “아, 여기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요. 나 혼자 여기에 와서 별짓 다 합니다.”

    “명함 좀 다 줘봐요.”

    편가가 주머니 여기저기에서 꺼내어 일일이 확인하고는 명함을 한 묶음 건네준다.

    주원이 명함을 받아보니 10종류가 넘었다.

    세상에…….

    “사람을 많이 알아야겠네요?”

    “방송국에서부터 동네 양아치까지 좌악 깔렸습니다. 정치인도 물론이고.”

    우쭐하긴.

    “제 행사에는 어떻게 오게 됐어요?”

    “제 인맥 장난 아닙니다.”  

    “돈 많이 버시겠네?”

    편가는 한숨을 푹 쉰다.

    “들어오는 거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아요.”

    “그럼 뭐 먹고 살아요?”

    “요술로 사는 거죠. 제 꼬라지 보세요.”

    피―! 엄살은.

    “동업하실래요?”

    편가가 불쑥 말한다.

    “네? 뭐라고요?”

    “아니, 아니, 실례.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재미있겠는데…….

    “좋아요. 해요.”

    주원은 스스로도 놀랐다. 지금 이런 말 할 때가 아닌데…….

    “네……?”

    “돈은 그쪽에서 대요. 나는 노래만 할 테니까.”

    하하하! 호호호!

    동업. 장난으로 한 말이 진짜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신이 실없이 되어가고 있는지 주원도 알 수가 없었다.

    “실은 다음 주에 팔순 잔치가 있는데 해볼래요?”

    “뭐를 해요?”

    “노래하는 거죠. 다른 게 뭐 있겠습니까?”

    “내가 노래를?”

    “잘 하시던데.”

    “…….”

    “조금만 더 꺾으면 돼요.”

    “…….”

    “밤하늘의 잔별 같은……, 뽕짝뽕짝……, 탁탁 꺾어주면 돼요. 콧소리 조금 섞어서. 그때 그 노래 좋았습니다.”

    “그만 하세요!”

    주원은 갑자기 약이 올랐다.

    “아닙니다. 기회가 되면 바이올린으로 그 곡을 꼭 들었으면 좋겠…….”



“5 대 5.”

    주원이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네? 뭐가요?”

    “내 수입.”

    “…….”

    “좋아요. 그게 싫으면 3 대 7.”

    “누가 7?”

    “그쪽이 7 가져가요. 그럼 되죠?”

    “총금액? 수익금에서?”

    “당연히 수익금에서죠.”     



주원은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 어쩐지 오늘 자신이 많이 당한 것 같아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편가의 능청에 말려들어 저도 모르게 맞장구친 것들로 인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어떻게 갚아주지……?

    그러면서도 전철 입구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편가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 참, 매년 8월 말에 대구에서 바디페인팅 페스티벌이 열리니까 확인해 보세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칫, 뭐가 도움이 된다는 거야? 난 관심도 없는데.

    주원은 그러나 몸이 갑자기 피곤해지며 머릿속이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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