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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04.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6)

제1장 | 가을정원(6)

주원은 돌돌 말아서 통에 넣어 가져온 자신의 전신사진을 펴서 벽에 붙여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아주 정교한 사진은 아니지만 현장감이 실려 있는 느낌이 들어 볼수록 괜찮았다. 색도 약간 보정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괜찮았다. 게다가 입자를 약간 거친 느낌으로 처리한 것도.

    다른 솜씨는 아직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바디페인팅과 사진술은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주원이 보기에는.

    아, 바디페인팅은 편가 솜씨가 아니지……. 그럼 바디페인팅 당한 솜씨?

    주원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참 묘한 사람이다. 무례하고 거친 면이 있어서 기분이 몇 번 상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주원이 사는 세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세계. 태권도가 몇 단이라고 했지? 4단? 4단이면 어느 정도야? 아무튼 특이해.

    주원은 동업하자는 말에 자신이 선뜻 동의한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자신의 어디에 그런 엉뚱한 면이 있었던 거지?

    아무튼 재미있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똑 똑 똑.

    저렇게 살며시 노크하는 사람은 아버지 정 회장뿐이다.

    주원은 사진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돌아섰다.

    살짝 문을 여니 아버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원은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문을 활짝 열었다.

    정 회장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서 한눈에 주원의 사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젖혀서 바라본다. 말은 없었다. 두 팔로 팔짱을 낀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주원을 쳐다보았다. 이리 오라는 손짓. 주원을 사진 옆에다 세운다. 둘을 비교하는 듯 이쪽저쪽 번갈아 살펴본다.

    “실물이 더 낫다.”

    정 회장이 싱긋 웃으며 말한다.

    “분위기는 사진이 더 낫고.”

    주원이 핏 하고 웃었다.

    “누가 찍은 거냐?”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했다.

    정 회장은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요즘 바쁜 것 같다. 밖에 많이 나간다고?”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좋은 일 있니? 아빠도 끼자.”

    주원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짜식. 아무튼 바쁜 게 좋다. 여기 있을 때 맘껏 다녀봐. 사람도 많이 만나보고. 만날 사람 없으면 나한테 말해라.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알았어요.“

    “그런데 말이다……, 나보다는 다른 남자 만나는 게 더 좋을 거다. 잘 찾아봐.”     



주원은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다. 한국 핸드폰은 아예 꺼놓았다. 그 대신 미국 핸드폰으로 친구들하고 카톡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남궁 여사는 파티 이후에 한동안은 주원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도 주지 않았으나 차츰 마음이 풀어져 이제는 거의 평상시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단지 아직도 그 노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때의 배신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남궁 여사는 또다시 주원의 혼처를 알아보기 위함인지 그 파티 참석자들의 명부를 들여다보며 점을 찍거나 메모를 하는 것이었다. 남궁 여사는 그전부터 주원에게 연애결혼은 꿈도 꾸지 말라고 윽박질러 왔다.

    “네가 보는 눈보다는 내 눈이 나아.”

    주원이 어릴 때부터 남궁 여사는 자신의 사위는 자신이 정할 것이라고 늘 말해 왔다. 그 사위는 단지 사위가 아니라 우리 집안의 후계자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겉만 보면 안 돼. 배경이나 뭐를 배웠나 하는 거 다 따져봐야 해. 잘못했다간 건달 만나서 평생 고생만 한다.”

    그러나 남궁 여사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주원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남자라는 사람을 아예 몇 만나보지도 못했으니까. 게다가 남궁 여사가 말하는 ‘뭐를 배웠나’가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의사나 판검사나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야? 아니면 아빠 회사 맡아서 할 사람 고른다면 경영학 같은 거……?

    그래서 그런지 남궁 여사는 MBA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MBA, MBA, MBA, 엠비에이…….

    MBA, 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경영학 석사. 100년도 더 전인 1900년엔가 미국의 다트머스 대학에서 처음으로 경영학 석사과정이 생겼다지. 뉴햄프셔 주에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 종합대학이면서 아직도 칼리지(college)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 뒤 여기저기에서 MBA가 생겨났다. 한때는 귀하신 몸이었지만 지금은 길에 널린 게 MBA다. 공과대학인 MIT에서까지 개설되어 있으니까.

    엠비에이, 엠비에이……, 에비에비…….

    주원은 하마터면 메롱을 덧붙일 뻔했다.

    그것은 그렇고…….

    그런데 주원은 자신의 마음이 왜 이리도 허전한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주원은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번 못 해봤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지만, 남궁 여사의 오랜 압력도 사실 꽤 큰 작용을 한 셈이다.

    주원은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에서 연애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쓸쓸했다. 봄날 가는 비 흩날리는 날이나 가을날 낙엽 지는 공원 근처를 걸을 때면 마음이 허전한 것을 넘어 아프기까지 했다. 어떤 아련함으로. 미국 동부해안을 자동차로 달리면서 그 시퍼런 대서양 바닷물을 바라볼 때도 막연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주원에게 남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번 소개를 받아 만나기도 하고 끈질기게 접근한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같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집안 좋은 그들. 미국인도 영국인도 이탈리아인도 중국인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같이 위선자처럼 보였는지 모른다. 사실 한번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어서 잠시 가까이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 부인이 있었다. 그때 실은 배신감보다는 아깝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그 사람이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연애.

    무엇일까?

    유부남인 것을 모르고 만났던 그 남자. 카페에 일찍 가서 그 사람 기다릴 때 그 마음이 연애일까? 파리 공항에서 보스턴으로 갈 때 공항면세점에서 그 사람 줄 선물이 뭐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던 그 시간들이 연애일까? 그때 분명 마음이 벅차고 어떤 흥분감 같은 것이 있었지. 나중에는 어이없게 끝났지만.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 다 있는 거야……? 주변 친구들은 어디에서 구해 오는지 모르지만 잘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그러다가 청첩장 보내오고 하는데.

    주원 자신도 이렇게 답답한데 부모님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특히 MBA를 입에서 놓지 않고 사시는 남궁 여사께서는 주원보다 더 답답하실 거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요즘 주원에게 그전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전에는 하루종일 집 안에만 있어도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가 그렇게 길었다. 거의 10분마다 한숨이 저도 모르게 나오고 문득 시계를 보면 겨우 20분이 지난 것이다. 드라마나 뉴스 등 시답잖은 것들 조금 보고, 음악도 이것저것 들었다 멈추기고 하고, 악보도 좀 정리했다가 먼지 하나 없는 바이올린 꺼내어 티끌 묻은 거 있나 없나 검사해 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거실에 내려가 소파에도 드러눕기도 하고, 집 안 여기저기 서성이면서도 가끔 누구를 기다리는 것마냥 시계를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겨우 30분 지났는데.

    또한 자신에게 전화 올 일도 편지 올 일도 없는데도 문득문득 무엇인가 어떤 소식이라고 왔으면 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카톡이나 메시지, 이메일 그런 것 말고. 진짜 소식 말이다. 누군가가 손으로 쓴 편지 같은 것. 낙엽에 실려온 글이나 시…….

    이렇게 답답하게 살아도 되는 거야……? 집에만 처박혀 있으면서…….

    어디 나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일부러 나가서 만단다면 모를까…….

    누구를……?

    지난 며칠 동안 그 정신 사나운 남자 때문에 좀 부산했었던 것 외엔 통…….

    아, 그 남자.

    3 대 7.

    풋. 웃겼어.

    요란도 했었지, 그 남자.

    덕분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렇다고 인생사는 데 도움 될 것도 아니지만.

    카톡을 한꺼번에 10통씩 보낼 정도로 무모하고 어찌 보면 무례한 사람이긴 하지만 열심히는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도 사는구나…….

    카톡 또 왔을까?

    왔겠지.

    열어봐?

    아서라.

    글쎄…….

    열어본들 무슨 일을 하랴.

    동업할 것도 아니고.

    아냐, 그거 해봐?

    재미있을까?

    엄마가 알면 기절?

    ㅎㅎㅎ…….

    재밌겠는데.

    그때 갑자기 편가가 알려준 것이 생각났다.

    바디페인팅 페스티벌.

    대한민국에서 그런 것도 하나……?

    주원은 인터넷으로 대구 바디페인팅페스티벌을 쳐보았다.

    우와―!

    여러 기사와 사진들이 좌악 올라와 있었다.

    2008년부터 시작되었단다. 그리고 행사 사진 올라온 것을 보니 행사 규모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참가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왔고, 바디페인팅은 물론 여러 복장 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화려하고 다양했다. 게다가 관람객은 어린아이들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바디페인팅이 일부 계층이나 호기심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공적인 예술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어떻게 보면 초현실주의와도 이어지는 첨단예술에 속하는 바디페인팅 행사를 한국에서, 그것도 예로부터 보수와 전통을 중시하던 대구에서 개최했다는 것은 이미 바디페인팅이 일반예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 같았다. 하긴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데서도 많은 이들이 얼굴에 국기 문양을 넣거나 아예 얼굴 전체를 국기로 칠한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었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때 아빠가 주원의 얼굴에 태극기 색인 빨강과 파랑을 그려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그 간단한 것만으로도 주원은 마음이 들떴었지.



그래, 그런 것들이 바로 바디페인팅이다. 그것을 확대하면 대구 페스티벌과 같이 되는 것이겠지. 요즘 어린이들 각종 행사에 바디페인팅이 필수라고 한 편가의 말이 실감났다. 하긴 주원 자신의 행사에서도 등장했으니까.

    혹시 일본 야쿠자들이 온몸에 이상한 무늬를 잔뜩 그려넣은 것도 바디페인팅에 속하나?

    아, 그것은 문신이겠구나.

    하긴, 미국 영화를 보면 팔이나 어깨에 문신을 넣은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그럼 그런 것들도 바디페인팅의 한 분야?

    에이, 그것은 그냥 문신이라고 할 거야. 종류가 좀 다르겠지…….

    주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편가 그 인간은 시대의 첨단을 걷는 것 같았다. 돈 버는 재주는 좀 없는 것 같지만.

    반면에 주원은 클래식, 글자 그대로 옛 시절의 악보에만 매달려 있다.

    그래서 내가 고리타분하고 연애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는 건가……?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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