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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06.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7)

제1장 | 가을정원 (7)

또 며칠이 지났다.

    아, 무료했다. 그냥 미국에 빨리 가버릴까? 몇몇 교수들하고 약속해 놓은 것, 박사후과정, 핀란드 유학, 여러 콘테스트, 연주회 투어, 인터뷰, 게다가 자기에게 배우는 학생들 등등 꽤 복잡하다. 사실 한국에 와서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매일 연습을 강행군해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한량생활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태껏 살아온 중에 지금처럼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 늘 쫓기며 살아오고 남궁 여사에게 시달려서 숨도 못 쉬며 지냈으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번에는 잔소리가 별로 없다. 혹 이번에는 주원이 미국으로 가서 남아 있는 계획들 마무리하는 것보다 한국에 남아서 적어도 혼처라도 정해 놓고 가길 바라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고요할 리가 없지.

    혹 나 몰래 무슨 꿍꿍이가……?

    문이 벌컥 열린다. 누가 올라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남궁 여사.

    그러면 그렇지.

    “얘, 나와 봐.”

    주원은 깊숙한 안락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주원의 방은 엄청 컸다. 아래층 거실보다 훨씬 넓었으니까. 원래는 이층에 방이 세 개 있었으나 그것을 모두 터서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3층으로 통하는 복도를 빼고 나머지 공간을 두꺼운 통유리로 막고서 한쪽에 문을 달았다. 방음이 되는 두꺼운 유리문으로. 그러나 주원이 고집해서 이층 유리 아래쪽 3분의 2가 불투명으로 된 것으로 바꾸었다. 여러 오페라 장면이 에칭으로 새겨진 것으로. 한국에 자주 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꾸며놓고 자신만의 성을 꾸미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원은 어느 정도 짐작하며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널따란 대리석 거실 한쪽에 연회색 대리석 테이블이 있었다. 남궁 여사는 그 앞에 가서 섰다. 머리는 부스스한 채.

    남궁 여사는 말은 없이 눈으로만 테이블을 가리킨다.

    주원은 그 눈길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진들.

    10여 장 되는 것 같았다. 사진들이 제법 컸다. 소설책 크기만 했으니까.

    주원은 호기심 있게, 그러나 겉보기에만 그렇게 쳐다보았다.

    대충 살펴보니 세 사람 사진 같았다.

    죄다 멀끔한 모습들.

    정장 모습, 스포티한 차림, 외국 풍경 같은 배경,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 골프장 광경 등등.

    남궁 여사는 고개를 들어 주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떠냐는 뜻.

    다 괜찮다.

    모두를 하나로 합치면 더 좋겠다.

    인물 좋고, 미소 괜찮고, 물론 배경도 굿이겠지.

    남궁 여사가 손으로 사진을 하나하나 짚는다.

    이 사람은 성형외과 전문의. 이쪽은 스탠퍼드 대학 경영학 박사. 저 청년은 국제통화기금(IMF) 한국지사 과장급 매니저.

    남궁 여사가 손을 거두며 어깨를 약간 들썩하는 제스처를 한다.

    고르란 말이지.

    주원은 남궁 여사를 마주보았다.

    이 셋 다 합친 남자 데려오라니까.

    주원은 돌아서려 했다.

    “얘!” 날카로운 소리.

    주원이 약간 찔끔하며 동작을 멈췄다.

    “말을 해, 말을!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원하는 사람 없어.”

    “그래도 네 타입이 있을 거 아냐.”

    “마크롱.”



왜 이 이름이 나온 거지? 하필 은퇴한 프랑스 대통령이?

    “뭐? 마이크랑? 그게 무슨 말이야?”

    (마이크가 아니라 마크롱!)

    “몰라.”

    주원은 아주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별 생각 없이 그쪽으로 향했으나, 그 김에 정원에 나가보자고 생각했다.

    “나 좀 봐!” 남궁 여사가 뒤쫓아오며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너 무슨 애가 그러니? 남자 있는 거야?”

    “있어요.”

    “누구야?”

    “마술사.”

    에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쟤 말하는 것 좀 봐.”

    남궁 여사의 탄식소리.



주원은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저기 낙엽이 흩어져 있는 정원.

    바람이 약간 분다. 그에 따라 마지못한 듯 살짝살짝 뒹구는 시든 나뭇잎들.

    바람아, 불어라. 더 많이! 그 바람에 무엇이라도 실려오게. 님 목소리라도 실려오면 더 좋고.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

    주원은 그 곡이 마음에서 떠올랐다. 그리고는 그 음을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여러 장면을 그려보았다. 아무도 없는 빈 장면들을. 낙엽만 흩어지며 어디선지 모를 곳에서 흘러오는 선율을 좇아가며.

    생 프뤼(Saint Preux)의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Concerto pour une Voix).’ 4분의 4박자 모데라토 템포의 바로크풍 음악. 가사는 없이 목소리만 이어지는 노래. 1969년 생 프뤼가 폴란드를 여행하다가 작곡했다. 여러 사람이 연주했지만 주원은 그 중에서도 특히 앙드레 류(Andre Rieu)가 지휘하고 바이올린 연주를 한 것이 좋았다. 가슴을 아련하게 만드는 3분 남짓의 곡. 바람이 스쳐가는 빈 들 저 멀리 어디에선가 오카리나 소리 같은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아련하게.

    아련하게…….

    아 련 하 게…….     


그날 저녁 정 회장이 딸 방으로 왔다.

    방에 들어와 지나가다 들른 것처럼 이것저것 둘러보며 슬쩍 만져보기도 하고 손으로 쓸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무심코 말하듯 묻는다. 주원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눈은 뚜껑이 열려 있는 피아노 건반으로 향해 있었다. 그 옆에 세워놓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아니라.

    “따로 계획 세워놓은 것 있니? 그냥 이렇게 지낼 거야?”

    억양도 없고 감정도 없고, 딸에 대한 관심이나 걱정도 없이 그저 무심히 지나가는 말투.

    주원은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분위기상 한 마디 대꾸는 할 법한데, 주원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괜히 눈물이 나오려 했다. 서러운 마음이 들면서.

    사실 그동안 부모님이 여러 계획을 세워 주원에게 알렸으나 주원은 죄다 싫다고 했었다. 아무데도 안 가고 그저 집에서 푹 쉬다 가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알리고서 한꺼번에 만난 뒤 나머지는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혼자서 편히 지내자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10월 초반에 귀국연주회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말만 그럴 뿐이지.



주원이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되었다. 석 달만 한국에 있겠다고 해서 돌아가는 비행기 표는 내년 1월 초로 되어 있다. 지금은 10월 말에 접어들고 있었다.

    정 회장은 그간 몇 번이나 딸에게 어떻게 지낼 거냐고 물어봤었다. 그때마다 주원은 집에서 푹 쉬다 가겠다고 말했다. 집이 좋다고. 언제 또다시 집에 와서 이렇게 쉬어보겠느냐고 했다. 이 말에 정 회장은 기특하면서도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공부에만 시달린 딸. 남궁 여사는 단 한시라도 딸을 그냥 놔두면 당장 어떻게 될 줄 알고 미국에까지 달려가서 닦달하고 레슨 일정뿐만 아니라 외국 연수나 콘테스트까지 직접 챙겼다. 게다가 이번에는 주원보다 한 달 먼저 들어와 귀국연주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챙기고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리고 그 파티를 통해 사윗감 경쟁도 시키면서 즐기려 했었던 것이다. 파티 막판에 주원이 어이없게도 망쳐버렸지만.

    그러던 남궁 여사도 남편 정 회장이 이번에는 그냥 쉬게 놔두라는고 하는 말에 억지로 지금껏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주원은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딸이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했다 하더라도 부모가 이렇게 모른 척할 수 있는 거냔 말이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외동딸을. 특히 아빠가…….

    정 회장은 외면하고 있었던 눈길을 슬쩍 돌려 주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딘지 달래는 듯한 투로 말을 한다.

    “엄마도 걱정이 태산이다. 너 이렇게 놔둬도 되느냐고.”

    오늘 정 회장은 바람도 쐴 겸 저녁을 외식하자며 주원에게 말을 하려고 2층으로 찾아온 것이다.

    “아빠…….”

    “그래……, 우리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자.”

    “좋아요.”

    주원은 웬지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맺히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껌벅이면서 지워버리려 했다.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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