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 잘은모르지만
1
평온한 일요일 아침 일찍, 평창동 김 사장 댁 거실에서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넷째 딸 도현이 뛰어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도현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전화 저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뒤이어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 아, 도현이니?”
“네, 아빠! 무슨 일이세요?”
“응, 엄마 있니?”
“잠깐 기다리세요.”
도현이 엄마를 불러 전화기를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아빠와 통화하는, 아니 거의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엄마의 표정 변화를 통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도현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전주에 불과했다. 불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서귀포의 관광호텔에 가 있는 아빠가 좀처럼 아침 일찍에는 전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전화가 온 것이다. 새벽에. 그것부터가 사실 예사롭지 않았다.
엄마는 전화에 대고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현도 전화 내용을 거의 듣지 못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도현 자신이 아빠에게 직접 들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엄마가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엄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도현은 엄마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그러나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엄마…….”
엄마, 즉 민 여사는 아직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돌아선다. 도현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도현의 얼굴과 마주쳤어도 아무런 표정 없이 멍한 표정으로. 그리고는 천천히 민 여사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혼자 남은 도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
그날 오후 큰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대신 큰언니 수현이 받았다. 수현은 전화에 대고 싫다고 대답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 고모가 알아서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치고는 전화를 쾅 하고 끊었다.
도현이 화가 나서 큰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왜 큰고모가 나서는 거냐고 소리질렀다. 이것은 우리 집 일이란 말이야! 왜 엄마 입장은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는 거야? 그 여자가 뭔데 자기 맘대로 우리 집에 들어오겠다는 거야? 왜? 왜, 왜, 왜? 도현은 소리지르다 눈물이 쏟아져 나와 수화기를 사납게 내려놓고 울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난 그 여자 절대 못 받아들여. 못 오게 할 거야!
도현은 소리소리 질렀다.
바로 이날 도현의 집에는 아무도 예기치 못한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막내딸 도현은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를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이었기에 누구보다도 그 비극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어머니가 받은 전화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 다음날 월요일에 아버지는 어느 국회의원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 대만, 홍콩을 들러 보름 뒤에나 집에 오게 된다고 했다. 아버지가 외국으로 떠나는 날, 즉 내일 아침에 큰고모, 그러니까 아버지의 큰 누님 되시는 분이 도현네 집에 와서 별채를 둘러보고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전화 내용은 이러했다.
“…… 그러니까 정화 엄마(큰고모)가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가서 그전에 아버님 쓰시던 별채 둘러보고 갈 거야. 그 방을 청소 좀 하고 나서 이삼 일 뒤에……, 정화 엄마가 여자를 하나 데리고 갈 텐데……, 외로운 사람이니까 잘 좀 받아줘. 그러니까……, 그냥 잘 좀 대해 주고 나 올 때까지 조용히 지내게 하면 돼. 저쪽 바닷가 시흥 너머 해곶이라는 어촌에서 온 애인데 친척도 없고…….”
나중에 안 내용을 미리 적어보면 이런 사연이었다. 해곶이라는 바닷가 마을의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난 젊은 여자가 중학교 나이 때 서울에 올라와 공장 여기저기를 칠팔 년 떠돌다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해 도현이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지금 산부인과에서 나와 조그만 데서 몸을 풀고 있는데, 우리 별채에 와서 지내게 될 거야. 저 말이야……, 내가 아기 이름을 성현이라고 지어놨는데, 그 아기하고 애 엄마하고 당분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오대독자란 말이야, 잘 알겠지만……. 수현(큰언니)이나 지현(둘째언니)이랑 애들 모두 빗나가지 않게 당신이 잘 챙겨야 돼. 이번 일로 말이야. 나머지는 내가 돌아와서 다 정리할 거니까 그리 알고 있어. 오늘 집에 못 올라가니까 그렇게 알아. 지금 부산에 가서 내일 비행기로 일본에 가야 해서……. 그렇게 알고 있어.”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러하다. 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만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도현네 집에는 도현 위로 딸만 셋, 즉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미현, 지현, 수현이 있었는데, 뒤늦게 다른 여자한테서 아들을, 오대독자 아들을 낳아서 아이 엄마와 함께 집에 들여놓겠다는 말이다. 그것도 도현의 둘째언니 미현과 동갑인 여자를.
도현의 아버지는 위로 누님만 넷이고 그 아래로 낳은 사대독자였다. 지금 도현네 사정과 똑같았다. 그 윗대 역시 위로 딸만 넷, 그런 뒤에 아들을 낳아 삼대독자였고, 그 윗대 역시 일남사녀, 그 위와 위도 똑같았다고 한다. 어떻게 오대째 내리 위로만 딸 넷에 막내만 아들로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는지. 단 하나 다르다면 도현의 대만 빼놓고는 모두 한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는 점이다. 즉, 도현네만 딸 넷은 같은 어머니이고, 막내인 오대독자 성현이라는 아이는 어머니가 다른 것이다.
설명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뭐 복잡할 일도 없다. 어느 날 갑자가 도현네 집에 젊은 여자, 그것도 둘째 딸과 동갑인 여자가 아버지의 아들을 낳아서 별채로 들어온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도현의 큰고모가 나서서 지휘하시겠다 그 말씀인 거다. 그리고 아버지는 면이 서지 않으니 국회의원 핑계대고 외국으로 나갔다가 보름 만에 들어오고, 그 안에 큰고모가 대신 나선다는 것. 그냥 그거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짐작이 가시겠지만.
그렇다면 고모들은 어떤가. 세상 야속하게도 네 고모 모두 아들 딸 골고루 잘 낳고서 올케 약 올리듯 어깨 펴고 잘 살아가고 있다.
그 다음날 월요일 도현이 학교 끝나고 과외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엄마하고 큰고모, 그리고 큰언니 수현이 안방에 함께 앉아 있었다. 큰고모가 하는 말을 엄마는 고개를 돌리고 벽을 쳐다본 채, 그리고 수현은 큰고모를 잡아먹을 듯 빤히 노려보며 듣고 있었다.
도현이 방에 들어가자 고모가 갑자기 입을 닫았다. 엄마는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수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고모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잠시 계속되더니 갑자기 큰고모가 방석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백을 들고서 방을 나간다. 방문 앞에 서 있는 도현이 몸을 비켜주지 않자 큰고모는 얼굴에 인상을 쓰면서 노려보고는 도현을 밀치듯이 하면서 나가버렸다. 도현은 화가 나서 몸을 돌려 큰고모 뒤통수에 대고 소리지르려 했다.
그러자 큰고모가 낮게, 그러나 다 들으라는 듯이 또박또박 말을 했다.
“딸들만 줄줄이 낳은 게 무슨 벼슬이야? 대를 이어야지, 대를. 오대독자란 말이야!”
도현이 다시 대들려고 몸을 앞으로 내미는데 엄마 민 여사가 입을 열었다.
“도현아, 그만하고 문 닫고 들어와.”
그 주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일찍 집에 돌아온 도현은 거실에 들어서다 깜짝 놀라서 멈춰섰다. 그 여자가 와 있었던 것이다. 대학 다니는 수현 언니와 지현 언니도 함께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미현 언니는 바이올린 레슨 때문에 집에 없었다. 그리고 네 분의 고모 중 세 분이 와 있었다.
대문 밖에 차가 두 대 있어서 고모들이 온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라니…….
도현은 분한 마음이 들어 가방을 내팽개치고 그 여자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어쩜 저렇게 예쁘지? 고개를 돌려 겁먹은 모습으로 도현을 쳐다보는 그 얼굴은 어딘지 어린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너무도 어여뻤다. 화사하면서도 고아한 모습. 가녀린 몸매. 희고 맑은 피부에 물기가 도는 눈. 금방이라고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도현은 갑자기 숨이 탁 막힌 채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첫째언니 수현이 아기를 안고 있었다. 너무도 예쁜 아기를.
수현 언니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 아기를 들여다보다가 막 얼굴을 들고서 도현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는 행복한 아기 엄마에게서 풍기는 그런 것이 담겨 있었다. 수현 언니 옆에 앉아 있던 둘째언니 지현도 도현 쪽을 돌아다보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그 얼굴에도 미소가 흐르는 듯했다. 수현 언니와 함께 아기를 들여다보다가 방금 얼굴을 든 것 같았다. 세 고모도 역시 모두 도현을 돌아다보았다. 어딘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도현은 그 모두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눈에 분기를 담고서 엄마 쪽을 돌아다보았다.
엄마!
아니, 왜들 이러는 거야? 엄마까지도!
도현은 몸을 돌려 이층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이층 자기 방에 들어가면서 다 들으라는 듯이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는 책상 의자를 잡아당기고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분했다. 분했다. 분했다.
도현은 일어나서 책을 들어 벽으로 집어던졌다. 필통도, 연필도, 사전도, 책상에 놓여 있는 것들을 모두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분이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들어왔다.
도현은 엄마에게 책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공책을 집어던졌다.
엄마가 깜짝 놀라 손을 들어 막는다. 그러나 공책은 엄마 다리 옆을 지나 침대 모서리로 날아갔다.
“도현아…….”
엄마가 도현 쪽으로 다가왔다.
“오지 마!”
“얘…….”
“오지 말라니까!”
“도현아…….”
“엄마 바보야? 바보냐니까! 엄만 속도 없어? 분하지도 않아?”
도현은 소리소리 질렀다. 울음이 섞인 채.
열린 방문으로 큰고모가 나타났다.
“고모 필요 없어! 나가! 나가란 말야!”
도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도현은 큰언니 수현과 함께 할아버지가 서재 겸 서화를 그리고 걸어놓고 했던 별채로 갔다.
할아버지는 도현이 유치원 다닐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그 2년 전에 돌아가시고. 도현은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단지 어렸을 때 그 방에 가서 할아버지가 먹물 갈 때 옆에서 물을 조금 부어드리고 했던 소소한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고 언니들이 이러저런 이야기를 할 때면 어렴풋이 할머니 치맛자락이나 까끌까끌했던 손의 감촉 같은 것이 떠오를 뿐이었다.
도현네 저택은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도현이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그때 본채 옆으로 10미터가량 떨어진 별채만 한옥식으로 개조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물품들을 그곳에 보관해 두었다. 커다란 방이 하나, 그리고 좁다란 마루 건너에 아담한 크기의 건넌방이 하나 있었다. 큰방의 앞쪽과 옆, 그리고 작은 방 앞은 쪽마루가 둘려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유리문을 달아 막아놓았다. 그리고 별채 오른쪽, 즉 본채에서 보면 제일 먼 쪽으로 자그마한 화원 같은 곳을 만들어 할아버지가 가꾸시던 나무들을 그곳으로 옮겨 심었다.
성현 엄마, 즉 아버지의 새 여자는 아기와 함께 별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도현은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도 먹지 않고 데모하다가 큰언니가 겨우 달래고 구슬려서 오전 느지막이 밥을 대충 먹었다. 그리고는 새엄마, (아니, 새엄마라니! 새파란 게! 게다가 엄마가 아직 살아 있잖아!) 아버지의 새 여자, (새 여자? 흥!) 첩? 그래, 첩이다, 첩! 그런데 첩이란 말은 이상하게 싫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성현 엄마가 제일 좋겠다……, 에게 가고 있는 것이었다.
도현은 마지못해 끌려가듯이 했지만 속으로는 그 여자의 예뻤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아기도 참 예뻤지. 잠깐 본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그 예뻤던 얼굴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주책 맞게도.
그렇지만 도현 자신은 얼굴을 찌푸린 채 지금 끌려가는 것이다. 이 분위기만은 꼭 유지해야 한다. 저 여자가 예쁘거나 말거나.
별채 앞에 이르자 수현 언니가 손을 입에다 갖다대고 흠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화창한 봄날이어서 유리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다. 작은방 격자문이 살그머니 열린다. 그러더니 에그머니 하는 듯이 그 여자가 화들짝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버선발, 헉! 정말로 버선발이었다. 연분홍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데다가 이 20세기 대도시 한복판에서 하얀 버선을 신고 뛰어나왔던 것이다.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그런데 그 모습은 또 왜 그렇게 예뻤냔 말이다. 또한 너무도 고왔다. 도현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혔다. 자기가 지금 미인 콘테스트 심사 나온 것도 아니고, 한바탕 난리를 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런 감상에나 빠지고 있다니.
지금 이 순간 서로 눈이 마주친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당황했던 사람은 아마도 도현 자신이리라. 비틀린 심사로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화면을 뚫고 나타나듯 방에서 뛰어나온 부정한 여자에게 넋이 나가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
바로 그때 방 안에서 아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갑자기 아기를 내려놓고 나온 탓이리라. 여자가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옆으로 큰언니가 달려들어갔다. 아기를 안아 올리는 것 같았다. 아기를 안고 흔드는 듯 괜찮아 괜찮아 하는 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온다. 곧이어 아기울음은 잦아들고 큰언니가 방 밖으로 아기를 들고 나온다. 여자가 아기를 받으려고 팔을 내미는 듯하다가 손을 거둔다. 큰언니가 아기를 넘겨줄 의사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마루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장면에 등장한 세 여인의 눈은 모두 아기에게 쏠리고 말았다.
아기. 도현은 마당에서 올려다보았지만 이쪽으로 돌려진 아기의 모습은 또 얼마나 예쁜지. 울음을 그치고 큰언니를 바라보면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그 모습.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말았다.
어떡해……. 너무 예뻐…….
하마터면 도현은 팔짝팔짝 뛰며 나도 안아볼래 하고 소리칠 뻔했다.
도현네 집은 한동안 평온했다. 평온? 겉으로 보이는 평온이겠지.
모두들 아기에 취해 민 여사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민 여사는 표정의 변화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래가 별 말이 없고 평소 겉으로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나타나 보이지 않았다. 이번 일에서도 어찌 보면 가장 주역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지만, 민 여사는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하듯 무심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에 있었다. 고모들이 연일 집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아기 옷도 사오고 애 엄마 먹으라고 각종 좋은 것 다 사들고 날랐다. 그뿐 아니다. 도현 자매 넷, 그 중에서도 아기를 가장 나중에 본 셋째언니 미현은 꼭 미친 사람 같았다. 아기를 온종일 독차지하려 들어 나머지 세 자매의 눈총을 사기까지 했으니.
그리고……, 인희……. 아버지의 여자, 어느 누가 그렇게 부르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그 호칭도, 새댁이라고는 더더군다나 부를 수도 없는데다가 성현 엄마라고 하면 마치 성현이 다른 집 자손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어 그것도 싫어서, 엄마나 큰언니, 둘째언니, 일하는 아주머니는 죄다 인희라 부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이가 아래인 미현과 도현도 인희라고 부를 수는 없어서 상황에 따라 저기 또는 응 하면서 눈치껏 불렀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미현 언니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도현은 인희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 인희……. 이름은 그냥 그저 그랬다.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마음은 정말 예뻤다. 얼굴 모습 이상으로. 셋째언니 미현도 인희를 친구로 하고 싶어했고, 둘째언니 지현은 나이가 동갑이라서 그랬겠지만 아예 친구 그 자체였다. 친구 아들 보러 가듯 늘 별채에 가서 눌러붙어 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셋째 미현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미현은 원래부터 욕심이 많은 성격이어서 자기가 그 아기를 독점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전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고모와 딸들이 요란 떠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빠가 가끔 집에 올라왔다 내려갈 때도 양복이랑 와이셔츠, 넥타이, 속옷, 양말 등을 트렁크에 챙겨서 넣어주며 타박 없이 잘 다녀오시라고 말만 할 뿐이었다.
아빠는 예전과 달리 집에 자주 올라오지 않았다.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 하는 눈치였다. 어쩌다 집에 와서도 한낮에 잠깐 들렀다 갈 뿐, 별채에도 무심한 척 슬쩍 들러보기만 하고 바쁜 일이 있다며 곧바로 떠나버렸다.
한번은 집 금고에 있는 중요한 서류를 가져가야 한다며 밤늦게 집에 온 탓에 어쩔 수 없이 자고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디서 잘까?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이것은 참으로 온 가족의 묘한 관심사가 되었다. 도현도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딸들은 모두 아빠가 안방에서 자기를 원했다. 엄마가 받아들일지 그것은 모르지만.
어떻든 첫째 안방, 둘째 별채, 셋째 제삼의 장소? 이 중에서 정답은?
그날 밤 야릇한 정적과 긴장감이 도현의 집에 흐르고 있었다.
딸 넷은 죄다 일찌감치 얼른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신경은 온통 그 일에 가 있으면서. 일하는 아주머니도 바깥주인의 시중을 좀 들다가 적당한 기회에 1층 주방 옆 자기 방으로 훌쩍 들어가 숨어버렸다. 쥐들도 그랬을 것 같았다. 부엉이가 날아와 있었다면 그들도 그랬을 테고.
다음날 아침 큰언니 수현이 일찍 일어나 무심코 물 마시러 아래층에 내려갔다가 깜짝 놀라서 말을 하는 바람에 그 궁금증은 간단히 풀렸다.
“어머, 아빠, 왜 여기서 자? 안으로 들어가세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가 안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엄마가 문을 닫고 잠가버린 것이다. 당연하고말고. 두드려 패서 내쫓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이와 같이 아빠가 올 때마다 집안 분위기는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딸들은 차라리 아빠가 아예 오지 않고 나머지 식구들끼리만 지금처럼 화기애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아빠는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온 식구 눈치보고 집에도 잘 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이제 인희 모자는 완전한 식구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면 아기가 없이 인희만 있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중에도 엄마의 관용과 인내가 집안의 평화유지에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 속은 누가 알랴.
일하는 아주머니가 한번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여사님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고. 도현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가운데 토×은 남자잖아. (그리고 저 혼자 괜히 얼굴 붉어지고.) 뭐가 좋을까……. 열녀, 숙녀……. 이런 말은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요조숙녀……. 이것도 아니고……. 어질 인, 아니 그것보다는 참을 인이 더 낫겠지……. 인, 인, 인……. 그 뒤에 무슨 글자를 붙이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엄마가 불쌍해졌다.
엄마…….
엄마, 미안해. 고마워. 힘내.
딸들은 모두 마음으로, 눈으로, 표정으로 엄마를 응원했다.
2
고모들이 모두 한꺼번에 집으로 몰려왔다.
자신들의 동생이 집에 잘 오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며 집 밖에서 빙빙 도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을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 속내는 뻔했다. 집에 와서 그분들이 토해내는 말을 들어보면.
한마디로 인희를 내보내야겠다는 것이다. 인희와 올케가 한 집에 함께 있으니 자기들 동생이 불편해 해서 안 되겠다는 말이다. 차라리 인희에게 딴 살림을 차려주어 남동생이 눈치 안 보고 어느 집이든 들락거리게 해주는 게 좋겠다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좀 발생한다. 바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고모들이 쳐들어온 셈이다.
아기, 즉 성현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첫째, 집에 놔두고 인희만 나가게 한다. 이때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1] 인희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인다면? 여기에서 또 문제가 파생된다.
(1) 성현은 누가 키우는가?
① 도현 엄마가. (인희를 내보낸다며?) 아, 그렇지. 이것은 논리모순.
② 유모를 들인다. 비용은? 그 정도는 감당할 집안이다.
(2) 인희가 혹 무엇인가를 요구할지 모르는데?
① 돈? 차라리 이렇게 된다면 속편할지도 모른다. 남동생과 상의해서 적당히 줘버리고 끝내면 되니까.
② 돈 말고 다른 것은 원한다면? 하지만 아기도 아니고 돈도 아니면 뭐가 있을까……?
[2] 인희가 안 받아들인다면?
(1) 인희와 아기를 함께 내보낸다.
① 집을 얻어줘야 하는데, 그 비용은? 그거야 남동생이 알아서 해야지. 얘, 지금 회사 사정이 어렵다잖아. 그래도 동생이 해결해야지, 그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
② 인희가 아예 이 집에 눌러앉겠다면……? 우리가 지금 헛짓하는 거지 뭐.
(2) 인희만 남고 아기를 내보낸다면……? 언니, 지금 그게 말이 돼? 아차, 그렇지…….
둘째, 둘째는 뭐가 있지……? 뭐 우리가 생각 못한 게 있나……? 아이구, 골치야.
아! 혹시 인희가 아기를 데리고 도망가 버리면? 그러면 어쩌니?
몰라, 몰라. 꼭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만들어야 해? 얘, 너 모르는 소리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
왁자지껄. 시끌벅적. 갑론을박. 우왕좌왕.
그러다가 둘째고모가 폭탄을 터뜨렸다.
인희가 혹시 아이를 또 낳으면 어떡하니?
고요…….
그 이후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한 고모는 집에 가서 이마를 싸매고 드러누웠다는 소문과,
또 한 고모는 자기는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에 관여 안 하겠다고 확고하게 선언했다는 말과,
또 다른 고모는 정신이 멍해져서 사흘을 말도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았다는 근거 없는 소리와,
오직 둘째고모만 밤새도록 인희가 아이를 낳고 또 낳고 또또 낳고 또또또 계속해서 낳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계산만 하다가 사흘을 밤새우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는 정신 나간 말들이…….
3
결국 고모들이 마음을 모아 인희와 아기가 집을 나가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평창동 저택에서 가까운 곳으로. 버스로 두 정류장 떨어진 곳의 조그만 한옥 뒤채에 전세를 얻어서 그곳으로 나가게 한 것이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빨래거리들을 해결해 주고 먹을 것들도 챙겨주곤 했다. 물론 각종 약들도 포함해서. 한마디로 인희는 아기만 잘 키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평창동 네 자매는 수시로 그 집을 찾아가 아기를 보았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도현은 집을 나섰다. 중간고사 때문에 요 며칠 아기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날은 아주 잠깐 들러서 아기를 보고 가기 위해 서두른 것이다.
도현은 버스에서 내려 아기네 집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학교 가는 중간이기에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화창하고 따스한 봄날 아침, 얼마나 생기로운 날씨인가.
도현은 영문과 다니는 둘째언니 지현에게서 배운 영시를 마음속으로 음미했다.
The year’s at the spring
And the day’s at the morn
The morning’s at the seven
The hillside’s dew-pearled
The lark’s on the wing
The snail’s on the thorn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이 시는 로마에서 벌어진 한 살인재판을 소재로 하여 책 한 권 분량의 장시를 써서 큰 성공을 거둔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The year’s at the spring’이었다. 도현은 언니에게서 영시의 각운에 대해서도 배웠다.
spring, wing (-ing)
morn, thorn (-orn)
seven, heaven (-ven)
pearled, world (-rld)
이렇게 1연과 5연, 2연과 6연, 3연과 7연, 4연과 8연의 끝단어가 각각 각운이 맞게 시를 지으려면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영시의 묘미라고 한다.
한국 시에도 이러한 것이 있을까?
국문과에 다니는 큰언니 수현도 지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
한국의 옛 시, 즉 4∙4조의 가사(歌辭)나 3∙4조의 시조는 물론이고 한시에서도 엄격한 시율(詩律)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시의 오언절구나 칠언율시의 경우 사성(四聲)에 따라 한자를 선택해야 하고, 시조에서도 마지막 연은 앞의 두 연과 연결되어야 하되 가슴을 콕 찌르듯 반전과 완결의 의미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들 말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으나 시조에서도 영시 못지않게 감칠맛 나는 것이 많이 있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고려 후기 원나라에 나라가 짓밟힐 시기의 충신이었던 대제학(大提學) 이조년이 지었다는 이 시조는 음미할수록 맛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연이 일품이었다. 도현은 문득 생각난 다른 시조, 평소에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도 떠올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나보기 좋다하고 남의님을 매양보랴
한열흘 두닷새에 여드레만 보고지고
그달도 설흔날이면 또이틀을 보리라
결국 남의 님을 1년 365일 매일 훔쳐보겠다는 거잖아. 아예 빼앗아 가지 그래. 얌체……. 도현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서 도현이 아기 성현의 집 가까이 다가갔을 때, 어……?
도현은 얼른 다른 집 대문 기둥 안쪽으로 들어가 숨었다.
아빠가 성현, 즉 인희의 집에서 막 나오는 중이었던 것이다. 어젯밤 서울에 올라온다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집에는 알리지 않고 몰래…….
도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저 여자! 우리 집에 침입해서 남의 남편 빼앗아 간 거잖아!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고서.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