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 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by Rudolf

제24장 | 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1


김 사장은 도현이 거실에 나와 앉은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지난 겨울 내내 도현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병을 앓았다. 의사의 말로는 정신적 충격 같다고 하는데 김 사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현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단지 지난해 가을 감기가 번져서 그랬는지 열병이 심해서 잠시 고생했지만, 휴학한 이후에는 별 다른 일이 없어 보였다. 집에만 있기 답답하다며 도서관 간다고, 어떤 때는 재수학원에 다니겠다고 해서 종종 집을 나가기만 했지 특별히 친구를 만나거나 또는 남자와 사귀거나 하는 눈치는 없었다. 그러다가 11월초 한밤중에 집에 돌아온 이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을에 앓았던 열병 후유증이려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이상해져 갔다. 마치 정신병자처럼. 그렇다고 정신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또다시 열이 펄펄 나며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한밤중 비명을 지르고 깨어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병실에서 나와 복도를 헤매기도 해서 주변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했다. 그런 중에도 다행인 것은 정신병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증상은 나아졌다 심해졌다 하면서 지난 겨울을 보냈다. 한마디로 온 가족이 노심초사, 정말로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가면서 도현의 증상은 차차 나아져 갔다.

그리고 오늘, 따스한 봄날 아침 도현은 안정적인 모습으로 아빠와 함께 거실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김 사장은 도현의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지난 6개월 사이 큰 병을 두 번씩이나 앓은 딸이 가엾기도 하고, 또한 그것을 이겨낸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전화가 울렸다. 김 사장이 일어서려고 하는데 도현이 말을 한다.

“내가 받을게, 아빠.”

그리고는 천천히 전화기로 가서 수화기를 들어올린다.

“여보세요……. 네, 맞아요……. 아,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도현이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김 사장을 쳐다본다.

“아빠 바꿔달래요.”

“누군데?”

“동창이라는데.”

김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현에게 다가가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전화는 김 사장의 대학 친구에게 온 것이었다. 김 사장과 함께 문리대를 다녔으나 사법고시를 보고 변호사가 된 친구였다.

“내 사시 동기 중에 국선변호를 자주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같은 모임에 있는 다른 변호사가 최근에 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더라는 거야. 심 변호사라는 친구인데, 그 친구가 국선으로 한 여자 변호를 맡았다고 하더라고.”

그리고서 이어진 이야기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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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작년 11월초 저녁 무렵에 한강변의 어떤 공사 중인 건물 정원에서

한 남자를 녹슨 송곳으로 열 번 이상 찔렀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는데 마침 그때 그 건물에서 경비를 맡고 있는 사람이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나는 바람에 나갔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래서 경찰을 부르고 앰뷸런스를 부르고 해서 남자는 병원에 실려갔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장기를 심하게 다쳐서 의식불명이었으나

여러 번 수술 끝에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다친 남자가 여자의 아이를 유괴했고

그때 마침 여자가 그 사실을 알고 남자를 뒤쫓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두 사람 모두 그 건물 마당으로 들어갔는데,

그 아이가 유괴한 남자 손에서 벗어나 공사 중이라 방치되어 있던 비계 위로 도망갔다가

그만 비계가 쓰러지는 바람에 미끄러져 한강으로 떨어졌다.

아이는 강물 속으로 사라졌는데, 여자가 그 충격으로 남자를 찔렀다는 것이다.

그 경우 여자는 정당방위는 아니지만 충분히 정황를 고려할 수 있는데도

법원에서는 여자에게 1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심각한 상해치상 죄목으로.

물론 이는 정상을 참작해서 내린 선고인데,

그 심 변호사가 이 경우는 무죄 또는 적어도 집행유예를 내렸어야 하는 것이라고

열을 올리더라는 것이다.

또 그 자신도 그렇게 변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가 사망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실종된 상태고,

게다가 아직 그 시신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남자로 인해 아이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판사가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단지 아이를 유괴했을 뿐

아이의 실종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는 보기 어려워,

여자가 남자를 10여 차례 찌른 것은 정황상 과도하다는 것이다.

또한 법은 어떠한 경우든 개인적인 복수를 허용치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든 아이 엄마는 그 광경에서 충격을 받아 남자를 찌른 것이기에

그것을 참작하여 징역 1년을 선고했다고 하더란다.

차라리 아이의 죽음이 확인되었거나 시신이 발견되었으면

그 어머니 쪽의 심신미약 주장이 받아들여졌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러한 면이 법의 맹점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 심 변호사는 여자에게 항소하자고 했지만 여자는 거부하여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심 변호사는 그 모임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며 참 안타까운 경우라고,

제대로 그 여자를 변호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사실 법조계에서는 흔히 듣는 일인데,

그 이야기 중에서 한 가지 김 사장에게 확인해 봐야 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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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꺼내서 미안한데, 자네 그 실종되었다는 아들 있잖나. 그 아들 이름이 뭐지?”

“성현인데. 김성현. 그런데 이름은 왜?”

“응, 실은 말이야……. 그 죽은 아이 이름이 김성현인 거야. 다섯 살이라나 여섯 살이라나.”

“뭐?”

김 사장은 수화기를 놓칠 뻔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김성현? 죽은 아이 이름이 성현? 그럼 그 애 엄마 이름은 아나?”

“아냐. 그건 몰라. 그 심 변호사가 죽은 아이 이름만 말하더라고. 처음에는 그냥 넘겼는데 나중에 가만 생각해 보니 자네 지난번 부인 장례 이후 아기하고 그……. 자네 그 여자가 사라졌다고 했잖나. 그때 그 이름을 들었던 게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그 심 변호사라는 분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나?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게.”

그 뒤 김 사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심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 죽은 아이 엄마 이름이 송인희라는 것을 알았다.

김 사장은 전화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새하얘졌다.

도현은 그 전화 통화 내내 일어서서 모두 들었다. 물론 아빠가 하는 말만 듣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슨 내용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현은 아빠가 통화하는 사이 일어선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현도 전화기 쪽으로 갈 수 없었다. 전화가 계속 울리자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뛰어나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네 네 하다가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김 사장을 돌아다본다.

“사장님, 중요한 전화라고 하는데요, 받으시겠어요?”

아주머니도 김 사장의 표정을 보고 예삿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고 조심스레 말을 하는 것이었다.

김 사장이 천천히 일어나 굳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나 지금 전화 받을 상황이 아니라서 다음에……. 그래요? 그럼 간단하게……. 네?”

전화 내용은 이러했다.

김 사장 고등학교 후배 중 서울 법대에 다니는 학생이 있는데, 이번에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소년급제한 것이다. 학교를 1년간 휴학하고 공부한 끝에 이루어낸 쾌거이며, 김 사장이 몇 년 전 고등학교 졸업식 때 총동문회장이 주는 장학금을 전달하기로 했다가 회사의 화재로 인해 자리를 떠나 다른 사람이 대신 전달한 그 학생이라고 했다. 그 학생 이름이 송인국인데, 총동문회 회장단에서 그 학생과 함께 식사자리를 마련하려 한다며, 수석부회장인 김 사장이 그 학생과 직접 통화를 해서 약속을 잡으라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전화하면 그 학생 연락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송인국.

인희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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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장은 심 변호사에게 다시 전화하여 송인희를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오늘 당장 면회 갈 수 있겠느냐고,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용산의 고등학교에 전화를 해서 송인국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김 사장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자가 받는다.

“네, 서울인쇄입니다.”

“여보세요? 거기 송인국 씨 댁 아닙니까?”

“송인국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다른 남자가 전화에 나왔다.

“여보세요? 누굴 찾으시죠?”

“아, 예, 저……. 송인국 씨를 찾는데요. 이번에 사법고시에…….”

“예 예 예, 제가 송인국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어디신지요?”

아버지……? 그럼 다른 송인국인가? 김 사장은 낭패감이 들었다.

“아, 사실은 용산의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전화드린 건데요……. 아니, 그것보다도 한 가지 여쭙지요. 혹시 송인희라는 여자분 아시나요?”


이렇게 해서 김 사장의 차로 정 선생, 송인국이 함께 여주교도소로 향했다.

김 사장은 정 선생과는 전화로 간단히 그간의 정황 이야기를 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다시 나누자고 했다.

그 뒤 곧바로 또다시 심 변호사에게 전화를 해서 자기 사정을 말했다.

30분 뒤 심 변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에 면회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함께, 그리고 심 변호사는 따로 서울을 출발하여 교도소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여주로 내려가는 길, 거리도 시간도 길었지만 차 안에서 김 사장과 정 선생 사이의 대화는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 어찌 그 시간에 다 말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중요한 부분은 서로 모두 확인했다.

인국은 이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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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희는 교도관에게서 받은 노트에 일기를 썼다. 아니, 글을 썼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모두 다 적었다. 남들이 읽으면 연결이 잘 안 될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장, 문법, 형식 그런 것은 모두 무시했다. 지금까지 대둔도 목사에게 보내는 간단한 편지 외에는 글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는 인희였다.

인희는 매일매일 그저 써나갔다. 어릴 때 일이 생각나면 그것을, 팔덕과 도망다니던 일이 떠오르면 또 그것을, 할머니가 생각나면 바로 그 일을, 인국이 떠오르면 그때는 그 이야기를, 가거도 생각이 나면 그대로 그 일을 써내려갔다.

일본에서, 평창동에서, 편물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 앞뒤 순서 가리지 않고 써나갔다.

그리고 성현 얼굴이 떠오르면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글을 썼다.

똑같은 말도 계속 썼고, 단어 하나만 생각나면 그것도 썼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름만 써나갔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인국, 인국, 인국…….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쓴 이름은 이러했다.

순지 언니, 순지 언니…….

성현아, 성현아…….

이 이름들로 노트의 반 이상이 가득찼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시를 적었다. 순지 언니가 좋아했다는 그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러나 그 긴 시를 다 쓴 것은 아니다. 그 중 일부를. 그것도 정확하지 않게. 어느 구절은 틀리기도 하고, 빼먹기도 하고, 더해지기도 하고…….

그리고 그 노트를 다 채운 날, 인희가 생각한 그날, 몰래 숨겨두었던 깨어진 거울조각을 손목에 갖다댔다.


3


김 사장, 정 선생, 송인국, 심 변호사는 거의 동시에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에 있는 여주교도소에 도착했다.

서로 악수를 나누며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접수대에서 심 변호사가 송인희를 면회하기로 신청해 두었다고 말했다.

접수계원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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