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추(靑秋) 즈음에

아직도 이십대의 열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느 삼십대의 고백

by 이우

청추(靑秋) 즈음에



- 아직도 이십대의 열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느 삼십대의 고백





DSC03689.jpg ©leewoo, 2019



나의 일월, 오늘은 마치 여름이 한풀 꺾인 어느 날 밤인 것만 같다. 뜨거웠던 지난여름의 흥분은 가을을 예고하는 밤공기 속에서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있다. 지치지 않던 육체적 에너지, 억누를 수 없던 뜨거운 열정, 종잡을 수 없었던 방랑벽, 뜬 눈으로 꾸었던 한 여름밤의 꿈, 잔뜩 취해있었던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도취.


모두 옛이야기처럼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가을이 드문드문 섞여있는 늦여름의 밤공기처럼. 그래서 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별빛에 취해>라는 시에 이렇게 적었다. 나의 ‘청춘(靑春)은, 이제 청추(靑秋)에 다다랐다’고. 무려 시로코*가 불어오는 모로코의 어느 여름밤에 쓴 구절이다.


그때부터 가을의 도래를 예감하고 있었다. 이제 가을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그래도 아직 늦여름이다. 긴 새벽을 지나 다시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름이 찾아온다. 하지만 해는 짧아지고야 말았다. 노을과 함께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오고야 만다. 가을은 내게 말한다. 이제는 수확해야 한다고.


그렇다. 내겐 여름내 달린 곡식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태양과 지상의 양식을 잔뜩 흡수해 건강하게 영근 것들이다. 이제는 부지런해져야 한다. 방치하면 참새가 쪼아 먹을 것이며, 너무 영글면 썩어 문드러져 버릴 것이다. 아, 본의 아니게 농부가 돼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지난여름에 모든 열의를 쏟아부은 탓일까. 무기력과 우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엄습하곤 한다. 하지만 이젠 근면 성실해져야 한다. 나의 가을도 지나간 여름처럼 되돌릴 수는 없을 테니. 아, 내겐 단 한 번뿐일 소중한 가을이여. 이젠 너를 제대로 맞이해보겠다.


2019년, 가을의 초입에서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유럽을 향해 불어 가는 고온다습한 바람.










resis 사본.jpg


매거진의 이전글친구가 전해준 보헤미안 랩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