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나라에 봄은 없다

북아프리카에서 오지 않을 봄을 그리워하다

by 이우

모로코에서 맞이했던 첫 번째 겨울이 끝이 났다. 이제 한낮의 기온은 20도를 웃돈다. 그래도 저녁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쌀쌀해진다. 저 광활한 대서양으로부터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로코 사람들은 겨우내 입었던 두터운 재킷과 칙칙한 코트, 그리고 무스탕을 여전히 입고 다닌다. 심지어 멋 좀 부린 여자들은 어그 부츠도 신고 다닌다. 북아프리카의 오후, 제법 따사로워진 햇살 아래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겨울 차림인 것이다.

내겐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겨우내 따스함을 지켜주었던 복장을 포근한 햇살 아래에서도 고수하고 있다. 사실 그들이 중무장했던 겨울도 그다지 추운 계절은 아니었다. 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당연하게도 겨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눈발은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곳의 옷차림은 여느 북반구의 혹독한 겨울을 나는 이들의 복장과 다름없었다.


모로코의 어느 여름날, 끝없이 펼쳐진 황야. ©leewoo, 2017


오히려 이곳의 겨울은 생명이 약동하는 축복의 시기이다. 북아프리카의 여름은 무자비한 태양과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과 함께 모든 것을 뜨겁게 익혀버린다. 그러나 겨울이 찾아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들은 겨울을 우기로 부른다. 여름내 바싹 마른 대지에 촉촉한 비가 내린다. 모든 것을 식혀주고 적셔준다. 이와 동시에 사막 같던 벌판은 온통 녹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삭막했던 여름내 죽은 줄만 알았던 생명들이 움트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생명이 만개하는 시기이건만, 모든 사람들은 두터운 복장으로 다닌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서는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에서는 오렌지가 노랗게 열리고 있는데 내복을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아, 그럼에도 무슨 영문인지 흩날리는 눈발 하나 본 적도 없건만, 감기에 두 번이나 걸리고 말았다. 내겐 오히려 한국의 혹독한 겨울이 더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단지 고향이 주는 따스한 정취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로코의 어느 봄 날, 전통 시장 메디나의 풍경. ©leewoo, 2017



모로코는 겨울이라 해도 영상을 웃도니 난방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곳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식당과 카페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어 실내에서도 외투 차림으로 있어야 한다. 오히려 햇살이 비쳐오는 실외가 더 따뜻하다. 주거공간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식 온돌은 찾아볼 수도 없고, 기껏해야 작은 온열기 하나가 전부다.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마치 동굴에 있는 기분이었다. 따스함이라곤 전기장판을 튼 이불 속 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봄을 애타게 기다렸다.


한국의 정서에서 봄은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싱그럽게 피어나는 시기다. 눈부시도록 따스한 햇살, 청명한 하늘, 만개한 개나리와 벚꽃, 울려 퍼지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여인들의 하늘하늘거리는 원피스. 모든 것이 약동한다. 게다가 겨우내 얼었던 마음마저 녹으면 사랑을 꿈꾸기까지 한다. 이 모든 싱그러움이 다가오는 여름과 함께 끝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만개했다 떨어지는 벚꽃처럼 자연의 순리에 따라 활짝 피어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생명의 절기를 말이다. 하지만 한 낯의 뜨거운 태양 아래 두터운 외투를 걸친 모로코 친구는 내게 말한다.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올 거라고. 아니, 이봐 그러면 봄은? 그러자 이게 바로 봄이란다. 만개한 형형색색의 꽃들도 없고, 여인들의 싱그러운 원피스도 없다. <벚꽃엔딩> 대신에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다.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은 이게 봄이라고!

내가 그리던 건 그동안 익숙해진 한국의 봄이었다. 하지만 여긴 한국이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였다. 그렇다지만 이곳의 봄은 어찌 이리도 무미건조하단 말인가. 친구에게 아랍어 사전에서 봄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절기상 겨울이 끝나는 시기라고 했다. 흔히 한국에서는 젊고 싱그러웠던 시절을 ‘청춘’이라 하며 봄에 비유하는데, 북아프리카에서 이런 표현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봄은 북아프리카에 결코 오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봄이 기다려지는, 아니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꽃집 앞을 지나칠 때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다. 보도블록 사이 조그맣게 피어난 야생화를 가까이서 바라본다. 아, 봄 내음이라도 맡고 싶은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것 말고는 봄의 정취를 느낄 만한 것이 없다. 주위를 둘러본다. 유행을 앞서가는 과감한 여자는 벌써 다가올 여름을 맞아 탱크톱을 입었다. 하지만 그녀를 지나치는 다른 여인은 무스탕에 어그 부츠를 신고 있다. 혼란스럽다. 정녕 이것이 봄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날수록 태양은 뜨거운 여름만을 진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이 봄이라 부르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절기도 곧 지나갈 터였다. 아, 기나긴 겨울 끝에 제대로 된 봄조차 맞이하지 못했는데 이제 여름이라니! 여름이 오기 전에 내게 싱그러운 봄을 달라! 꺾여가는 혼돈의 봄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로코에 누군가 파스텔 톤의 화사한 원피스라도 입고 나타난다면, 그녀는 내게 분명 봄의 여왕, 아니 봄 그 자체가 될 것이라고.


모로코에서의 어느 날, 봄을 그리며.



모로코에서의 어느 날, 봄을 그리며. ©leewoo,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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