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해적왕을 꿈꾸다
여행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날 때면 언제나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쉰 살이 되면 요트를 사서 세계를 일주할 거야. 너도 함께 할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네는 이 허무맹랑한 제안을 벌써 네 명의친구가 받아들였다. 그들은 각각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튀니지 출신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출신이니, 앞으로는 다른 대륙의 친구들을 물색해보려고 한다.
요트를 타고 친구들과 세계 일주라니, 일본의 인기 만화인 <<원피스>>에 너무 심취해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좀 더 그 동기를 파헤쳐 보자면,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설처럼 광활한 바다에서 지독하고 강렬한 경험을 몸소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굳이 쉰 살을 택한 것은 그러한 경험을 멋지게 해내려면 삶의 경험과 관록 그리고 지혜라고 일컫을 만한 것들은 그때쯤 되어야 원숙해질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현 불가능에 가까운 꿈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거친 바다를 항해할 그 순간을 꿈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키나와를 홀로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계획 없이 항구를 거닐다 우연히 당일치기 투어 광고를 접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혹등고래를 보고 돌아오는 투어였다. 그동안 꿈꾸었던 목표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무작정 승선했다.
광활한 바다, 굽이치는 파도,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혹등고래. 저 멀리 나아가면 꿈의 조각들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부푼 가슴을 안고 갑판에 서서 저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뱃멀미가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체가 흔들릴 때마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갑판의 기둥을 부여잡고 속을 진정시키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변기를부여잡고 연신 속을 게워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항해는 계속되었다.
출항할 때와는 달리 나는 그야말로 초주검이 되어 갑판에 주저앉아 기둥을 끌어안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고래는 보고 싶었던 것이다. 두세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갑자기 직원이 선체와 그리 멀지 않은 수면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저기 고래가 보입니다!” 승객들이 갑판으로 우르르 밀려왔다. 나는 수족관에서나 볼 수 있던 범고래 쇼처럼, 곡예에 가깝게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혹등고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래는 유람선 먼 발치에서 마치 인간을 경계하는 듯 잠시 고갤 내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먼 바다까지 나아가 본 것이라곤 고작 그것뿐이었다.
뱃멀미와 함께했던 짧은 항해를 마치고 육지로 돌아왔다. 행해 끝에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고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기억에 새겨진 것은 오감으로 마주했던 것도 뱃멀미였지 고래가 아니었다. 뱃멀미의 잔상이 온 몸을 맴돌뿐이었다. 잠시 항구 벤치에 지친 몸을 뉘었다. 훗날 해적왕이 되어 거친 항해를 꿈꾸었던 내가 뱃멀미에 시달리다니, 자조적인 웃음만이 맴돌 뿐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가시지 않는 뱃멀미야말로 내가 꿈을 좇으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내가 갈망하는 꿈은 저기 더 먼 바다 너머에 있을 테고, 저 너머로 가려면 뱃멀미는 따놓은 당상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짧은 예고편에도 불구하고 다시 승선하고 싶었다. 다시 항해하고 싶었다. 다시 꿈꾸고 싶었다. 고래를 보고 실망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다시 낯선 친구들을 만나고, 동료들을 물색하고 싶었다.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내가 저 먼 바다의 이상을 꿈꾸며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실 뱃멀미 같은 역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럼에도 뱃멀미 같은 강렬한 경험을 할 수만 있다면야, 다시 기꺼이 바다로 나아가겠다고,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