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대한 편견을 깨다
프랑스의 남부 루흐마항에서였다. 노부부에게 초대를 받았다. 그들을 만난 건 육 개월 전이었다.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으로 가는 길, 아틀라스 산맥 언저리에 있는 조그마한 호텔에서였다. 저녁을 먹다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프랑스에서 왔다는 이야기에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당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에 흠뻑 빠져있었던 터라 괜스레 반가웠던 것이다. 한참이나 카뮈를 찬양하던 내가 말했다. "저는 조만간 알베르 카뮈의 무덤에 찾아갈 거예요!" 그러자 그들은 그의 무덤은 자신들의 마을에 있다며 선뜻 초대를 해준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그들에게 연락을 하고 찾아갔다. 톰은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음식을 준비하던 엠마누엘이 따스하게 반겨주었다. 그들은 내게 따스한 차를 내주곤, 모로코에서의 이야기를 비롯해 그동안의 여정을 물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함께 집을 구경했다. 여느 젊은 신혼부부가 살 법한 세련되고 아늑한 집이었다. 마당으로 나가니 금붕어와 개구리가 사는 인조 호수가 있었고,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정원 너머 사유지도 함께 거닐었는데, 그곳에는 500그루의 올리브 나무와 수 십 그루의 체리 나무도 있었다. 우리는 함께 체리를 손에 한 움큼 쥐고 한참 동안 사유지를 산책했다.
햇살 따스하고 하늘도 청명한 가을을 바라보고 있는 늦은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날씨와 더불어 그들의 따스한 환대 덕에 행복에 도취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들의 초대를 어딘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무의식 적으로 나의 조부모와 외조부모를 떠올렸던 것이다. 톰과 엠마누엘도 나의 조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언제나 나를 강아지 취급하던, 내게 따스한 밥상과 이부자리를 내어주던, 언제나 몸 건강하라고, 아프지 말라고 걱정만 해주던 그들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내 일생에서 노년들과의 교류는 그들이 고작이었다.
한데 그들은 어딘가 달랐다. 함께 산책을 하며,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왜 알베르 카뮈의 무덤을 찾아왔는지를 물었다. 일 년 동안 먼 이방을 방황 중이던 나의 여정을 물었다. 내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 어떤 문학세계를 구상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19-20세기 프랑스 문학에 대해 서로의 감상을 나누었다. 오늘날 변해가는 프랑스의 국가-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한국의 젊은 세대의 정체성에 대해 서로의 견해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곤 조그마한 극장으로 향해 함께 예술영화를 보러 갔고 돌아와 와인을 기울이며 감상을 나누었다. 나는 점점 당혹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알던 노년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나의 조부모는 언제나 먹을 것을 한없이 챙겨주고 엉덩이만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런데 왜 톰과 엠마누엘은 나를 어째서 강아지 취급하지 않는 걸까. 나는 막연히 그들을 대함에 있어 조부모와 외조부모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나를 그저 어린 손자뻘의 사내가 아닌 자신들의 집에 초대된 손님처럼 정중하게, 아니 정겨운 친구처럼 동등하게 대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짙은 주름살을 가진 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언 삼십 년을 살고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노년의 이미지는 그저 편견이자 고정관념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동질감이 느껴졌다.
더욱이 나를 당황케 한 것은 노년의 그들이 너무나 열정에 넘치고 젊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결혼한 지 채 삼 년도 되지 않은 신혼부부였다. 내게 마을을 구경시켜주는 내내 그들은 손을 꼭 마주 잡고 있었다. 주방에서 함께 저녁을 만들어주는 모습은 애정이 넘쳐나는 젊은 신혼부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게 얼마나 느껴졌냐 하면, 할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사랑에 빠진 청년 같았고, 할머니의 자태는 충만한 사랑받고 있는 여인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도 함께 오버랩되었다. 오래된 랜드로버를 타고 단 둘이 모로코를 여행하던 그들. 여느 젊은이들보다 멋진 낭만이 느껴졌다. 그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주름살은 본질적인 무언가를 가리는 가면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왜 미처 몰랐던 것일까. 노년도 청춘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비단 나의 조부모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은 나이 때에 따라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으로 구분 짓는 동양적-유교적 가치관 아래에서 내가 나고 자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저 십 년이라는 세월을 단위로 사람들을 정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삼촌은 삼촌이고, 아저씨는 아저씨고, 노년은 노년으로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친구 같은 그들이 좋았다. 나를 강아지가 아니라 동등하게 대해주는 그들이 좋았다.
그들과 함께 했던 이틀의 시간. 그날 이후로, 나는 노년을 마주할 때면 톰과 엠마누엘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노인들이 주름살 속에 숨기고 있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모습들에 호기심이 생기고 만다. 얼마 전 외갓집에 홀로 놀러 가 난생처음 외조부모와 얼마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던지. 난생처음으로 그들의 젊은 시절을 물었다. 현재의 고민거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루흐마항에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고 돌아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누군가 내게 노년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무척이나 가까우면서도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우리와 비슷한 그 무엇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