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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저도 ; 이 시대의 문화적 경향에 대하여

오늘날, 획일적인 우리 시대의 사고 경향에 대하여

by 이우

문학마저도 ; 이 시대의 문화적 경향에 대하여



- 오늘날, 획일적인 우리 시대의 사고 경향에 대하여




DSC04398.jpg 나는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일까. ©leewoo, 2017





우리나라의 정서는 문학세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번역서의 경우에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권위 있는, 고전에 반열에 오른, 혹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단어, 어조, 분위기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하는 각주가 수두룩하게 달리는가 하면, 역자의 해석과 견해까지 중간중간 각주를 통해 등장해 흐름을 끊어놓는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과 밀턴의 <<실낙원>>이 특히 그러했다. 이 책들은 달린 각주만 해도 수백 개에 달하며, 평론은 족히 책의 2할 정도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가벼웠던 원작이 되려 무거워지는 것이다. 문학작품이 하나의 예술의 영역이라 할 때, 이것은 마치 영화를 보는데 옆자리에 수다스러운 사람이 귓속말로 자신의 견해를 계속 설명하는 것과 진배없다. 온전한 나의 시선으로 문학을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언제나 책의 말미에는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진지하면서도 전문적인 평론이 달려있다. 이 흐름에 따라 책을 읽게 되면 독자의 독자적(獨自的)견해는 평론의 무거움에 짓눌리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경향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으로서의 학문적 의지가, 순수한 문학작품에 개입해 자신의 권위의식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책은 이러한 것이다, 하고 영구적인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두 책의 원서-언제나 다 읽어내지도 못하면서 허영심 때문에 구입하고마는-를 직접 보고 그 극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원서는 날것 그대로의 원문만이 실려 있을 뿐, 각주하나 주석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의 번역 작품들 속에서 쉬이 찾아 볼 수 있는 작품 해설과 평론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작품만이 책 속에 담겨있을 뿐이었다.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보다 세상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나라의 정서 속에 짙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유튜브를 보아도 이러한 정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 반응이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견해와 리액션에 극도로 집착을 한다. 검색창에 '해외 반응'만 검색해도 얼마나 수두룩한 연관 검색어가 등장하는지.


사고의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퇴화되고 말았다. SNS에서 그 흔한 영화 후기를 보아도 고작 피력한 견해는 "넘나 좋은 것."이 고작이다. 나 역시 이러한 정서에 찌들어져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과 틀릴까 봐, 아니 다를까 봐 불안해하는 나. 그럼에도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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