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탕헤르에서, 오만했던 나를 홀딱 속여버린 사기꾼을 만나다
모로코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작은 문학 대회의 소설 부문에서 금상을 탔다. 해외에 있어서 상장은 받지 못했지만, 상금은 계좌로 송금되었다. 잦은 밤샘과 과로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몹시나 지쳤던 나는 상금을 들고 휴양을 떠났다. 탕헤르. 저 멀리 지브롤터 해협 너머 이베리아 반도를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해안도시이자, 그 유명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자신의 모험을 잠시 멈춘 채 머무르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마치 탕헤르로 향하는 내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기차역에 내리자 바다 내음이 기분 좋게 밀려왔다. 홀로, 모험의 세계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 미지의 자유를 만끽하리라. 화끈하게 상금을 탕진해 해안가에 위치한 오성급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오션뷰 룸이었다. 멋지게 테라스로 향해 창문을 열었다.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이 밀려왔다. 갈매기 소리도 들려왔다. 저 멀리 바다 건너 스페인의 땅도 보였다. 지브롤터 해협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다. 분명 언젠가 무명이었던 파울로 코엘료도 소설을 쓰기 위해 이곳을 왔다 갔겠지. 나도 언젠가...
오성급 호텔에서 누리게 된 난데없는 호사는 스스로를 취하게 만들었다. 망상 속에서 파울로 코엘료와 스스로를 동일시 여기던 나는, 창가에 기대 심사위원들이 쓴 심사평을 몇 번이고 복기하며 희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내게서 훗날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을 본 거겠지. 심사위원도 인정한 소설도 썼겠다, 머지않아 나도 파울로 코엘료처럼 멋진 소설을 쓸 수 있는,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 시대의 지성으로 자리매김할 거란 망상에 잔뜩 취하고 말았다.
저녁과 함께 먹은 맥주에 나는 스스로에게 더 취하고 말았다. 바람도 쐴 겸 거리로 나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곤 해안가를 따라 '메디나'로 불리는 구 시가지로 향했다. 홀로 흥겹게 걷고 있는데 한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왔어? 한국에서 왔다고? 여기는 왜 왔는데? 그의 물음에 나는 스스로를 소설가라고 소개하곤 집필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잘난 척을 했다. 감탄하던 그가 물었다. "어디에서 묵어?" 나는 손으로 호텔을 가리켰다. "나도 저기서 일 하는데. 바텐더거든."
그는 내게 호감을 얻으려 애쓰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사이즈가 딱 나왔다. 나를 갖고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구나. 너 정도면 단편 소설에 등장시킬만하겠다. 마음속으로는 그의 수작을 비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메디나로 간다고? 처음 가는 사람은 거기에서 길을 잃기 일쑤야. 내가 안내해줄게." 그는 내게 보폭을 맞추며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가이드 따위는 필요 없다고. 그저 가볍게 산책을 하고 호텔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자신을 계속해서 어필했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게 자신의 기쁨이라느니, 이방인에게 자신의 고향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 게 행복이라느니, 새로운 우정을 쌓는 게 신의 뜻이라느니 별소리를 다했다. 그래, 더 해봐라. 작가인 내가 속아 넘어가나. 나는 그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갈 길을 갔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졸졸 따라왔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이드였다. 그는 나의 눈길이 닿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번거롭고 성가셨지만,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괜한 오해를 한 것이 아닐까. 그는 그저 이방인을 호의로 대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일말의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와 함께 걷는 내내 상인들이 내게 한 마디씩 건넸다. 이 친구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넌 오늘 좋은 친구를 만난 거야. 피클 가게 아저씨도, 향료 가게 아저씨도, 접시 가게 아저씨도, 정육점 아저씨도 하나같이 말했다. 이윽고 나의 의심은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는 믿음의 쐐기를 박았다. "나는 돈 따위는 필요 없어. 그냥 친구가 필요할 뿐이야." 단답형이었던 나의 대답도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웃으며 나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냈다. 소설 대회에서 상을 타서 스스로를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나를 축하해준 그도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자신은 아들이 한 명 있고, 야간에 호텔 바에서 일하며, 이렇게 외국 친구들에게 고향을 안내해주는 걸 삶의 낙으로 삼고 있다고. 결국 그와 함께 메디나를 구경하기로 했다.
우리는 어스름이 진 메디나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저녁 기도 시간에 맞춰 간 모스크에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탕헤르가 유럽 강대국으로부터 분할 점령당하던 시절, 독일의 조차지이자 포대로 사용했다는 언덕을 둘러보았다. 흙으로 쌓은 옛 성벽들도 거닐었다. 탁 트인 언덕에서 저 멀리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어둠 속의 지브롤터 해협을 조망했다. 그리고 메디나의 가장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한없이 기뻤다. 새로운 것들을 보고 느꼈다는 것보다, 내게 따뜻한 호의를 가진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나를 더 기쁘게 했다. 우정이라 불릴 만한 것들을 고국에 남겨둔 채 홀로 떠나온 이방에서, 사실 그동안 나는 우정에 결핍되어 있었다. 소설 수상을 축하해준 것도 그가 유일했다. 그동안 목말랐던 우정을 맛보았던 나는 금세 취해버리고 말았다. 그를 진정한 친구라고 여겼다. 외롭지 않았다.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호텔 앞에 도착했다. 나는 몇 번이고 고마웠다며, 일주일 동안 이곳에 머무니 또 만나자고 했다. 뜨거운 악수를 나누려는 찰나, 그가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팁을 줘야지." 내가 고갤 갸우뚱하며 되묻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응, 팁 달라고. 내가 가이드해줬잖아. 원래는 팁 주는 게 매너야." "하지만 나는 가이드를 부탁한 적도 없었는걸." "거짓말하면 안 되지. 너도 나와 같이 구경하고 싶다고 했잖아. 게다가 내 덕분에 혼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봤고." 그는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만연해있던 우정 어린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정색까지 하며 돈을 요구했다. 이번에 상금도 받지 않았냐고, 이렇게 좋은 호텔에 머무는데 인색하다고, 매너 없는 신사라며 실망이라고 했다. 허탈감이 엄습했다.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그래도 그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으니 좋게 생각하자. 그에게 팁을 쥐어주었다. 그는 나의 지갑을 보더니 겨우 이 정도밖에 안주냐고 했다. 결국 원하는 금액을 손에 넣은 그는 눈썹을 찡긋한 채 뒤돌아갔다. 작별인사도 없이.
화가 난다기 보단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새로운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새로운 우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친구 사이에 팁이라니. 나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한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니 시장의 상인들도 모두 그와 한통속이었다. 호텔 직원이라는 것도 거짓이었다. 세상을 통찰할 줄 아는, 세상을 풍자할 줄 아는 작가라고 자부했던 내가, 세상으로부터 한 방 먹고 말았다. 이제 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자만했건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밤은 깊고 거대해져만 갔고, 자만했던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친근하게 느껴졌던 탕헤르가 무척이나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자만하지 말자. 내가 통관했다고 여긴 세상은 그저 내가 바라본 나의 작은 세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물 밖 세상은 한 없이 넓었고, 내가 모르는 미지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기만을 당할는지. 그동안 써온 소설도, 읽고 있는 책도 이 거대한 세상의 기만 앞에서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탕헤르의 밤은 두렵고, 우울하고, 고독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