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 Jan 20. 2019

환 더즈 환

순례길에서 만난 가족의 품에서, 방황과 일탈을 도모하다


“환Juan, 우리는 가족이야.” 제시가 말했다. 그녀의 어조 에는 반가움과 다그침, 그리고 서운함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참고로 ‘환’은 순례길에서 얻은 나의 이름이었다. 스페인 친구들이 지어주었다. 그 뒤로 모두 나를 환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한동안 발목의 상처로 인해 피치 못하게 그들보다 뒤쳐져 홀로 걷던 나였다. 그녀는 며칠 만에 그들의 품으로 돌아온 내게 우리는 가족이라는 걸 강조하며, 그동안 함께 걸었으니 앞으로도 함께 걸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녀의 한마디는 내게 크나큰 감동이었다. 


다시 가족과 함께 순례의 여정을 함께했다. 하지만 며칠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나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그들과 떨어져 걷는 동안 느꼈던 자유가 그리워진 것이다. 다시금 혼자만의 의지로 걸으며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의지가 지향하고자 했던 것은 가족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다. 나는 함께 걷는 가족을 사랑했다. 다만 가족이란 소속감을 가장 가벼운 형태로 가진 채, 그 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구성원이 되고자 했다. 


순례길에 오른 이유와 목적을 잊고 싶지 않았다. 홀로 지독하고 고독한 무언가를 체험하고, 귀중한 인식 혹은 영적인 영감을 얻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따스함 속에서 그런 것들과 점점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당시 니체의 허무주의에 흠뻑 빠져있던 나는 소속감이란 사회적 규율과 책무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켜야만 하는 규칙, 따라야 하는 규율, 그 속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는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개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어느 날, 함께 길을 걷던 도중에 몰리나세카Molinaseca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예쁜 강이 흐르고 있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작은 마을이었다. 강변에는 푸른 들판이 뻗어 있었고, 나무들은 여느 휴양지 못지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잠시 여정을 푼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나른한 휴식을 즐겼다. “우리 오늘 이곳에서 머물자. 어때?” 내가 말했다. 친구들은 솔깃한 듯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다들 “어때?” 하고 서로에게 물으며 눈치만 볼뿐이었다. 


잠시 진행된 가족회의에서는 ‘오늘 목표보다 덜 걷게 되면, 당장 내일의 여정에 차질이 생기며 이는 순례를 일정대로 진행하는데 방해가 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의무와 규율에 얽매이고자 순례를 떠났던 것인가! “그럼 나는 혼자 이곳에서 여정을 풀게.” 내가 말하자 그들은 걱정을 했다. 제시는 근심 어린 얼굴로 오늘의 달콤함이 내일의 고난이 될 것이라 경고하기까지 했다. “걱정 마. 내일 칠 킬로미터만 더 걸으면 너희들과 다시 합류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배웅했다. 


그리곤 강가에서 여유롭게 수영을 했고, 나무 그늘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워 달콤한 여유를 즐겼다. 챙겨 온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에 흠뻑 빠져들어 헤엄쳐 다녔다. 카페에 앉아 진득하게 소설을 썼다.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었다. 걸을 때에도 침묵 속에서 소설에 대한 구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자주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다 보니 친구들은 나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가 자신들을 싫어한다고, 영영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족을 사랑했다. 다만 그들과는 달리 그저 나만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나 의 요리를 좋아했다. 맛있게 식사를 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그들의 미소는 내겐 행복이었다. 때문에 내겐 요리가 그 들을 향한 사랑의 증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셰프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과 각별한 사이라고 해도 다른 템포를 유지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자 가족은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친구들 사이에 격언 같은 게 하나 생겨났다. 언제나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한참이나 뒤처진, 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내가 걱정될 때 쓰는 말이었다. “환 더즈 환(Juan does Juan).” 어느 날 소영이는 이 새로 생긴 격언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다. 이것은 ‘그는 곧 올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알아서 한다’ 정도의 뉘앙스를 띄는 말로, 가족 들 중 누군가 나를 걱정할 때 쓰는 경구가 되었다고. 


나는 ‘환 더즈 환’이란 말이 좋았다. 내게는 마치 용기와 격려의 응원으로 들렸다. 그들이 만든 경구가 ‘환은 매일 뒤 처지고 혼자가 되길 원한다’가 아니라, ‘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절실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로 채색되길 원했다. 그래서 고독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혼자가 되었다. 더 열정적으로 집필에 매진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가족의 사랑이 가득 담긴 ‘환 더즈 환’ 덕분에 치기 어린 방황을 도모할 수 있었다는 것을. 




환 더즈 환 ; 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절실하게 노력하고 있다. ©2015, leewoo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