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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Jan 13. 2019

변주의 시작

순례길에서 홀로 남겨지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다

새로 산 트래킹화 때문에 한창 고생하던 때였다. 걷기에는 완벽할 것이라 여겼던 트래킹화는 발목의 살갗을 짓이겨 놓고 말았다. 걸을수록 속살은 벌겋게 드러났고, 양말은 피범벅이 되었다. 때문에 걸음은 느려질 대로 느려졌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다 보니 허리도 아파왔다. 속도도 체력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친구들은 이미 앞으로 나아간 지 오래였다. 스스로에게 분했다. 순례길 위에서 새로운 신발을 샀다는 사실에, 함께 걸었던 친구들보다 뒤처졌다는 사실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엉망이 된 몸으로 순례를 강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태양은 모든 걸 쏟아내듯 내리쬐고 있었다. 상태가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해 눈 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날의 여정을 푼 곳은 테라디요 데 템플라리오스Terradillo de Templarios였다. 이곳은 순례길의 주요 거점지가 아니라 거의 모든 순례자가 지나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알베르게는 무척이나 한적했다. 절뚝거리며 여정을 풀고, 샤워를 했다. 햇살 아래 깨끗이 빨래한 옷 가지를 널었다. 


잠시 후, 알베르게의 처마 밑에서 숨을 돌리는 사이, 루 시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를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가 시간이 늦어도 약속 장소로 오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있는 테라디요에서 구 킬로미터나 앞서 있는 사아군Sahagún에서 여정을 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오늘은’이라고 했지만 앞으로도 그들과 함께 걸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제 그들과 함께 걸으려면 그들보다 구 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했다. 점점 발 상태는 악화되고 있는데.... 


아무리 우리가 ‘가족’으로 칭할 만큼 돈독해졌다지만, 이것만큼은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각자의 길을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니 말이다. “모두들 너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어. 이렇게 작별하고 싶지 않아.” 루시아가 말했다. 그들에게로 꼭 돌아가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엉망이 된 발로 그들을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울적해하며 걱정해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현실 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트래킹화를 들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찾았다. 내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트래킹화의 발목 부분을 무두질하듯 두드렸다. 제발 부드러워져라. 내일은 나의 살갗을 짓누르지 말아줘. 신발을 하염없이 내리치고 내리쳤다. “뭐 하는 중이야?” 그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 고갤 들어보니 한 여인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담배를 말며 호기심이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사연을 말하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활짝 웃곤, 내게 직접 말은 담배 한 대를 권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트래킹화를 내팽개치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순례의 피로와 뒤늦게 밀려오는 나른함 때문이었을까, 내뱉는 연기는 소박 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뒷마당에 널려 있는 빨래는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산들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함께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 오쉬. 헝가리에서 온 여인이었다. 그녀와는 이상하게도 대화가 잘 통했다. 


그녀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하자, 나는 한동 안 심취되어 탐독했던 칼 구스타프 융의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주 거니 받거니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한참 동안 토론했다. 우 리는 대화 끝에 순례길에서 마주하는 고독과 깊은 사색이 우리 자신의 무의식적인 일면을 막연하게나마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의견을 일치했다. 대화가 잘 통했던 우리는 내친김에 와인을 곁들인 저녁까지 함께했다. 


“아니, 여덟 시에 일어난다고?” 내가 놀라 물었다. “응. 큭큭. 내가 일어나면 알베르게에 순례자들은 하나도 없어.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하고, 아침도 천천히 챙겨 먹고 걷기 시작하는 거지.” 나는 그때부터 걸으면 덥지 않냐고, 너무 늦게 도착하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오늘도 여덟 시에 일어났지만, 이렇게 새벽 다섯 시에 출발한 너랑 거의 비슷한 시 간에 도착했는걸?” 이어 말했다. “우리는 경주하기 위해 이 곳에 온 게 아니잖아. 순례를 하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온 거지.”


어째서 나는 순례길에 법칙을 정해놓고 있었던 것일까. 다음 날, 그녀와 동행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달걀 프라이까지 곁들인 든든한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출발했다. 요 며 칠 동안 내가 괴로워하던 건 발목에 난 상처였다. 과감한 결 단을 내렸다. 트래킹화의 발목 부분을 칼로 도려내자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상처로 인해 발에는 피로가 누적되어 있어 걸음이 무척이나 더뎠다. 바쁠 것 없 다던 그녀는 나와 보폭을 맞추며 걸어주었다. 


정말 느긋하게 걸으며 순례길을 즐겼다. 이렇게 여유로 운 순례는 처음이었다. 마주친 카페에서는 얼음이 띄어진 레모네이드를 한가로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나 무 그늘에 마련된 해먹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 를 부리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함께 걸으며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요리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야기하며 함께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는 정말 그 요리를 저녁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녀와 함께하며 순례에도 각자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동안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자고, 또 먹고 하다 보니 그것만이 순례의 정석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주변 사람들의 템포에 나 자신을 맞춰왔다. 그리고 그들보다 뒤쳐지면 불안해했다. 나만의 삶의 템포가 있기는 했던가. 나만의 삶이 가진 색깔은 무엇이었던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측면을 성찰하게 해 준 오쉬, 그녀와 삼일 동안 함께 걸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함께 걸을 수 없었다. 나를 걱정하는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나보다 십오 킬로미터나 앞선 곳에 있었다. 이제는 불가피하게 그들과 이 별이라고 생각했다. 대가족이었던 암포야스 파밀리아에는 어느새 다섯 명만이 남아 있었다. 루시아, 소영이, 마리아, 제시 그리고 나. 하지만 한번 가족 은영 원한 가족. 그들은 나를 위해 결심을 했다. 하루 동안 걷는 걸 포기하고 아스트로가Astroga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순례길에서 하루를 포기하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 알고 있었다. 모두 소중한 시간을 내 서 떠나온 순례길 아니었던가. 그런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 해서 할애한다니. “이제 친구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오늘은 늦었지만 조금 더 걸으려고.” 함께 알베르게에 도착한 오쉬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정말 사랑스런 친구들이야. 그런 친구들이 있다니 부러운걸.” “그동안 함께 걸어서 너무 좋았어.” 


그녀와 작별했다. 애정이 가득 담긴 따스한 포옹과 함께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그렇게 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십 킬로미터를 걸었다. 아스트로가에 도착하자 친구들은 땀에 흠뻑 젖은 나를 와락 안으며 반겨주었다. 아, 사랑뿐이어라! 하지만 가족의 품에서도 오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연락을 이어 나갔지만 번번히 여정이 엇갈려 볼 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산티아고에서였다. 


다시 가족의 템포로 돌아온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오쉬는 내게 무언가 깊은 반향을 남기고 말았다. 그녀와 함께 걸었던 순간들이 그리워졌다. 다시 한번 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전혀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전혀 경이로운 것들을 깨닫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혀 낯선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면서도 자꾸 그들의 품에서 벗어나 방황을 도모했다. 




 

방황을 위해 찾아간 순례길에서 방황을 도모하다. ©2015, leewoo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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