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가 마주했던 도시의 어색한 정취에 대하여
아무리 걸어도 순례길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지평선에서 끝날 것만 같던 순례길은 끝없이 뻗어 있었다. 지구가 둥글기에 당연한 이치였다. 시시 각각 지평선은 멀리 달아났다.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는 오늘의, 내일의, 그리고 모레의 지평선 저 너머에 있을 터였 다. 때문에 산티아고는 그저 관념적인 목적지가 된 지 오래였다. 사실 실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좇는다는 것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꿈과 희망 같은 성질의 것들. 내겐 산티 아고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산티아고라는 꿈을 꾸며 순례길을 걸은 셈이었다. 언젠가 닿을 것만 같은 꿈만 같은 꿈. 때문에 당장의 목표는 산티아고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현실적인 것들이었다.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고, 그늘을 선사해줄 곳. 배낭을 내려놓고, 따스한 물에 몸을 녹이고, 지친 몸을 뉠 수 있는 곳. 그런 오아시스와 다름없는 곳에 도달하는 것. 순례자의 하루를 지배하는 목표는 그것뿐이다. 자그마한 언덕에 오르면 문득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저곳에 가기 위해 순례자는 하루 온종일 걸었던 것이다.
순례길 위에서는 아기자기한 마을들이 순례자를 반겨 준다. 사방으로 오 분만 걸어도 거주 구획을 벗어나는 자그마한 마을들이다. 무척이나 목가적이고 평온하다. 이곳에는 그 흔한 광고판도, 네온사인과 흥겨운 음악도, 소비를 부추 기는 상점의 쇼윈도도 없다. 순례자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곳이다.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순례길을 묵묵히 걸으며 했던 생각들,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굳게 다짐한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다. 어렴풋이 품고 있던 꿈과 희망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길 위에는 이렇게 아기자기한 마을만 있는 것 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대도시와 마주하게 되었다. 대도시는 정말이지 내게 야릇한 기분을 선사했다. 방금 오른 언덕에서 저 멀리 거대한 도심이 보인다. 자연 속에 있는 순례길 과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세상.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을 위한 길은 없어진다. 아스팔트 위로 차들이 쌩쌩 지나쳐간다. 순례자는 차를 위해 길을 양보하고 갓길로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한다. 커다란 광고판들이 우뚝 서있다. 남루한 순례자는 이제 도심에 압도되고 삼켜지고 만다.
아무리 스페인이라는 이질적인 세계지만 도시는 도시였다. 도심에는 내가 익히 예상하고 있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로 바삐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럭셔리함 을 과시하는 최신형의 고급 차량들, 바버 숍에서 멋스럽게 헤어스타일과 수염을 정리하는 사내들, 뽐내기 위해 한껏 멋을 부린 아리따운 여인들, 노천카페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나른한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 나 역시 도시에서 나고 자란 도시의 인간이었다. 도시를 마주한 나는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야릇한 감상에 빠지고 말았다.
도심 속에서 잊고 있던 정취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영문 도 모른 채 좇았던 세속적 가치, 보편적 행복, 달콤한 쾌락, 그리고 쳇바퀴 속에서 살았던 문명인으로서의 삶 말이다. 당황스러웠다. 광활한 자연과 순례길에서 두 발로 사색했던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만 여겨졌다. 쇼윈도에 비친 나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덥수룩한 수염, 까맣게 그을린 피부, 땀에 전 옷차림, 커다란 배낭. 그리고 꿈꾸는 듯한 눈빛. 나는 도시인인가, 순례자인가!
그럼에도 도심에는 순례자를 흥분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여정을 푼 뒤, 그나마 갖고 있던 옷들 중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번화가로 향했다. 피로도 잊은 채 골목을 누볐고, 상점들을 기웃거렸으며, 분위기 좋은 식당과 술집을 찾아갔다. 화려한 도심 속에서 친구들과의 우정 어린 시간들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순례자라는 사실도 잊을만큼. 하지만 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곤 깨달았다. 술집이 아닌 어딘가로 뻗어 있는 저 길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순례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도시에서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잠시 이별하고 남루하고 겸허해져야만 한다. 고독해져야만 한다. 사색의 길에 서야만 한다. 창조의 세계와 마주 해야만 한다. 어스름이 진 도심은 어느새 내겐 하루빨리 벗 어나고 싶은, 괴리되고 싶은 공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를 마비시키고 융해하는 도시와 하루빨리 작별하고 싶었다. 그나마 순례자의 정서를 간직할 수 있는 알베르게에 숨어들어 경건한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해도 뜨기 전, 순례자가 되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