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 Dec 30. 2018

어리석음 하나

순례길에서 익숙한 어리석음과 마주하다

성찰의 시간, 이제 나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할 차례이다. 순례를 앞두고 누나는 멋진 트레킹화를 선물해주었다. 원래 는 낡은 트레킹화를 신고 순례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단번에 계획을 바꾸었다. 현빈이 광고하던 트레킹화였다. 광고 속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멋지고 힘찬 모험가의 이미지처럼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 과했다. 일상에서라면 모를까, 새 신발은 행운이 아니었다. 번지르르한 이 신발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신발은 신고 길을 들여야 비로소 내 몸처럼 편한 나만의 것이 된다. 그래서인지 전설과 옛이야기 속에서 신발은 

그 소유자의 정체성을 나타내곤 했다.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를 봐도 그렇다. 말괄량이 주인공 카렌은 ‘빨간 구두’를 몸에서 ‘떼어내자’ 겸허한 신앙심을 가진 조신한 소녀로 바뀐다. 어디 이뿐이던가.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로 왕자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아손은 강물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곤, ‘외짝 신 사내가 이올코스의 왕이 된다’는 소문처럼 정말 왕이 된다. 


잠시 이야기가 빗나가긴 했지만, 요점은 새 트래킹화는 아직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것이 되려면 한참을 길들 여야 했다. 순례길에 신고 왔어야 했던 것은 새 트레킹화가 아니라 오래된 트래킹화였다. 하지만 새것의 유혹을 이길 만큼 현명하지 못했다. 결국 발은 물집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물집 때문에 염증이 생겨 발이 퉁퉁 붓기까지 했다. 현빈이 되는 건 이번 생엔 틀린 일이었다. 간신히 길을 걷고 소영 이와 상점에 들러 트래킹용 샌들을 샀다. 누나의 선물은 배낭에 구겨 넣었다. 


양말에 샌들이라, 그리 좋은 패션은 아니었지만 순례길에서는 정말 최상의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가볍고 통풍도 잘되는 데다 벗고 신기 간편하고, 흙먼지에 양말이 만신창이가 되는 걸 빼면 정말 걷기에는 최적이다. 샌들을 신은 후 물집이 하나둘 사라져 갔고, 순례길에 첫발을 내딛던 그때처럼 다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샌들을 신더니 걸음이 빨라졌다고 놀라기까지 했다. 나는 양말에 샌들이라 는 형편없는 패션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걸은 것뿐이라고 하며 친구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예기치 못한 지출을 하곤 자책했다. 그래도 샌들 값을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 쓴 수업료라고 자위하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샌들도 말썽을 일으켰다. 너무 열정적으로 걸었던 탓인지 깔창이 발 모양을 따라 움푹 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파인 홈을 따라 물집이 생겼고 물집은 점점 커졌다. 다시 걸음이 느려졌다. 절뚝거리는 탓에 샌들 깔창은 더욱더 파이기 시작했다. 물집도 더욱 커져갔다. 아, 어쩌란 말이냐. 


피치 못하게 또 다른 샌들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세일을 하는 신발 가게를 찾아 저렴한 가격에 구입 을 했다. 일주일 정도 이 샌들을 신고 길을 걸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일주일이면 대략 이백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걷는다. 싼 게 비지떡이라 했던가, 금세 샌들 스트랩이 고장 나버렸다. 발등을 꽉 잡아주어야 할 스트랩이 헐렁거리다 보니 발등의 살갗이 헐기 시작했다. 반창고를 붙여봐도 소용없었다. 또다시 절뚝거리며 걸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마을에서 대책을 세워야 했다. 다시 신발 가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트래킹화를 살 거야! 이번에는 까다로운 체크 리스트를 만들었다. 견고하고 튼튼한지, 발은 편하게 감기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꼼꼼히 살폈다. 디자인은 이미 고려 사항에 없었다. 가장 투박하게 생긴 트래킹화를 구입했다. 새 신을 신고 길 위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편해서 불안하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문제가 나타났다. 목이 높은 부츠형 트래킹화가 복숭아뼈 윗부분의 살갗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절뚝거리다 보니 친구들보다 십 여 킬로미터나 뒤처지게 되었다.


홀로 떨어져 푸엔테 피테로Puente Fitero S. Nicolas에 여정을 풀었다. 그곳에서 세무로 된 트래킹화 목 부분을 부드럽게 만 들려고 돌멩이를 움켜쥐고 쉴 새 없이 무두질을 했다. 분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누나가 사준 신발까지 합치면 네 번째 신발이었다. 왜 이렇게 바보 멍청이일까. 더 이상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 비용을 지출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이 신발과 산티아고까지 어떻게든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정성스런 무두질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음 날 발목 살갗이 피가 날 정도로 벗겨져 길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분노에 차 맥가이버 칼을 꺼내 들었다. 트래킹화의 발목 부문을 과감히 잘라내 버렸다. 신발에 나를 맞출 수 없는 법이다. 기성화가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내게 딱 맞는 신발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신발을 내게 맞추어야 한다. 단호한 선택은 적중했다. 발목이 댕강 잘린 신발은 볼품없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편해졌다. 


요란하게 어리석음을 일깨워준 수업은 그렇게 끝이났다. 저 멀리 앞서간 친구들을 다시 추격해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발목 부분이 댕강 잘려나간 나의 신발을 보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다. “배고파서 잘라먹었어.” 그들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발목이 댕강 잘려나간 신발, 여기에는 나의 어리석음이 여기저기 배어 있었다. 이제 이것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이 되었다. 나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저건 누구의 정취가 깃든 신발일까. ©2015, leewoo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