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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Feb 17. 2019

가짜 순례자

스스로를 진짜 순례자라 자부했던 오만에 대하여


산티아고를 삼백여 킬로미터 앞둔 레온León. 이곳을 기 점으로 순례길의 분위기가 변질되고 말았다. 순례길의 주 테마였던 고즈넉함은 어느새 왁자지껄함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정취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신출내기 순례자들이었다. 생장에 비해 순례를 보다 가볍게 시작하기에 적절한 곳이어서일까, 레온에서부터 많은 사람이 순례길에 올랐다. 그들은 그동안 쭉 걸어왔던 우리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깨끗한 배낭에 산뜻한 옷차림을 했고, 과도한 열정으로 달리듯 나아가는가 하면, 갓 생긴 물집 때문에 절뚝거리기도 했다. 



이런 그들은 이전의 우리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전혀 익숙치 않은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삼십 명 정도 무리 지어 걷는 단체 순례자들도 있었으며, 관광버스를 타고 순례 길의 거점 도시만 찍으며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도, 개인 운전기사가 모는 캠핑카를 타고 하루에 고작 삼 킬로 미터 정도만 가볍게 걸으며 일반 순례자들과 여정을 맞추는 럭셔리 순례자들도 있었다. 순례길이 왁자지껄해졌다. 여정을 풀 알베르게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행여나 자리가 없을까 발걸음을 서둘러야만 했다. 순례가 숙소를 잡기 위한 경주처럼 변질되고 말았다 


이제 길 위에는 넘쳐나는 순례자들을 위한 비즈니스가 성행했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카페, 레스토랑은 자리 조차 잡기 힘들었다. 커피와 맥주 한잔은 물론 음식값이며 숙박비까지 치솟았다. 거기에 새로운 순례자들은 호기심을 갖고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왜 순례길에 올랐나요?” “내가 순례길에 오른 이유는 말이죠....” 그들 앞에서 할 말이 없었 다. 이건 순례길의 초반에 친구들과 이미 나누었던 대화였고, 이제는 내밀하게 품고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혼란스러움만 가중되고 말았다. 


“순례길이 망가진 것만 같아요.” 함께 걷던 진영이가 말했다. 그는 순례길의 후반에 만난 동생으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홀로 고독하게 사색하며 걷는 걸 좋아하는 그를 볼 때면, 어딘가 나처럼 진득한 무언가를 내면에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우리는 단체 순례자들로 혼잡스럽기 짝이 없는 알베르게를 벗어나 외곽에 위치한 조용한 사설 알베르게에 머물렀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변질된 순례길의 정취에 대해 이야기했다. “순례를 하는 게 어딘가 조급하고 쫓기는 것 만 같아요. 순례길 초반의 평온함이 그리워졌어요.” 정말이었다. 일과 끝에 찾아오는 잔잔한 안식도, 고요한 저녁노을 도, 소박한 온기도 온데간데 없어졌다. 우리는 바로 그런 이 유로 마을 중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사설 알베르게를 도피하듯 찾은 것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톰이 뭐라는지 아세요? 이제 길 위에 가짜 순례자fake pilgrim밖에 없대요.” 


가짜 순례자. 우리는 마치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새내기 순례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사실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순례가 생장 피드 포르에서만 시작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었다. 레온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해도, 어떤 방식으로 걷는다 해도 순례자는 순례자였다. 단지 우리는 새로운 순례자들과 스스로를 구별하려 했던 것이다. 아니, 그래야 만 했다. 우리는 그동안 오백여 킬로미터의 여정에서 이미 체득한 경험과 인식들이 있었다. 분명히 그들과 달랐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만남을 갈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찾았고, 함께 이동했으며,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렀다. 굉장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버렸다. 단단하게 뭉쳐 가짜 순례자들을 위해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너희와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형성해온 분위기를 지키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시간과 경험에서 쌓아온 건 우리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하지만 그들이 ‘가짜’였다면 과연 우리는 ‘진짜’였을까. 




 

하지만 그들이 ‘가짜’였다면 과연 우리는 ‘진짜’였을까. ©2015, leewoo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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