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 세대를 위하여
요즘 웃어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게 같은 질문을 건네곤 한다. “너는 언제 결혼할 거니?” 결혼식장에서 지인들을 만나도, 명절에 친척 어른들을 만나도 항상 같은 뉘앙스의 질문들이 이어진다. “너도 얼른 국수 먹게 해 줘야지.” “이제 너만 가면 되겠다.” “좋은 처자 있어? 한 번 데려와.” 아직 단 한 번도 결혼을 염두에 둔 적 없는 내게, 그들의 질문은 어딘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최대한 예를 갖춰 대충 둘러댄 뒤 자리를 뜬다.
그들과 작당모의라도 한 것일까. 부모님도 결혼을 언급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왜 이렇게 그릇을 많이 샀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답했다. “이건 네 색시 오면 주면 되지.” 열 살이나 어린 친척 동생의 임신 소식에 아버지는 말했다. “에구, 나는 언제 할아버지가 될는지.” 부모님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오직 나의 결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무작정 결혼을 부추기는 요구들이 집에도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서둘러 자리를 일어나 방으로 도망친다.
언젠가부터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결혼 요구에 강하게 반발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몸에 밴 예의범절 탓에 타인들에게는 하지 못한다. 철부지는 오직 부모님에게만 대든다. “결혼 안 할 거라니까요.”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데 무슨.” 사실, 이런 말은 결코 부모님께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럼 이제 내가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사니?” “너 그런 말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차라리 그럴 땐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는 게 상책이다.
고요한 방. 익숙한 규칙으로 정돈된 공간. 오래되고 정든 물건들이 풍기는 안락한 정취. 애장품들로 둘러싸인 사랑스런 세계. 달콤한 희망과 꿈들이 부유하는 공기. 마음이 놓인다. 더 이상 질문은 굳게 닫힌 문 때문에 침범해오지 않는다. 이 세상 이곳만큼 마음의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어 주는 곳이 있었던가. 결혼, 누군가와 일상의 순간까지 함께하는 것. 사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이번에도 이별을 택했다. 그녀도 말하지 않았던가. “오빤 나보다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야.” 그렇다. 나는 이 작은 방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이다.
이런 고민을 말할 때면, 결혼 선배들은 너스레를 떨며 말한다. “결혼 별거 아니다.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맞추는 거야.” “그냥 그렇게 미워하고 사랑하며 사는 거야.” “일상처럼 곁에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 언젠가 나타날 거야.” 하지만 어째서 그들의 조언이 그리 와 닿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 조언이 귀납적 추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서 내린 결론을 그대로 타인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결혼을 먼 이야기처럼 여기는 건 비단 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 나이 서른둘, 친구들 대부분이 싱글이다. 오히려 결혼을 한 친구들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오늘날 결혼 적령기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을 보면 결혼하라고 부추기는 어른들은 우리 세대와는 너무나 다르다. 삼촌과 아버지 세대는 보통 이십 대 초반, 그리고 조부 세대는 십 대 후반에 했다.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홀로 지내왔는지를.
그들이 살아온 세계는 기본적으로 대가족이었다. 형제자매도 적게는 삼 형제, 많게는 팔 형제에다 조부모까지 함께 살았다. 그것도 크지도 않은 한 집에서 모두가 같이 부대끼며,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자랐다. 반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온전한 개인만의 공간을 갖고 살았다. 무언가를 숨길 수 있는 서랍이 딸린 책상, 혼자만이 잠드는 넉넉한 침대, 어느 때고 세상과 단절할 수 있도록 걸어 잠글 수 있는 문고리. 침묵에 익숙하고, 고독도 안다. 비밀도 많다. 살아온 환경이 윗 세대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의 고향은 그들과는 달리 ‘자기만의 방’이다.
사실 윗 세대들이 결혼을 흔히 ‘맞춰가는’ 것이라 정의 내리는 것도 그들의 자라온 환경이 한몫한다. 어려서부터 살내음을 코끝에서 느끼고, 살갗을 부대끼며 온기에 익숙해지고, 한 공간 안에서 그렇게 티격태격 알콩달콩 싸우고 화해하며 사는 방법을 온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어렸을 당시 사회 이슈는 가정의 ‘핵가족화’였다. 가정엔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그래도 어른들은 그네들이 익혀온 삶을 결혼제도를 통해 집에서도 유지해왔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익히지 못했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 많은 시간을 홀로 지냈다는 것이다. 조부가 이미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나를 낳았던 나이도 훌쩍 넘어버렸다. 우리는 어떻게든 맞추고 감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때문일까, 연애에 있어서는 웃어른들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경험치를 갖고 있다. 맞춰 살기보단 맞춰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이별을 택해왔다. 너무도 쉽게.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 홀로 남겨져 웃어른들로부터 들은 질문을 곱씹는다. “너는 언제 결혼할 거니?”
물론 이것은 비단 우리 세대만의 문제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문제에 가깝다. ‘같은 예술’을 한다는 이유로 나를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어느 중년의 여인이 있다. 이따금씩 그녀는 뒤늦게 한 결혼을 후회한다고 했다. 배우자를 사랑하긴 하지만 자기만의 세계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의 처방전은 ‘각방’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의 온전한 공간을 갖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어쩐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감할 수 있었다.
오늘도 텅 빈 방 안에 홀로 있다. 저기 한 편에 누군가가 떠나간 흔적이 남아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또다시 온전한 나만의 세계에 너무 깊숙이 들어온 사랑을 화들짝 놀라 내보낸 것이다. 그녀가 머물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해서. 문을 열면 그녀가 있으면 좋으련만, 문을 열고 나간 그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 얼마나 이기적이란 말인가. 자기만의 따스하고 밀폐된 세계에 앉아 따스한 사랑을 갈구하는 어리석은 욕망이란. 애석하게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차라리 자기만의 방이 없었다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