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가까운 수도원 메테오라에서 죄의식에 대한 고찰
메테오라, 그리스어로 '하늘에 걸린'이란 뜻을 가진 바위산. 그곳에는 정말 거짓말처럼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동방 정교회의 수도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자태부터 신비로운 수도원들을 향해 이른 아침부터 등산을 했다.
하늘과 가까워 눈부시고 찬란할 것 같던 수도원은 저 아래 지상의 어느 곳 보다 어두웠다. 마치 동굴처럼 음침한 수도원 내부는 비잔틴 양식으로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가득했다. 주된 주제는 천지창조,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인간의 원죄, 최후의 심판, 사탄의 유혹, 지옥과 천국, 예수의 기적과 고난, 그리고 부활이었다. 아마 수도승들은 필연적인 죽음마저 인간의 죄로 바라보는 사도바울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으리라.
하늘과 가까워 눈부시고 찬란할 것 같던 수도원은 저 아래 지상의 어느 곳 보다 어두웠다. 마치 동굴처럼 음침한 수도원 내부는 비잔틴 양식으로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가득했다. 주된 주제는 천지창조,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인간의 원죄, 최후의 심판, 사탄의 유혹, 지옥과 천국, 예수의 기적과 고난, 그리고 부활이었다. 아마 수도승들은 필연적인 죽음마저 인간의 죄로 바라보는 사도바울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으리라.
지하 납골당에는 이곳에서 수도승으로 지내다 죽음을 맞이한 수백 개의 해골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곳, 철저히 고립된 기독교의 세계-어쩌면 작고 단조로워 더욱 완전한 통일성을 가진-에서 신을 외경하고 찬미하며, 또한 원죄의식에 사로잡혀 일생을 보냈을 수도승들의 삶을 떠올려보았다. 세속적인 것들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고 금욕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지적인 유희를 즐기며 또 경건한 삶을 살았을 수도승들을 말이다.
그들이 수도원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구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은 그 자체의 음침함과 프레스코화의 주제의식 만으로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그 무거운 주제보다 훨씬 중압감을 가진 곳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함께한 힌두교를 믿는 호주인 친구는 프레스코화를 바라보며 힌두교의 내세관, 즉 천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선을 쌓아야 비로소 현세의 삶이 끝나는 영겁회귀의 굴레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어쩌면 수도원에 가득 찬 '구원'에 대한 고뇌는 메테오라처럼 하늘과 가까우면서도 음침한 곳에서 진정 어울리는 그런 고뇌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나 역시 구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적 구원을 바라는 이들은 언제나 햇살로부터 가려진 음침한 곳으로 기거해들어갔다. 울창한 숲과 깊은 산, 동굴, 교회, 수도원... 그러나 일생 동안 인간이 저지른 죄를 인위적인 닫힌 공간에서 기도하고, 뉘우치고, 회개한다고 죗값을 온전히 치르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은 인간의 진정한 구원이란 카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2차 대전 자신의 민족-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암시하며). 카인이 누구던가. 동생을 죽이고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처럼, 용서의 희망도, 회개의 가능성도 배제한 채 자신의 죄를 온전히 짊어지고 홀로 광야로 나아간 사내였다. 나는 종교를 믿던 믿지 않던, 죄는 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덜어낼 수도 없다. 마틴 루터도 면죄부를 비난하지 않았던가.
한때 구원을 꿈꾸었을 메테오라의 수도원들도 이젠 그 기능을 상실한 채 한낱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 카인처럼 죄의식을 짊어진 채 그 무게를 잊지 않고 사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를 진 한 인간의 '갱생'도 사실 완전히 죄를 씻는 것이 아닌 온전히 죄를 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메테오라에서 내려오는 길 어깨가 뻐근했다. 카인처럼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