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능력에 대한 고찰

무언가를 소화한다는 것에 대하여

by 이우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곤 했다. “너는 못 먹는 음식이 있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못 먹는 음식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홍어도 먹어보았고, 외국에 있을 때는 취두부도, 개구리도, 메뚜기도, 달팽이도, 생닭회도, 쓰레기가 아닐까 의심되는 런던의 피쉬앤칩스도, 모로코에서는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한다는 양부랄도 먹어보았다. 외국 친구들은 호기심에 한국인이면 개고기도 먹어봤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나는 못 먹는 음식이 없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을 별 탈 없이 먹어치웠다. 이제 다만 그것들을 애써 찾아 먹으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것들은 못 먹는 음식이 아니라 안 먹는 음식인 것이다. 아마 사람들이 ‘안 먹는 음식’이 있냐고, 혹은 ‘먹기 싫은’ 음식이 있냐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면, 쉽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뭐든지 다 먹어보려고 했다.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하나의 경험이요, 그 음식이 갖고 있는 문화에 대한 수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먹는다는 것에 대해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먹는다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오감 중 하나인 미각을 통해 무언가를 지각(知覺)을 하는 것이다. 먹음으로써 무엇에 대해 느낌으로써 인식하고 지각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먹을 때 우리는 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처음 먹어보는 음식일 때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짙다. 이건 뭘로 만들었지. 어떻게 요리를 한 것일까. 이런 걸 어떻게 주식으로 먹고 살까. 정말 사랑과 정성을 쏟은 음식이구나. 그리하여 우리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무엇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집밥, 어머니의 된장국을 그리워하는 것도 사실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그리운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먹는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도 무언가를 수용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도원의 결의를 떠올려보자.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유비, 관우, 장비는 함께 술잔을 나누며 형제의 의를 맺고 의병을 일으킨다. 만일 그들 중 누군가 “미안, 어제 과음해서.”라며 술 마시는 행위를 거부했다면, 아마 도원의 결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술잔에는 담겨 있던 것은 사실 술이 아닌 약속과 결의였고, 그것을 마신다는 것은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는 언제나 먹고 마실 것들을 앞에 두고 있다. 소개팅, 중요한 미팅, 화합을 도모하는 회식자리. 함께 먹고 마신 자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우리는 먹은 음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한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 그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먹음으로써 한 존재의 일부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왕성한 식성(食性)을 갖고 있는 사람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개 왕성하게 먹고 마시는 사람일수록 성격도 모난 데가 없고, 대인관계가 좋다. 편식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들이 많다. 극명한 예로, 나는 병에 걸려 음식을 먹지 못하고 튜브를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조차 힘에 겨워했다. 그는 ‘먹지 못해’ 새로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영 불편할 때 우리는 편히 먹지 못한다. 먹지 않고 음식을 그대로 남기거나 심지어 전혀 먹지 않고 자리를 뜨기까지 한다. 그 남기는 행위는 사실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우리의 의중이 드러나는 지표인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가 마음에 들 때 앞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운다. 무르익은 자리일수록 술병은 쌓여가지만, 그 속에 남아있는 술은 하나도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화능력은 신체 나이에 비례하는 것 같다. 언젠가 교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은 맛있는 고기를 다 먹지도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교수님 더 안 드세요?” 내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내 나이가 되면 더 먹고 싶어도 못 먹게 돼. 소화가 안되거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백 년을 살고 돌아가신 증조할머니는 언제나 정말 간에 기별도 안 갈 만큼 소식을 하셨다. “할머니 더 드세요.” “안돼. 삭히질 못해.”

잘 드시지 못하던 어르신들. 그들에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이 예의 없게 굴거나, 수업시간에 모자를 눌러 쓰고, 슬리퍼를 신고 오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어떨 때는 강의실 밖으로 내쫓기까지 했다. 증조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간혹 과거의 트라 우마적인 사건으로 정신이 회귀하곤 했다. 홀로 과거로 돌아가 다시 그 사건을 제대로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그 일은 다 끝났어요.”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녀는 달력과 시계를 보고도 결코 자신이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것도,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늙고 지친 육체는 점점 소화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뭐든지 다 먹어보려던 나도 이제 종종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특히 돼지국밥을 먹고 나면 속이 부대끼는 것 같아 특별한 일이 아니면 먹지 않으려고 한다. 내게도 이제 소화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제 점점 소화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방탄 소년단을 전혀 소화할 수가 없다. 엑소를 전혀 소화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까진 천만다행인 게 블랙핑크는 소화할 수 있다.



KakaoTalk_Photo_2018-12-27-23-58-42.jpg 소화능력에는 무언가에 대한 수용력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leewoo,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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